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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67화


867화. 에필로그. 메인 엔딩(with 엘리스 편)

시련의 탑이 공략되고 2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달아올랐던 축제의 분위기도 조금은 진정되었고, 이제는 모두가 각자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 이 미스테리한 정상 정복에 관한 궁금증이 해소된 건 아니었다.

-대체 그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50층을 무슨 수로 공략한 것인가?

이제 목숨도 안전해졌겠다… 싶으니. 베일에 싸인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싶어졌다.

그렇게 각 협회의 고위 관계자들이 50층에 간 공격대를 끈질기게 들들 볶은 결과 약간의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었다.

말했던 것이다. 다들 모종의 거래를 한 건지 말을 아끼는 탓에 많은 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플레이어 ‘강진혁’이 이끄는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모두를 구원했노라

“그렇단 말이지.”

“강진혁이라. 강진혁. 한국 이름인데. 한국에서 유명한 사람이야 유천영과 유연화 이태민 정도 아니었어?”

“조금 더 넓히면 민정우 이유리 정도까지가 되겠습니다만, 강진혁이란 인물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마치, 지워진 것처럼요.”

“이 정도 일이면 당연히 이름이 알려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고인물 코퍼레이션이라는 것도 암스테르담의 성녀를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활약 자체가 드문데 말이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허나, 이들이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그리고 현재.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당사자는 현대가 아닌 시련의 탑 안에 있었다.

시련의 탑 39층.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의 거점 ‘블랙 캐슬’이 있는 곳엔 여러 명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중이었다.

“모기이이!”

“히힛!”

“여기야. 여기 이쪽으로 패스해!”

“후후, 고귀한 동양의 용인 이 몸이 막고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리라.”

“음영극살.”

“뭣? 아니, 그림자 이동은 반칙이지 않느냐!”

“이거 능력 금지하고 하는 게임 아니었어?”

“속하는 오직 주군의 명령에만 따를 뿐.”

“야이 미친 놈아.”

한쪽에서는 축구 삼매경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호수의 물을 즐기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이라니.”

“이렇게 햇살을 즐기면서 적당히 물이나 적시는 게 최고죠. 여기 안에 너무 예쁜 물고기들도 많더라구요.”

“헤헤. 저도 완전 행복해요.”

“주님의 은총에 감사를, 에그타르트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너무 맛있어요….”

엘리스와 오필리아 안드리아와 테레사가 각각 한 마디씩 늘어놨다.

쪼오옥.

테이블 위에 올려둔 각양각색의 트로피카 음료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간단히 곁들여 먹을 과일 타르트나 아이스크림 빙수 등도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그렇게. 여성 멤버들은 다들 각자에게 어울리는 수영복과 선글라스를 낀 채 평화를 만끽했다.

바로 그때.

콰아앙!

호수의 한복판에 거대한 돌덩이가 날아왔다.

잔잔했던 수면이 요동치고 10M가 넘는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미, 미친.”

“또 뭐야? 태고의 존재야? 아니면 테러리스트?”

“꺄아아악! 짐의 소중한 핑크 다이아 반지가 물에 휩쓸려 버렸느니라!”

“적습인 거예요!”

난데없는 기습에 여성 멤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블랙 캐슬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은 패닉 그 자체였다.

“크하하하! 가슴이 뜨겁구나.”

암황이 껄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나타났다.

“암황 할아버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리 가만히만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지 않더냐? 이런 평화로운 삶은 심신을 무르게 만드는 법. 그리하여 이참에 본 신교는 제1회 ‘세력대전’을 선포하겠노라!” 

“세력대전이요?”

“이 호수를 지배하는 자가 천하제일인 걸로!”

어느새 암황의 등 뒤로 수많은 무림인들이 천천히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걸 기점으로 조용히 휴가를 즐기고 있던 각종 세력들이 깨어났다. “전쟁이란 말이지.”

“하기야 탑도 평화를 찾았으니 영역은 확실히 정하긴 해야겠지.”

“가소롭구나 애송이들.”

“격의 차이를 몸에 새겨주겠다.”

자칫하다간 정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다들 몸만 어른들이라니까. 애도 아니고.’

결국 진혁이 나섰다.

