나 혼자 만렙 뉴비 853화
853화. 최후의 거점 ‘아자토스의 궁전’ (3)
진혁이 아델 곁에 선 케이시와 주드로를 바라봤다.
짙은 갈망과 살기가 뒤섞여 있는 눈동자.
엘더갓들과의 거래 때문에 보내긴 보내는데…….
스토커와 저 전투광들이 한 자리에서 뒤엉키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리려고 한다.
“싸우게 되더라도 제압하는 선에서 끝내줘. 그래도 그 녀석 심성이 아주 글러 먹은 건 아니니까. 적당히 하면 알아들을 거야. 아마도.”
“흐응. 재밌는 말을 하네.”
진혁의 당부에 아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 층 더 진해졌다.
“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 지경이 되고 나서도 그 녀석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거냐고.”
아무리 오랜 추억을 쌓고 경험을 공유했든.
지금은 적의 마수에 빠져 이쪽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 타의는 아니겠지.
저토록 적극적으로 적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건 분명 강한 소망에서 비롯된 자의리라.
결국.
어설프게 회유를 하려고 하다간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죽든가. 죽이든가.”
선택지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살아남는 쪽을 선택하는 게 맞으리라.
“어설픈 잣대로 판단하려고 하지 마. 누굴 넘어서고 싶다는 그 강렬한 바람과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
진혁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얼굴로 아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케이시. 주드로.”
“응응!”
“왜왜, 오빠!”
“서로가 선을 넘지 않도록 개입해, 어디까지나 제압만 하는 것일 뿐. 사망자가 나와선 안 돼. 너희도 위험해질 것 같으면 바로 자리에서 이탈하고. 녀석도 굳이 추격까진 하지 않을 거야.”
“오오. 유성이 형 생각하는 게 아주 각별하네.”
“으응. 우리도 오빠 말을 들어주고 싶긴 한데, 아델 오빠도 화나면 꽤나 무섭거든. 그래도 노력은 해볼게!”
케이시와 주드로가 양 주먹을 꼭 쥐며 답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장담하건대 놈은 더 이상 네가 알던 검성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을 셈이야?”
그래. 알고 있다.
천유성은 이미 너무 먼 곳으로 가버렸다는 것쯤은.
그런데도 왜일까.
그 바보 녀석을 그곳에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삐뚤어진 바람의 말로는 결코 녀석이 바라던 종착점이 아닐 테니.
“우리 회사는 한 번 입사한 사원을 쉽게 포기하지 않거든.”
일단 들어오면 뼈를 묻는 것.
그것이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모토다.
진혁과 엘리스 그리고 테레사는 곧장 새로운 목적지로 향했다.
대부분의 것들은 오기 전에 다 준비해뒀지만, 이 궁전 안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들은 현지 조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 도착한 장소다.
빼꼼.
기둥 사이로 세 얼굴이 살며시 삐져나왔다.
거대한 벽에는 입구 대신 수많은 언어들이 적혀 있었다.
저곳이 바로 아자토스의 궁전이 자랑하는 ‘기록 보관소’다.
“문지기들이 있구나.”
“정말 간만에 적들을 만나는 것 같아요.”
갈림길에서 가디언들을 상대하긴 했지만, 통상 아자토스의 궁전은 그 엄청난 크기에 비해 거주자가 거의 없다.
사실 침입자 자체가 50층의 최심부인 이곳까지 올 리도 없거니와, 혹여나 오기 위해 시도를 하더라도 궁전 근처에 있는 수많은 태고의 몬스터와 신격들에 의해 갈가리 찢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녀석들은 꽤나 특별했다.
어쨌거나 이 궁전에서의 거주를 허락받았으니까.
“크르륵.”
“크륵.”
약 3m 크기의 외형.
눈, 귀는 없이 코와 날카로운 입만 가진 다족 보행 개체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징그럽게 생겼네.’
저 녀석들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아우터 갓의 유생’.
아자토스의 궁전에서 서식하는 놈들로 이후 아우터 갓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일종의 새끼들이다.
자아도 없는 데다 전투력 자체도 아주 특출난 건 아니었으나 이 궁전 내에서는 ‘불사(不死)의 가호’를 받고 있을 터.
‘건드리면 굉장히 성가셔진다.’
