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69화
869화. 아타락시아의 결혼식
블랙 캐슬.
아타락시아의 본거지가 위치한 이곳엔 현재 성대한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이쪽에 화환 더 가지고 와!”
“포도주도 잔뜩. 아니, 몇 병이 아니라 통째로 다 쓸어오라고!”
“버밀리온 가문과 줄리아드 가문에서도 온다고 합니다. 예. 아무렴. 엘리스 님의 결혼식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여러 뱀파이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최대한 성대하고 화려하게.
탑의 모든 존재들이 경외하며 부러워할 만한 식을 열어라.
그것이 이 성의 주인이자 그들의 가주인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의 명령이었다.
덕분에 벌써 3주째 아타락시아의 모든 구성원들이 발에 땀이 나게 움직여야만 했다.
“저기 엘리스. 이건 좀 심한 거 아닌….”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진혁이 정당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쿠쿠쿠쿠쿠!
웨딩샵 전체가 요동쳤다.
하스팅이 운영하는 본점이었는데. 그건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될 듯싶었다.
우리 가주께서 예민하다 못해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었으니까.
“계약자가 결혼식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 것이냐!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속상해 죽겠는데!”
1,395번째 드레스를 바꿔입던 엘리스가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다.
“미, 미안.”
순식간에 꼬리를 내린 진혁이 애꿎은 장미꽃만 만지작거렸다.
제기랄.
탑 밖에 있을 때 현대 영화와 드라마를 보여주는 게 아니었는데.
덕분에 영국 황실 결혼식은 애들 장난으로 만들어버려야 하는 퀘스트가 주어졌다.
“크, 크흠! 당장 더 많은 드레스를 공수해 오도록 할 테니. 제발 부수지만 말아주시죠. 이제 관리자도 아니고, 여기 없어지면 저도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단 말입니다.”
하스팅 역시 가게의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해 전보를 날려댔다.
그렇게 한참을 예복을 고르며 실랑이하는 동안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헤헤.”
해맑게 웃으며 나오는 엘리스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음에 들어?”
“응!”
1,411번째로 고른 드레스가 그야말로 완벽했던 것.
반지도 준비해뒀고,
청첩장도 다 돌려뒀으니.
이 기나긴 결혼식에도 드디어 탈출구가 보였다.
‘그나저나 진짜 평화롭네.’
시련의 탑 1층 상점가는 형형색색의 전등과 불꽃들이 어우러져 숨 막힐 듯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령과 인외족들이 어우러져 이야기를 나누며, 길거리를 거니는 모습은 어색하기까지 했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며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치르던 게 불과 얼마 전 이야기. 심지어 태고의 존재들에 의해 모든 게 무로 돌아갈 뻔하지 않았던가?
그래. 하지만,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활로를 찾으며 변수들을 만들어냈고, 함께해온 동료들과 마침내 탑의 마지막 층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게 불과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것이냐? 혹시! 짐과 함께 무얼 먹을지를 고민하고 있던 걸까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아하니 아니라고 하기도 그러네.
하긴, 요즘 식 준비를 한다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긴 했었지.
“근처에 근사한 레스토랑이라도 가서 한잔할까?”
“그, 그것도 좋은데. 나는 계약자가・・・ 직접 만들어준 음식이 더 좋아. 안 돼?”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조심스레 묻는 엘리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시달렸는데 요리까지 부탁하긴 스스로도 미안한 거겠지.
하지만 진혁은 피식 웃으며 엘리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신부가 원하는데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호수 쪽에 가서 먹자. 달빛이 아주 근사할 거야.”
“신・・・・・・ 그치. 맞아. 나 신부지 이제. 헤헤.”
그 단어가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듯. 엘리스가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럼, 재료만 사서 바로 성으로 돌아가 볼까? 구마도 오랜만에 집밥 괜찮지?”
“모기이이!”
쫄래쫄래 뒤에서 따라오던 고구마도 힘차게 포효했다.
***
삼일 뒤.
