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79화
879화.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1)
저릿저릿!
피부에 와 닿는 살벌한 기운.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이다.
“우리 세계의 엘리스가 그리워지려 하는군.”
천유성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벌써 보고 싶어지려고 한다. 야.”
가면 헌혈도 좀 해주고. 평소 좋아하던 음식도 만들어주고. 귀찮아하지 말고 열심히 놀아줘야겠다.
겸사겸사 어리광 부리는 것도 잔뜩 받아주고.
콰콰콰콰콰콰!
곧바로 꼬챙이들이 진혁과 천유성이 서 있던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타닷! 탓!
가벼운 몸놀림으로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내달렸다.
[천유성이 ‘매혹의 춤’을 발동합니다!]
나폴거리는 선녀옷으로부터 달짝지근한 향이 뿜어졌다.
“큭!”
아뮬람이 그 향을 맡더니 빠르게 코를 가렸다.
단순히 적을 매료시키는 걸 넘어서, 치명적인 독을 체내에 주입시키고 있었다.
“이 씹어 죽일 놈들. 혈옥에도 들어갔던 것이냐!”
이런 게 가능한 건 오직 혈옥 안에 잠들어 있는 저주받은 성물들 뿐.
가주급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니 일반 혈족들이 당해내긴 버거웠다. “물러서라!”
또 다른 가주가 개입했다.
[줄리아드가 고유 능력 ‘혈사(絲)’를 발동합니다!]
명문 줄리아드 가를 이끄는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 붉은 실을 뿜어냈다.
촤촤촤촤!
지면이 깍두기처럼 썰려나갔다.
기둥들 역시 뎅겅뎅겅 토막나며 좌우로 무너졌다.
“제, 젠장!”
천유성이 화들짝 놀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무희의 특성상 직접 전투는 벅찼기 때문.
이번 침식에서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서포터의 영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타이밍에는……,
“딜러 등장!”
서포터를 지켜주는 딜러가 나설 차례다. 진혁이 검게 타오르는 검을 휘둘렀다.
[마신의 총애가 깃듭니다.]
[신성력이 마기로 치환됩니다.]
반달 모양의 검은 오러가 대기를 갈랐다.
카아아앙!
앞쪽에 있는 혈사들이 잘려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뒤쪽의 촘촘한 벽에 가로막혔다.
과연 가주급은 가주급이다.
나름 마력을 실어넣은 건데 막히는 걸 보면.
놀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타락한 성기사의 갑주・・・까지 꺼낸 건가. 선녀의 옷도 굉장히 까다롭게 주인을 고르긴 한다만, 그 갑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까다로울 터인데.”
줄리아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대 주인이 없던 덕분이었어. 나도 이걸 선택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 갑주는 마신을 포함하여 326명의 마족과 악인들이 착용했던 흉물 중에 흉물이다.”
응?
326명이라고?
“그런 뻔한 거짓말로 날 흔들 생각이라면….”
“놀라운 인간이로군. 마왕들도 5분을 버티지 못하고 썩어버리는 갑주에게 인정을 받다니. 과연, 여태까지 상대해보지 못한 심연의 악 그 자체로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이 새끼가 누굴 맥이려고 작정을 했나.
왜 천유성은 그러려니 하는 건데?
가주 놈들은 변종이라도 보는 것처럼 세모눈을 뜨는 건 또 무슨 이유이고?
세상의 억까와 멸시를 한 몸에 받게 되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스킬 ‘흑십자’가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
검보라빛 십자가가 솟구쳐 올랐다.
“마신의 후계자가 결정된 거였나.”
줄리아드가 흠칫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줄리아드! 나도 가세하겠다!”
아뮬람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파파팟!
흡혈 박쥐들이 사방에서 진혁을 덮쳤다.
한 번 이빨을 박아넣으면 대상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흡혈하는 특수종이었다.
서걱! 서걱!
진혁이 가차 없이 박쥐들을 베어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아뮬람이 원하는 바였다.