무엇보다 한 번이라도 공격을 받으면 비명을 지르며 동족들을 불러왔기에 잠입한 입장에서는 최악의 파수꾼을 맞닥뜨린 셈이리라. “해치울까요?”
테레사가 슬며시 마검에 손을 갖다 댔다.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 상기되어 있는 볼과 충혈된 눈.
‘타락’과 ‘태고의 마력’이 몸속에 스며들고 있는 부작용이었다.
온갖 훈련 끝에 제어가 가능해지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상황일 때 이야기.
이곳은 아자토스의 본거지다.
그 순수하고 강렬한 태고의 마력이 넘쳐나고 있는데, 몸 안에 있는 본능이 꿈틀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괜히 그걸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장소는 전투를 벌이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큰 장소다.
“아뇨. 여기는 놈의 침실과 가깝습니다.”
노래와 춤이 계속되는 한, 어지간하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한다.
단언컨대 아자토스의 본체가 잠에서 깨어날 경우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는 없었으니까.
세계선의 붕괴.
단순히 지구나 시련의 탑뿐만이 아니라 은하 몇 개 정도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것이다.
아, 극한의 예외도 있긴 하겠네.
엘더갓들의 본거지인 드림랜드와 그들의 수장인 노덴스 정도는 살아남을 확률이 1% 정도는 있겠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경우이니 제외하도록 하자.
“그럼 아주 조용하고 몰래 들어가자꾸나.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바보 성녀와 달리 짐은 아주 날씬해서 절대 안 걸릴 자신이 있다.”
“저, 저 살 안 쪘어요!”
“풉. 한 마리 햄스터가 갑옷을 입고 있는 줄 알았다만? 잠자코 짐의 활약이나 지켜보고있거라.”
엘리스가 고양이 걸음을 할 자세를 취했다.
아끼던 구두마저 벗는 걸 보니 기특하긴 한데.
아우터 갓의 유생들은 청각과 시각이 퇴화된 대신 후각이 극도로 발달해 있다.
5m 안으로 들어가면 100% 체취를 들키게 될 터.
뽀옥!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꺼낸 작은 병의 뚜껑을 뽑았다.
시큼하고 비릿한 향이 나는 액체가 가득 담긴.
“우욱. 이건 또 무엇이냐?”
“설마 마시라는 건 아니겠죠?”
다행히 그건 아니다.
이건 아우터 갓의 유생들과 똑같은 체취를 낼 수 있는 추출물이었으니, 그저 향수처럼 몸에 좀 뿌리면 충분하다.
스프레이식이 조금 더 낫겠지.
진혁이 추출물을 분무기에 옮겨 담았다.
치익!
‘내 몸에 먼저 뿌리고.’
치이익!
테레사에게는 조금 더 뿌린다. 아무래도 신성력이 있다 보니 양이 좀 있어야 들키지 않는다.
테레사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히끅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어떻게든 견뎌냈다.
지독한 향이 코를 통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몸에서 나는 체취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지, 짐은 혈향이 나니 괜찮지 않겠느냐? 굳이 이런 걸 하지 않아도 괜찮느니라. 무엇보다 최후의 전투를 위해서 짐에게 어울리는 ‘블러드 메리 859’를 뿌렸단 말이다!”
“싫으면 뭐 우린 먼저 들어갈 테니 남아서 쟤네랑 한바탕 해야지.”
“알겠다. 대신, 최대한 조금만 뿌려다오.”
뿌와아악!
특별히 아주 듬뿍 뿌려줬다.
괜히 고고한 척하던 것에 대한 괘씸죄를 추가해서.
“케엑! 켁!”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보니 약간은 체증이 가시는 듯싶었다.
그렇게 체취를 완벽하게 감춘 셋이 아우터 갓의 유생들 사이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크륵.”
“크르르.”
후욱하고.
썩어가는 죽음의 숨결이 스쳐 지나갔다.
먹잇감의 머리를 통째로 뜯어서 우적우적 씹는 걸 선호했기에, 악취는 생각 이상으로 독했다.
치이이익!
뚝뚝 떨어지는 침 역시 강산성이라서 위협적이긴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불사의 파수꾼들마저도 유일한 추적능력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이상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에 불과했다.