수많은 폭죽들이 하늘을 가득 물들였다.
퍼퍼펑!
퍼엉!
통상 결혼식은 낮에 많이들 하지만, 뱀파이어의 결혼식은 보름달이 떴을 때 한다.
주례를 맡은 건 암황이었다.
스승으로서 이걸 자기가 하지 않으면 화산의 꼭대기에 투신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화산파 장문인이 직접 눈물을 쏟으며 그것만은 막아달라고 부탁했고,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 본좌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다. 새아가. 오늘 아주 아름답구나.”
“크흠! 뭐. 보는 눈은 있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암황과 엘리스는 죽이 잘 맞았다.
“이집트는 A-10번 석으로 가!”
“십이지신분들은 B석이야! 거기 묘족분들! 화환 뜯어먹으면 아주 ᄌ되는 거야!”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정령수들이 열심히 하객들을 안내했다.
“모기모기!”
“위대한 고대종께서 입이 심심하니 돈봉투와 함께 마정석도 달라고 하신다.”
고구마와 말랑흑두루미 그리고 후라이드는 입구에서 축의금과 선물들을 받는 역할을 맡았다.
“아, 참새아가. 지존께서 특별히 주라고 한 것을 가져왔다.”
암황이 꺼낸 건 그 귀하디귀하다는 공청석유였다.
북해빙궁 쪽에선 미용을 위한 특별한 영약과 영단까지 준비해 두었다.
“고, 고마워. 더 예뻐져 볼게!”
엘리스가 마정석이나 보석을 받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린 태양의 샘물을 가져왔다. 다크서클과 피로도 회복에 아주 좋지. 물론, 신혼부부에게도 아주 좋고, 강진혁의 술잔에 딱 3방울만 넣으면 충분할 게다.”
아누비스가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했고,
“저는 아름다운 노래가 나오는 하프를 드릴게요. 심신이 안정되며 보기에도 아주 예쁘답니다.”
가브리엘은 2m에 이르는 대형 하프를 가져왔다.
최상급 신성석과 아다만티움으로 제작한 거라 가치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올림포스에선 큐피트들이 만든 화살과 활을 선물했다.
“끌끌끌. 다들 선물 꼬라지 하고는 이 몸은 ‘마신의 오두막’을 가져왔다. 훗날 부부싸움을 한 후 외박을 하게 될 경우, 최소 1,000년은 버틸 수 있는 필수품들이 갖춰져 있지.”
참고로 베리엘이 준 선물은 바로 폐기 처리되었다.
식장에서도 쫓겨날 뻔한 건 덤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세력들이 예를 표하며 예물을 헌납했다.
“신혼여행지는 저희 상단에서 마련해 두었습니다. 탑의 유명 휴양지들과 제휴를 해뒀으니 느긋하게 즐기다 오시면 될 겁니다.”
릭 헤네시가 중절모를 벗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들 고맙네.
탑을 오르며 쌓아온 인연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진혁 씨.”
바로 옆에서 눈부신 금발을 말아 올린 테레사가 나타났다.
하얀 블라우스에 하늘색 치마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천사가 되는 수업을 받아서 그런지. 등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추는 것만 같았다.
“와줬군요.”
“가장 소중한 사람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놓칠 수야 없으니까요.”
테레사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애틋한 눈빛. 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슬픔이 엿보였다.
진혁이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테레사의 얼굴이 품에 폭 파고들었다.
빼꼼하고.
토끼 같은 눈망울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질거렸다.
“테레사 씨?”
“후후. 근데 그거 알아요? 우리한테 익숙한 일부일처제는… 현대에서만 통용되는 관습이라는 거? 하지만, 이 시련의 탑은…으음. 뭐랄까요. 많이 자유분방한 곳이에요.”
하얀 손가락이 진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전 아직도 포기 안 했거든요.
이건 타락한 버전이었을까? 아니면 본래 버전이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결혼식 당일 알 수 없는 폭풍이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캬오오오!