“죽어라!”
‘혈’이 발동되면서, 사방에 흩뿌려진 박쥐들의 시체가 일제히 폭발했다.
퍼퍼퍼펑!
콰아앙!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일어나는 연쇄작용.
폭발하는 박쥐들의 숫자가 많을수록 위력이 늘어나는 특성 탓에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큭!”
진혁이 입에 고인 피를 내뱉었다.
이 녀석도 예전에 상대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하다.
엘리스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차곡차곡 성장한 덕분이겠지.
‘여기서 마력을 낭비하면 엘리스까지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
가주급들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줄리아드가 ‘인형의 집’을 발동합니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핏빛 실로 이루어진 원형의 구체가 나타났다.
“본래라면 군타페르나 루시퍼에게 쓸 생각이었다만, 그보다 더 악독하고 지저분한 놈이 튀어나온 이상 어쩔 수 없지.”
망할 가주놈이 또 극딜을 시전하네.
저 새끼는 반드시 죽이고 만다.
다른 놈은 몰라도 저놈만은 반드시 박살 낼 거다.
바로 그때.
“강진혁!”
천유성이 요염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나폴나폴거리면서.
하얀 천 사이로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들어난다.
젠장.
눈이 썩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가 3분간 각각 10%만큼씩 상승합니다!]
[마법 방어력이 3분간 20%만큼 상승합니다!]
전투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속도.
그게 무려 10%씩이나 올라갔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주력기가 마법 공격에 치중된 뱀파이어들을 상대로 마법 방어력은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터.
콰콰콰콰콰!
진혁이 갑주에서 만들어진 검은색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질주했다.
붉은 구체가 그대로 진혁을 향해 낙하했다.
[‘탐식의 눈’이 대상의 마력을 꿰뚫어 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당연히 구체로부터 멀어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
인형의 집은 중심부에 마력이 가장 적고, 주위로 퍼져나가는 파동형 광역기다.
천유성이 걸어준 버프를 믿고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진혁이 그대로 구체와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산산이 부서지는 파편을 뚫고.
“으아아아!”
진혁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목표는 오직 하나.
왕좌에 있는 엘리스다.
엘리스가 차가운 눈동자로 진혁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까딱했다.
[혈계권역 ‘붉은 밤의 사냥터’가 발동됩니다!]
파츠츠,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곧이어 셀 수 없이 많은 꼬챙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블러드 스피어즈보다 족히 5배는 더 거대한 크기의 꼬챙이들이다.
‘꿰뚫는다’라기보다는 ‘사지를 찢어놓는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상황.
투콰앙! 콰콰콰콰쾅!
마신의 투기를 이용해 펼친 장막이 그 참극에 맞섰다.
엄청난 충격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관통력이 +15%만큼 증가합니다!]
[피해량이+8%만큼 증가합니다!]
붉은 상태창이 연이어 점멸했다.
막아도 막는 게 아니다.
장막을 뚫고 전해지는 충격은 실시간으로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있었으니까
‘미친.’
수십 개를 얻어맞은 진혁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3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보냈다.
이걸 계속 맞았다간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엘리스. 네가 먼저 세게 나간 거다?”
진혁이 방패로 몸을 가린 채 검 끝에 타락한 기운을 응집시켰다.
압축되는 마신의 권능.
꾸드드득.
칠흑 같은 빛이 검신을 완전히 뒤덮었다.
[마신의 권능 – ‘탈마’가 발동됩니다!]
쩌억.
한 줄기 검광이 버뜩였다.
꼬챙이들을 모조리 자른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엘리스에게 도달했다.
그러나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실패했다.
카아앙!
검광이 엘리스의 오른팔에 닿기 직전 멈췄으니까.
“호오.”
엘리스의 표정에 제대로 된 변화가 일어났다.
성채에 침입해 자신의 어머니를 협박하던 벌레들인 줄 알았건만…
가주들과의 전투나 방금 보여준 일격은 단순히 벌레라고 치부할 수 없는 역량이었다.
