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85화
885화. 백설 여자 고등학교 (1)
공허룡 ‘에테리온’
너무나 강했기에 두려움이 되었던 존재.
고구마라는 자아를 따로 떼어내기 전까진… 에테리온은 그 존재 자체가 언약을 상징했다.
그런데.
그 완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모기.”
고구마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나머지 멤버들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쿠쿠쿠쿠!
저 멀리서 요동치는 하얀 폭풍이 보였다.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에 침입자가 들어온 것을 감지한 에테리온이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
“대장. 어떡해?”
운디네가 정령수들을 대표해 물었다.
싸울 것이냐. 아니면 일단 물러나 기회를 볼 것이냐.
그것부터 결정을 해야 했다.
“후후.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고귀한 이 몸이 화려한 언변을 통해 놈을 설득해볼 테니까. 아무렴, 놈도 대장과 함께 있는 우리를 적대시하겠느냐?”
“하긴. 그래도 같은 몸이었으니까. 아무리 차원이 달라졌다고 해도 바로 공격하진 않을 거야.”
“미요오!”
충분히 합리적인 가정이다.
분명 그럴듯하긴 한데…….
문제는.
“크오오오!”
[에테리온이 ‘표적 지정’을 발동합니다!]
저 거대한 공허룡에게 있어 설득이나 타협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
배신당하고 경외시 여겨지며 그저 축출당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따뜻함마저도 메말라버린 내면,
모조리 죽인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그것이 에테리온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그림자가 대지 위를 가렸다.
날개가 폭풍을 만들며 공허의 시작을 고했다.
온다.
콰콰콰콰콰콰!
공허의 빛이 수십 조각으로 쪼개져서 낙하했다.
마치, 유성우처럼.
하나하나가 네임드 드래곤의 브레스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말랑흑두루미가 ‘기상개변’을 발동합니다!]
[후라이드가 ‘염화의 장막’을 발동합니다!]
사신수가 기상을 다뤘고, 고대종이 불타는 깃털을 펼쳤다.
이어진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었다.
콰아아앙!
이명이 고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다.
계곡이 말라붙고 숲이 그 열풍을 견디지 못하고 불타버렸다.
“아악!”
“뜨, 뜨거워!”
정령수들이 몸에 붙은 불꽃을 털어내며 흙 위로 나뒹굴었다.
말랑흑두루미 역시 전신이 온통 숯덩이로 변했다.
너무나 압도적인 격의 차이.
가벼운 공격만으로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상대가 가능한 건 후라이드뿐이었다.
같은 고대종인 데다 불을 다루는 특성 덕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모기이…!”
고구마가 고통스러워하는 수하들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것도 잠시.
[성명절기 ‘단죄의 검’이 발동됩니다!]
고구마의 뒤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검이 나타났다.
수많은 적들에게 절망을 안겼던 시그니처 공격.
하지만.
[에테리온이 성명절기 ‘단죄의 검역’을 발동합니다!]
에테리온이 뽑아낸 검은 하나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색의 불꽃에 휩싸인 7개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화장실에서 울려 퍼지는 스산한 소리.
빨간 휴지를 고르면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죽고, 반대로 파란 휴지를 고르면 온몸에 피가 빠져 창백하게 죽는다는 설정이다.
‘한국식이었으면 파란 휴지를 고를 경우 살 수 있었지만’
일본식에서는 어떤 걸 골라도 죽는다.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공략하는 수밖에.
진혁이 교직원 전용 화장실에 있는 비데를 설치했다.
딸깍!
온풍, 건조 기능까지 달려 있는 최신식으로,
“…응?”
귀신의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휴지를 사용하냐.”
귀신도 트렌드에 맞게 진화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다.
이러니 경력 있는 신입만 뽑는 거지.
“비데라니이이!!”
화장실 귀신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사라졌다.
[화장실 괴담이 영향력을 상실합니다!]
[백설 여자 고등학교의 일부가 정화됩니다!]
상태창과 함께 안전 구역이 설정되었다.