저 멀리서 두 눈이 붉게 물든 엘리스가 무시무시한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쭈뼛쭈뼛 일어서는 솜털.
전신의 세포들이 최고조의 경고를 보내온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 장면을 걸리고 말았다.
“어라? 전 이만 가볼게요. 조금 있다가 식장에서 봐요!”
테레사가 총총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뒷수습은 해주고 가야지.
이렇게 가버리면 난 어쩌라고.
“엘리스. 이건 그게….”
“저 바보 성녀가 대체 뭐라고 한 건데, 둘이 그렇게 꼭 붙어있던 거야?”
“별말 안 했어. 아니. 진짜로 축하한다고 했을 뿐이야.”
“내가 보기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
[고유성창 ‘개벽의 계시록’이 발동됩니다!]
시야가 변한다.
신부 대기실에 솟구친 핏방울들이 모여들며, 엘리스의 등 뒤로 붉은 고리가 만들어졌다.
‘아자토스…를 깨우는 게 나으려나?’
생존확률을 묻는다면 51:49정도.
참고로 51% 생존율이 아자토스를 깨우는 쪽이다.
분명, 혈옥 어딘가에 놈의 고유 무장도 몇 개 정도 봉인해둔 걸로 기억하는데.
그걸 이용한다면……
꿀꺽.
진혁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
모든 게 잿가루가 되어버릴 뻔했지만, 신혼여행을 1주일 더 연장하겠다는 약속을 한 덕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잠시 뒤, 본격적인 식이 시작되었다.
보름달이 비추는 야외 식장.
형형색색의 화염구들이 곳곳에 떠다니며 주위를 밝혔다.
이태민과 유연화가 꽃잎을 뿌렸고.
월영이 피아노 대신 금을 타며 동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대망의 축가를 맡은 건 천유성이었다.
곡은 ‘Marry me.
천유성이 불러주는 축가는 여러 의미에서 심금을 울렸다.
처음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더니.
그래도 해주긴 하네.
나중에 추혼사영이랑 혼례를 올릴 때 뭐라도 좀 해줘야겠다.
그나저나 저 외모에 굵은 저음으로 노래를 부르니 모여 있던 여성 하객들의 혼이 쏙 빠졌다.
“어머나. 다들 눈빛이 마음에 안 드네요. 무림이랑 대전이라도 치르시려고 그런 걸까요?”
오죽하면 추혼사영이 저런 말까지 하면서 경계를 하겠는가.
“크하하! 경사로다! 그래. 최소한 아이는 열 명씩은 낳도록 해야 한다. 최강의 핏줄을 낭비해서야 되겠느냐? 그럼, 행복하거라. 제자여.”
축사가 마무리되었다.
진혁과 엘리스가 서로를 바라봤다.
“엘리스.”
“응!”
“오래오래….”
지금 이 순간부터. 세상이 끝날 때까지.
“행복하자.”
둘이서.
진혁과 엘리스의 입술이 살포시 포개졌다.
그렇게 둘의 결혼식이 끝났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같은 시각.
탑의 어느 층계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50층을 봉문해줘.
진혁이 50층에 오르게 되면서 탑에 빈 소원.
하지만, 그 소원에는 맹점이 있었다.
딱 하나.
층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며, 50층이 봉인되기 전에 이미 빠져나온 존재가 있었으니까. 꿀렁꿀렁.
검보랏빛 액체들이 모여들며 하나의 형체가 만들어졌다.
“……”
손가락을 움직이며 천천히 몸에 적응해나가는 존재.
“이것 참….”
말라버린 입술이 쩌억 벌어지며 자조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방 먹었군요.”
셀 수 없는 우주적 세월을 영위하며 처음 느껴보는 감정.
‘패배’에서 오는 분노와 허탈함은 그 어떤 말과 문장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쓰라리고 뼈아프다.
하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금서와 그걸 통해 갈 수 있는 또 다른 차원.
아자토스의 염원을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니알라토텝이 아주 느릿느릿 마력을 끌어모았다. 지금부터는 이쪽이 반격을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