이래서 괜히 정보의 비대칭이 최강의 무기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기록 보관소’에 입장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양피지와 책들이 가득한 장소가 나타났다.
시련의 탑과 온갖 세계선에 관한 정보들이 가득한, 수백 층 높이의 서재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 장관은 절로 감탄사를 불러일으켰다. ・・・・・・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일전에 보물창고에서는 아자토스의 고유무장을 봉인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사실 미친 듯이 차원의 틈새를 막고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마냥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진혁이 재빨리 모두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배했다.
“두 사람은 여기에서 ‘최초의 혼돈’에 관한 정보를 찾아줘.”
50층의 공략 조건.
궁전 최심부에 잠들어 있는 최초의 혼돈만 확보할 수 있다면, 굳이 다른 위험한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주어진 조건 하에 달성 가능한 단 하나뿐인 길이기도 했다.
문제는 기록 보관소에 있는 자료들은 일정 시간을 주기로 계속해서 그 위치가 랜덤으로 바뀐다는 점이겠지. 정확한 좌표를 알고 있는 아자토스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특정 양피지나 자료를 마음대로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엘리스가 ‘블러드 체이서’를 발동합니다!]
릭 헤네시에게서 받은 ‘설계자의 비약’.
거기에 엘리스의 혈계능력이 합쳐지면서 ‘블러드 체이서’라는 특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꿈틀!
엘리스의 손바닥에서 나온 얇은 실핏줄이 수많은 서고들 사이를 빠르게 누비기 시작했다.
비약으로 인해 혈액의 중간중간에 은은한 보랏빛이 멤돌았다.
[테레사가 ‘신성과 타락의 경계’를 발동합니다!]
섞이지 않는 신성력과 마기의 경계가 만들어지며, 특정 키워드가 없는 책과 양피지에선 신성력이. 반대로 ‘최초’나 ‘혼돈’의 키워드가 씌어진 정보들엔 특유의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기엔 진혁이 네크로노미콘에서 얻은 ‘각인’이 새겨져 있어 정보의 선별작업을 수백배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끔 해놨다.
“최대한 구별해 볼게요.”
테레사가 마력을 올렸다.
“짐만 믿거라.”
엘리스가 정신을 집중했다.
확실히 사전에 연습해줬던 대로 둘의 호흡은 환상적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시간만 조금 있으면 충분히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겠지.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즉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초의 혼돈’뿐 아니라 이곳에는 또 하나,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하는 게 있었다.
바로 마지막 엔드피스급 무기에 관한 단서가.
같은 시각.
양들의 요람에서는 차원의 틈새를 두고 모든 종족의 사활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콰!
투콰아앙!
일격에 사라져버린 최전선.
그 압도적인 화력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마저 전부 집어삼켜 버렸다.
쿵! 쿠웅!
타이탄들이 심연 포식자에게 맞섰다.
작은 산을 떠올릴 만큼 거대한 몸체가 그대로 태고의 마수를 짓밟았다.
하지만.
퍼어어억!
타이탄의 몸이 통째로 폭발하며, 그 속에서 심연 포식자가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뱉었다.
“크오오오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있노라 고하듯이.
“우리도 가세한다. 위대한 분들께 확실히 눈도장을 찍도록.”
한쪽에서는 한 차례 접전을 치렀던 북유럽의 신격들이 진군했다.
수많은 거인들과 북유럽의 전사들을 이끌고 온 오딘과 주신들이 냉막하게 각자의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오딘….”
“기어이 마지막까지 이리 나오겠다는 건가.”
그 모습을 보던 연합 측에선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태고의 마력을 주입받은 ‘위그드라실’은 이미 과거의 전성기를 뛰어넘었고.
북유럽의 전사들 역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격을 가지게 되었다.
“전력으로 맞선다. 왕관에 주입된 내기와 마력까지 전부 사용하거라.”
천마의 머리 위에 쓴 왕관에 검붉은 기운이 맺혔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위대한 왕관들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패도와 용맹. 신속과 절망의 왕관.
태고의 존재들에게 맞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성유물들이 개방되었다.
다양한 마력들이 솟구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를 끝마쳤다.
그런데.
딱 하나.
“뭐지…?”
제대로 빛을 뿜어내지 않는 왕관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