“자자. 진정하시고, 그럼 종목은 수중 발리볼로 하시죠.”

어디까지나 휴가라는 목적을 잃지 않고 건전하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화합의 장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수중 뭐시여?”

“발리볼은 뭔데? 칼과 창을 던져서 뭘 맞히는 건가?”

“잠수를 한 채 물속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건가 보군.” 

뭐가 됐든.

각 세력의 명예를 걸고 하는 대결에 있어 양보란 없다.

전심전력을 다해 상대를 찍어누를 뿐,

“설명하자면 이건 한여름에 선남선녀들이 바닷가에서 하는 놀이인데….”

진혁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답….”

“…무용!”

“다 쓸어버려라!”

콰콰콰콰콰콰

때아닌 마력의 폭풍이 블랙 캐슬에 몰아쳤다.

“이것들이 남의 집에서 대체 뭘 하는 거야아아!”

엘리스의 분노가 폭발하고 나서야 미친 듯한 폭주가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

물에 흠뻑 젖은 테레사.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던 건 가브리엘이었다.

“테레사.”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테레사를 불렀다.

“네?”

“괜찮으시겠어요?”

“어떤 게요?”

“아니.. 정말로 저희 에덴으로 와서 성녀로서의 교육을 이어가실 거라는 거. 진심이신가 해서요.’ 구원의 성녀.

타인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은 어느새 인간의 몸으로 천사의 격에 오를 정도가 되었다.

이름을 하사받아 천사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신 많은 걸 내려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같은.

“네. 이건 제가 택한 길이에요.”

테레사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우리 같이 힘내봐요. 게다가… 혹시 아나요? 인간이 천사가 되면 천상에선 그 천사의 소원을 하나 이뤄준다는 말이 있어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가브리엘이 부드럽게 테레사를 꼭 안아주었다.

같은 시각.

추혼사영과 천유성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후후. 천 공자는 같이 안 놀 건가요?”

“관심 없습니다. 애들 놀이 같은 건.”

무리한 부탁을 했던 천유성과

모든 이들을 배신하면서까지 그 부탁을 들어줬던 추혼사영.

그 둘은 아주 잠시 동안 서로를 마주 봤다.

먼저 입을 뗀 건 추혼사영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문파를 이끌려면 아이는 몇이나 낳는 게 좋을까요?”

“푸웁스, 스승님!?”

“후후후, 농담이랍니다. 아무리 저라도 제자를 막 어떻게 하고 그렇진 않아요.”

“당연한 말씀을….”

천유성이 뿜은 음료수를 빠르게 닦았다.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지만, 워낙에 충격적인 말을 들은 터라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제자가 이미 스승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렸다면, 그럼 더 이상 사제지간으로 지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추혼사영이 요염한 미소를 지은 채 다시 한 번 천유성의 곁으로 다가갔다.

***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놀다 잠들어버린 밤.

호수 앞에 있는 숲에선 진혁과 엘리스 단둘이 남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만이 잔잔하게 호수를 비추고 있었다.

엘리스가 진혁의 곁에 붙어 앉았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느니라. 내 복수도 도와주고 가문을 되찾게 해주고. 태고의 존재들로부터 우리 모두를 구해주고. 참으로 기나긴 여정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사기만 쳐대서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는데, 이리 듬직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

“으음. 그거 관련해서 한 마디 하자면 나도 널 처음 만났을 때 그래도 되게 기품 있고 고고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순 맹탕이었을 줄은 누가 또 알았겠어?” 

“매, 맹탕이라니! 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고하고 아름답단 말이다!”

라고 하기엔….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커스터드 크림이 듬뿍 들어간 슈크림 케이크를 꼭 쥐고 있었다.

진혁의 시선을 눈치챈 엘리스가 잔뜩 볼을 부풀렸다.

“나, 나만 먹으려는 게 아니라 같이 나눠 먹으려고 가져온 거란 말이야. 꼭・・・ 같이 먹어야 하는 거라서 다들 자러 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뒤에 감춰놓고 있던 건 포도주.

그것도 세월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거였다.

최소한으로 어림잡아도 족히 몇천 년은 숙성시킨 진짜 중의 진짜일 것이다.

“호오. 그렇다면야.”

