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78화
878화. 블랙 캐슬 (2)
은발에 붉은 눈동자.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우아함을 간직한 미인이다.
아마 한 송이의 눈꽃을 일컫는다면 눈앞에 있는 이 여인에게 빗대고 싶을 정도로.
“여러분은 누구실까요?”
자애로운 미소와 따뜻한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진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진혁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와 너무나 똑 닮은 이와 수많은 여정을 함께 했었기에.
“엘리스의… 어머니시군요.”
“설마. 아니. 그러고 보니… 닮았군.”
천유성이 헛바람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긍정했다.
“페투니아 폰 아타락시아’라고 합니다. 엘리스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그 아이의 친구분들일까요?”
페투니아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비슷하죠.”
이 세계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원래 세계에서는 부부관계였으니까.
“정말・・・ 다행이네요. 그 아이에게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남아 있다니. 말해주세요.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고요? 항상 가신들이랑만 어울려 다니는 줄 알았는데, 여러분이랑 만나면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페투니아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러더니 벙쪄 있는 진혁과 천유성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해요. 너무 뜻밖에 소식이라서요. 너무・・・ 말이 많아 버린 걸까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자. 이거 드시면서 천천히 이야기 해봐요. 처음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싶어요.”
달그락.
따뜻한 홍차와 딸기 쇼트 케이크가 진혁과 천유성 앞에 놓였다.
거기에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불이 곁들여지니 심신이 전부 노곤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음’
엘리스가 어머니의 성품의 반의 반만 닮았어도… 세상이 훨씬 더 따뜻해졌을 텐데.
“처음 알게 된 건….”
진혁이 엘리스와의 추억을 천천히 곱씹었다.
상당수 각색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꽤나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흐르자 옆에 있는 천유성이 전음을 사용했다.
-괜찮은 거냐? 여기서 이렇게 수다나 떨고 있어도?
-장모님이 궁금하다고 하시는데 그럼 어떡하냐?
-남자가 돼선 그것 하나 못 끊고 계속 끌려갈 거냐 이 말이다.
-그러는 지는? 추혼사영 씨가 심부름시키면 발에 땀 나도록 튀어 나가는 주제에 말이 많아. 어제 보니까 한밤중에 얼음물 속에 들어가 타이텔로스 잡고 있더만? 왜, 추혼사영 씨가 먹고 싶다던?
-그, 그거야…!
-됐고, 나도 오래 끌진 않을 거니 가만히 있어 봐.
페투니아가 하는 말 중에도 이번 침식을 공략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들이 있었다.
진혁이 조용히 새로운 정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영광의 시대가 지나버린 아타락시아와.
그걸 넘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뱀파이어라는 종족.
일족의 생존을 위해 엘리스는 모든 가주들을 이끌고 층계 정복에 나섰다.
그 길은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결국에 엘리스는 상층부의 거대 세력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뱀파이어 제국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무거운 왕관을 머리에 쓰고.
모두의 운명을 어깨에 싣고.
전장의 최선두에서 스스로를 불태우면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로군요. 아무리 엘리스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너무 무거운 책무입니다.”
진혁이 진흙이라도 한 움큼 집어삼킨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머리로는 알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엘리스와 원래 차원의 엘리스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욱씬!
심장 한켠이 아프다.
– 감히 짐의 앞에서 자유를 입에 담다니.
– 복수를 해야 한다. 짐을 배신하는 놈들에게 모조리 그 대가를 알려줄 것이다!
– 아타락시아의 이름을 되찾을 것이다. 오직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 지금까지 견디고 또 견뎌왔다.
타락한 자들의 회랑에 갇혀 마음이 병들어가던 엘리스.
그리고.
-헤헤. 닭다리는 짐의 것이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일시불로 사겠다! 인플레이션? 그게 뭔지 모르지만, 그것까지 전부 사버려 주마!
-행복하구나. 계약자와 하루하루를 쌓아올릴 수 있다는 게.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엘리스.
그 변화를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다.
하지만.
이 세계의 엘리스는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암울하다.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한 쓸쓸한 진조의 여정은 너무나 고독하고 차가웠다.
따뜻한 한 줄기의 희망마저 패도의 길을 걷는 자에겐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페투니아가 그런 진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런데 바로 그때.
똑!똑!똑!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페투니아 님. 아비가일이옵니다.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
“…!!”
진혁과 천유성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기랄. 시간을 너무 끌었나?
아무리 그래도 이 넓은 성에 뒤질 곳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여기에 올 줄이야.
이 좁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간 정말로 빼도 박도 못한다.
새로운 갑주과 선녀 옷에 적응을 거의 마쳤다곤 하더라도.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으니까.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두 사람을 안심시킨 페투니아가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쉬고 계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성채에 침입자들이 나타나서 추격대가 편성된 상태입니다만, 혹시….”
“어머나. 설마, 이 안에 침입자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살짝 고개만 끄덕여 주십시오. 그럼 그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턱.
아비가일이 거대한 낫을 움켜쥐었다.
뒤에 있는 수많은 혈족들 역시 즉시 전투에 돌입할 자세를 취했다.