이걸로 일단 초입 부근의 거점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다들 잘하고 있으려나?”
진혁이 창밖을 내다봤다.
한쪽에서는 음영극살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월영과
악귀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테레사가 있었다.
이야. 저 잼민이 악귀들은 부속 유치원에서 아주 악명이 높기로 유명한 놈들인데, 한을 풀고 승천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내가 저기서 20번 넘게 죽었지?’
나중에는 서로 악밖에 남지 않아서 공략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진혁의 시선이 운동장 너머 반대편으로 향했다.
프레이는 불멸의 인형사를 사용해 혼자서 경찰과 도둑 역할을 전부 커버하고 있었고.
안드리아의 해골로 하는 피구 솜씨 역시 좀비 여고생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역시.
이 멤버들을 고르길 잘했다.
만약 천유성을 데리고 왔다간 100년이 걸려도 클리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계약자.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것이냐? 이런 시시한 놀이나 할 생각이었다면 짐은 굳이 올 필요도 없었겠구나.”
화장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리스가 물었다.
잔뜩 거만하고 귀찮다는 말투로 말하고 있긴 한데.
진혁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귀신 들린 학교에 온 엘리스가 매우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바들바들.
빨간 동공이 갈 곳을 잃고 연신 흔들렸고, 양손을 꼭 맞잡은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넌 명색이 진조라는 애가 대체 귀신은 왜 이렇게 무서워하냐?”
“누, 누가 무섭다고 했다는 것이냐!”
“헉! 저기 눈알 한 개 달린 할머니가!”
“꺄아아아!”
엘리스가 질색을 하며 진혁의 뒤로 숨었다.
‘교복을 입고 이러니까 되게 색다르긴 하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엘리스와 함께 학교생활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투닥거리면서 급식 반찬을 훔쳐먹거나 같이 수학여행 같은 걸 갔으면 꽤나 즐거웠을 것 같다.
‘항상 돈에 쪼들린 데다 방구석에서 방송만 하느라 제대로 된 추억도 남기지 못했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다행이다.
지금은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가 곁에 있어서.
좋은 일도. 그리고 나쁜 일도.
함께 이겨나가며 미래를 그려 나갈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몸 안에 있는 피를 전부 빨아버릴 거야.”
“알았어.알았어. 업어줄 테니까 그만해.”
“흥! 딱 한 번만 봐주는 것이니라.”
진혁의 등에 엎인 엘리스가 연신 다리를 파닥였다.
그렇게 향한 곳은 지하 1층에 위치한 ‘과학실’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제외하고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
트라이 횟수 83번 중에 마지막 페이즈까지 간 게 2번밖에 안 됐다.
또옥.또옥.
과학실에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진혁과 엘리스가 조심스레 내부로 진입했다.
원래 같으면 스프링클러에서 염산이 뿜어지고 3종류의 몬스터들이 나타나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시작이 좋아’
과학실은 밖에 있는 괴담의 공략도에 따라서 다른 난이도를 가진다.
남아 있는 괴담의 숫자가 많을수록 까다로워지고, 반대로 학교의 괴담이 사라지는 구역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쉬워지게 된다는 뜻. 모두가 노력해준 덕분에 골치 아픈 부분들을 상당수 생략할 수 있게 되었다.
“비, 비커에 저 빨간 거. 설마 피는 아니겠지?
뭐라는 거야 얘는.
주식이 피면서 피를 보고 놀라면 어쩌자는 거냐.
바로 그때.
[네임드 몬스터 ‘어느 과학자들의 해골이 깨어납니다!]
한쪽에 매달려 있는 해골의 안광에 불이 들어왔다.
그래.
아무리 괴담을 많이 클리어해도 이 녀석이 깨어나는 건 피할 수가 없나 보네.
진혁이 여명의 검과 황혼의 총을 꺼냈다.
***
쿠쿠쿠쿠!
과학실 한가운데서 깨어난 네임드 몬스터.
“계약자. 뭐냐, 이 웃기지도 않은 놈은?”
엘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사실, 어느 과학자들의 해골은 겉으로 보기엔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다.