이런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곧이어 진혁과 엘리스가 잔을 기울였다.

한잔, 두 잔, 세잔.

마시는 알코올의 양이 많아질수록 대화는 조금씩 진중해져 갔다.

“이 포도주는 사실 짐의 어머니께서 나중에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마시라 했던 술이다. 탑이 정복되었는데 이 정도로 중요한 날은 또 없지 않겠느냐?” 

으음. 이건 또 새로운 정보네.

엘리스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시련의 탑 세계관에서도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좋은 분이셨나 보네.”

“훌륭한 분이셨지. 성인이 되어 가시밭길 같던 가주의 삶을 살아가기 전 유일하게 따스함을 알게 해준 분이었다.”

홀짝.

엘리스가 다시 한 번 와인을 머금었다.

-우리 귀여운 딸아. 언젠가 이 어미보다 더 소중하고 좋은 이를 만난다면, 그때에는 이걸 함께 나눠 마시렴.

병상에 누워있는 엘리스를 꼭 닮은 여인.

힘없이 마른기침을 콜록이면서도 엘리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오는 눈동자는 여전히 빛을 잃고 있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겐 오직 어머니뿐. 그 외에 다른 이들에겐 결코 정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제 곧 저는 아타락시아의 가주 자리에 올라야 하는 몸. 저는… 저는 감정 없는 괴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가문을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어요.

생명이 시들어가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서도..

엘리스는 주먹을 꼭 쥔 채 차마 약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가주는 생명체가 아니다.

엄격한 규율 아래 모든 것을 빈틈없이 수행해야만 하는 ‘아타락시아의 상징’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하는 자였다.

그런 엘리스에게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절대 장담하지 말고 단언하지도 말렴,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외로워도 꿋꿋이 참고 견디렴. 언젠가… 네 과업과 책무에 실린 무게까지 전부 이해해 줄 그런 이가 나타날 거란다. 반드시.

포도주의 이름은 뱀파이어의 언어로 ‘미아일라’.

‘영원한 약속’을 뜻했다.

얼굴에 홍조가 드리운 엘리스가 진혁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다가온다.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다.

어느새 새하얀 손가락이 진혁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이제 대답해줘. 네 생각이 어떤지.”

엘리스의 말에, 진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정이야 오래전부터 있었다.

다만, 더 큰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그걸 애써 무시했을 뿐.

하지만 모든 게 사라진 지금. 더 이상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마저 내던져 자신을 지켜준 소중한 존재.

엘리스를 놓친다면 그거야말로 이 탑 전체에서 가장 소중한 걸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혁의 시선이 힐끗 포도주로 향했다.

‘영원한 약속’.

당연히 모든 언어에 통달한 진혁 역시 포도주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소중한 추억까지 공유할 만큼.

그렇기에.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진혁이 목소리에 감정을 담았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억지로 호의를 사기 위해서도.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도.

혹은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서도 아닌.

오롯이 한 연인을 위해서.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어떤 시련이 오고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겠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잊지 않겠다.

그리 맹세하겠다.

그러니.

“내 곁에 남아 나와 함께 있어 줘.”

“응!”

또르르.

엘리스의 눈을 타고 맑은 눈물이 흘렀다.

드디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에게 그 마음을 확인받았다.

세상 그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동시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뇌수까지 파고들었다.

시간이 멈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둘이 조금 떨어졌다.

입맞춤은 예상보다 더 길었다.

환하게 뜬 달이 반쯤 구름에 잠길 정도로.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야겠지?”

“물론이다. 결혼식도 해야 한다. 물론! 그동안 마음고생시킨 걸 생각해서 모두 짐이 원하는 대로!”

“그래그래. 우리 엘리스.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보다. 이제 슬슬 들어갈까? 새벽 이슬이 제법 차네” 

진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말을 마친 엘리스가 순식간에 진혁의 위로 올라탔다.

“자, 잠깐, 모두의 앞에서 축하받고 싶은 것 아니었어? 여긴 우리 둘밖에 없는데.”

“후후.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만, 짐은 일단 지금 이 순간을 한 모금도 아끼지 말고 만끽하고 싶구나.”

어째 목소리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긴장이 풀리면서 참았던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스?”

“가만히 있거라.”

그것으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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