“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는 중이었어요. 마침 마음에 쏙 드는 책과 홍차를 찾았거든요.”
“알겠습니다.”
아비가일이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타악.
문이 닫혔다.
그로부터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진혁과 천유성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후우. 들키는 줄 알았네.”
“저 여자는 뭐 저리 감이 좋은 거냐?”
“낸들 알아?”
만약 페투니아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일이 험악하게 꼬일 뻔했다.
장모님의 사위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아! 침입자 이야기 말인데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저도 이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바보는 아니랍니다. 당신들이 아비가일 가주가 찾는 자들이라는 것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해주신 이유는 뭐죠?”
“대화를 조금 나눠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정말로 엘리스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요.”
“후훗. 봐요. 뭐든지 대답을 잘하더니 이번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잖아요.”
“그건….”
“자, 이만 가세요. 저에게 많은 걸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페투니아가 방의 뒤쪽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개방했다.
우우웅!
공간 너머로 엘리스의 알현실이 보였다.
“그 아이는 어둠에 갇혀 있어요.”
옥좌에 앉아 있는 엘리스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희로애락이 사라진.
그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전투 인형. 그게 이 세계의 엘리스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부디 구해주세요.”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미래가 아니라.
엘리스의 미래를 위해서.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엘리스가 없는 뱀파이어들은 층계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몰락하게 될 거예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단 하루라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하나의 절대자가 없어져서 모든 게 무너진다면..
그 세력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건 부담스럽긴 한데, 뭐. 장모님이 처음으로 한 부탁이니 어떻게든 들어드려야죠.”
“장모・・・ 님이라니. 설마 당신?”
페투니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혁이 통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대의 결단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나 역시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천유성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진혁과 천유성이 공간을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탓.
발이 지면에 닿는 것과 동시에 상대측에서도 두 사람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 방향은….”
엘리스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페투니아 님이 계시는 방에서 오다니.”
“그분께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네놈들!”
엑센시온과 아뮬람이 살기 가득한 마력을 방출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역시 의와 협을 아는 몸. 당연히 비전투원에게까지 손을 대진….”
“흠! 지금쯤이면 슬슬 위험하긴 할 거야.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서 생명을 빼앗도록 조치해놨거든.
천유성의 말을 끊고 진혁이 대신 대답했다.
“응? 그게 무슨….”
천유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진혁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페투니아라고 했지, 그 여자 이름이? 마치, 한 떨기 꽃잎 같더군. 뭐랄까. 꺾어버리는 맛이 있었어. 츄릅.”
진혁이 킬킬대며 타락한 성기사의 갑주에 마기를 끌어올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범죄자의 얼굴을 자아내는 거다.
누가 봐도 전과 10범 정도.
그것도 전부 강력범죄만 저지른 자의 오오라였다.
가주들과 혈족들의 표정이 경악과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혹시라도 페투니아 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전부 차가운 흙속에 뼈를 묻어야만 했으니까.
“엑센시온.”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평온하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진혁만은 알고 있었다.
저건 분노가 한계를 돌파했을 때에만 나오는 억양이라는 것을.
“신, 엑센시온, 위대한 가주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혈족들을 이끌고 어머니께 가라. 그리고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그곳을 지키도록 하거라.”
“하, 하지만 제가 자리를 비운다면….”
“짐은 분명.”
엘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쿠쿠쿠쿠쿠!
붉은 피보라가 일어나며 주위에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떠나라고 하였다.”
절대자만이 내릴 수 있는 명령.
거부한다는 건 곧 천재지변에 홀로 맞서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엑센시온이 즉시 알현실을 지키는 친위대 50명을 데리고 사라졌다.
“오. 전력 감소 성공.”
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아. 그것 때문에 극악무도한 인질범 흉내까지 낸 거였나. 긍지가 없는 승리에 의미 따위는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다니.”
뭐래는 거야, 이 멍청한 검성은.
지는 배신하고 다른 쪽에 붙은 주제에.
게다가.
“승산을 1%라도 올리려면 뭐라도 해야지.”
테러리스트랑 싸울 때도 긍지 타령하다가 폭사할 건가?
“재밌는 인간들이로구나. 그래. 짐의 모친을 가지고 협박을 해서 엑센시온을 전장에서 이탈시킬 생각이었단 거냐?”
“맞아. 그런 셈이지.”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건 전투에 있어 정론. 하지만,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착각이라고?”
“이곳에 있는 모든 가주들과 혈족들이 떠난다고 한들, 아니, 텅 빈 짐의 성채에 신화에 속한 군세가 몰려온다 한들…”
[엘리스가 고유 능력 ‘블러드 로드’를 발동합니다!]
쏴아아아………
붉은 꼬챙이들이 공간을 가득 채워나갔다.
기존에 알던 엘리스의 마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에 무슨 의미 따위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넘치는 피를 공급받고, 아타락시아의 정수를 전부 흡수한 신체.
막강한 세력들과의 층계 정복을 통해 쌓은 실전 경험.
그 모든 것이.
상정했던 전성기를 한참이나 넘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