고작해야 조금 큰 해골.
언데드 몬스터 한 마리는 위협이라는 수준에도 들지 못했다.
“방심하지 마. 생소한 능력을 사용하니까.”
이 녀석이 까다로운 건 굉장히 이질적인 능력을 쓰기 때문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
우우웅!
해골의 주위로 검은 구체가 나타났다.
[‘사과를 좋아하는 위인’이 ‘만류인력’을 발동합니다!]
엄청난 인력이 발생하며 구체를 향해 몸이 끌려갔다.
“……!?”
“……!!”
진혁과 엘리스가 즉시 무게중심을 낮췄다.
백설 여자 고등학교 내에 있는 동안은 특수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실에 있는 각종 아이템들이 ‘괴담’의 이야기를 이행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파파팟!
빨간색 분필들이 붉은 궤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절대 입 주위에 닿으면 안 된다.
만약 붉은칠이 칠해진다면 입이 길게 찢어지게 되는 ‘절대판정’ 효과가 발동되었으니까.
카가가강!
진혁이 단검을 휘두르며 분필들을 반으로 쪼갰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 바보 해골바가지가!”
교복을 입은 마법 소녀가 영창을 외우듯.
엘리스가 화려한 룬어가 새겨진 꼬챙이를 소환했다.
파아앙!
추진체 따위는 필요 없다.
폭풍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으니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길냥이를 좋아하는 위인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발동합니다!]
엘리스가 날린 창이 알 수 없는 상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원래는 ‘열어 보기 전까지’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고실험. 허나, 이 괴담에서는 상자를 통과한 모든 능력을 절반으로 감소시켜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콰아앙!
엘리스의 꼬챙이가 과학실 찬장에 박혔다.
달그락.
해골의 손에 새로운 아이템이 나타났다.
물리학 서적이다.
“이상한 마도서를 꺼냈다. 주술이나 마법를 쓰려는 건가? 아니면 소환계 쪽?”
“아니, 말그대로 ‘물리’공격용 아이템이야.”
충분히 두꺼운 전공서는 흉기와 다를 바 없다.
…라는 의도를 정말이지 충실하게 적용한 고유무기였다.
e=mc스퀘어.
혀를 내밀고 있는 과학자의 얼굴이 새겨진 책이 엘리스의 안면을 향했다.
‘블러드 실드’가 즉시 펼쳐졌다.
투콰아앙!
전공서가 실드를 뚫진 못했지만, 실드 주위에 거미줄처럼 금이 갈라졌다.
‘역시 그냥 전투로는 안 되는 건가.’
하지만, 파훼법은 알고 있다.
혼자서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테지만, 다행히 지금은 과거와 상황이 달랐다.
진혁이 전공서 위로 떠오른 식을 살폈다.
선형대수와 추상대수를 응용한 문제가 적혀 있는 게 보인다.
뭔 소린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관없다.
이미 천유성에게 각 문제들을 미리 풀게 한 뒤, 정답을 모조리 외워뒀었으니까.
‘염혼의 낙인’이 발동되며 허공에 정답을 적었다.
그러자.
[위대한 위인들의 능력에 공백이 발생합니다!]
성가신 ‘만류인력’과 각종 실드가 사라졌다.
지금이다.
쩌저적!
공간이 갈라지며 ‘원 아이 문’이 발동되었다.
그로스의 눈동자가 대상을 관조했다.
동시에.
콰콰콰콰콰콰
형언할 수 없는 빛줄기가 과학실을 가로질렀다.
제아무리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도 능력이 사라진 사이에 이걸 정통으로 맞는다면…
절대 무사할 수 없다.
그래.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게 맞는 이야기지만.
변수가 끼어든다면 예외가 발생하는 법이다.
치이이익!
검보라빛 구체가 그로스의 능력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냥 지켜만 보다간 이번에도 실패할 뻔했네.”
북유럽 신화의 주신 중 하나인 ‘로키’.
놈이 가지고 온 건 아자토스의 또 다른 고유무장인 ‘부유하는 흑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