다시 말해.
순혈의 여제가 드디어 두 사람을 제대로 된 적수로 인정한 것이다.
***
같은 시각.
진혁과 천유성이 떠난 시련의 탑에서도 이변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침식하는 모래’가 두 번째 권능 ‘이면 세계의 백화’를 개화하기 시작합니다.]
저 멀리 지평선을 따라 보이기 시작한 하얀색 꽃.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저 꽃의 정체를 아는 자들에겐 지옥에서 피어난 꽃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거 ᄌ된 것 같은데?”
트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니알라토텝이 변칙적이고 다재다능하다고 하더라도 저것까지 가능할 줄이야.
수많은 차원들이 경험했던 가장 끔찍한 ‘악몽’을 재현하는 능력.
저게 완전히 개화한다면 수백 개의 차원들을 멸망시킨 아포칼립스가 이 세계를 집어삼키게 되어 있었다.
“시스템 조작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니.”
“두 번째 권능은 아자토스가 아니라면 사용이 불가능한 거 아니었나요?”
니알라토텝의 가장 무서운 점은 상대의 능력을 학습하고 분석해 파훼법을 찾아낸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운영자들의 능력을 직접 겪으면서 새로운 수단을 찾아낸 게 틀림없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침식이 진행되지 않으면 저 꽃은 완전히 개화할 수 없을 테니까요.”
“부디 두 사람이 첫 번째 침식을 막아줘야 할 텐데요.”
릭과 수리부엉이가 한마디씩 내뱉었다.
“우선은 저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개화 속도를 늦춰봐요.’
테레사가 완전 무장을 한 채 다가왔다.
지금 보유한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다.
각 층계에 존재하는 강자들은 평화 속에서도 각자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왔으니까.
바로 그때.
“키에에에!”
전신이 하얗게 물든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가 달려들었다.
크기는 약 2m.
낫 형태의 두 팔이 허공을 갈랐다.
카아앙!
테레사가 마검을 휘둘러 그 공격을 막아냈다.
“……!?”
휘청하고 꺾이는 무릎.
가볍게 튕겨낼 생각이었는데, 예상외로 무게가 심상치 않다.
“키에에에에!!!!!”
몬스터의 입에서 하얀색 얼음 결정들이 맺혔다.
[‘화이트 팬텀’이 Lv130 ‘프로즌 블래스터’를 발동합니다!]
콰콰콰콰콰콰
한 줄기 얼음 폭풍이 테레사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어디서 왔는진 몰라도…”
한 쌍의 날개를 펼친 테레사가 검에 서로 다른 두 개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파츠츠.
눈부신 신성과 어두운 마기가 하나로 뒤섞인다.
[신마일체. ‘성마일섬’이 발동됩니다!]
서걱!
화이트 팬텀의 머리가 그대로 사라졌다.
습격이 가해진 건 테레사만이 아니었다.
“크르르.”
“케에에!”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몬스터들.
트수가 두 자루의 대검을 든 채 혀를 찼다.
“무슨 동네북도 아니고, 운영자들 알기를 아주 개똥으로 아네.”
“조심해라. 차원 ‘뱅사르’를 멸망시킨 놈들이다.”
수리부엉이와 다른 운영자들 역시 서서히 몰려오는 적들을 보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개별 개체도 상당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놈들이 진짜 무서운 건 여왕의 통솔을 받는 군단이라는 점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생체 병기.
행성 하나를 일주일 만에 먹어 치우는 게 바로 이 화이트 팬텀들이었다.
“저기, 하뮨애리 차원의 포식자도 있어요.”
쿠웅! 쿠웅!
구름에 닿을 듯 거대한 크기.
직경이 10m가 넘는 불덩이들을 던져대는 대형종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오오오!”
“그라라라!”
그 외에도 각종 차원에서 악명을 떨쳤던 몬스터들이 차원의 벽을 뚫고 하나둘 넘어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