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10화 : 학관 풍운(2)
학관 풍운(2)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왜, 다음번에는 무관 형들이라도 데리고 오게?”
설우진은 초무석의 생각이 눈에 빤히 보였다.
어린애들 생각이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졌으면 그냥 쥐 죽은 듯이 있어. 맘 같아선 그동안 당했던 거 몰아서 갚아 주고 싶지만, 개 관이 코앞이니 참는 거야.”
“……”
“아, 그리고 애들은 내가 데려갈게. 숙제는 스스로 해야지.”
설우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필사하던 아이들을 데리고 유유히 천화각을 벗어났다.
“무석아, 괜찮아?”
설우진이 떠나고 난 뒤, 한 발짝 물러서 눈치 만 보고 있던 고병용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초무석은 고병용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 으켜 세울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고병용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갚아줘야지, 오늘의 이 수모.”
“설마 무관 형들을 진짜 부를 거야? 그럼 일이 너무 커질 텐데………….”
“걱정 마, 겨우 이 정도로 형들을 부를 만큼 나약해빠지진 않았으니까.”
“그럼 달리 방법이 있어?”
“있지, 사고를 빙자해서 녀석을 뭉개 버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초무석의 두 눈이 스산한 악의를 머금었다.
천화각을 나선 뒤, 설우진은 애들을 데리고 오미객잔을 찾았다.
오미객잔은 인근에서 가장 맛이 좋기로 이름 난 식당이었다. 맛이 좋은 만큼 당연히 가격도 상당히 비쌌다.
“우, 우진아, 정말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아이들의 시선이 식탁에 푸짐하게 차려진 요 리들을 향했다. 동파육부터 어룡식미 그리고 팔보선에 이르기까지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음 식들이 대부분이었다.
“너희들한테 돈 내라는 소리 안 할 테니까 마 음껏 먹어. 실은 외가에서 용돈을 꽤 두둑이 받았거든.”
“그래도 여기 꽤 비쌀 텐데………….”
근심 많은 애어른 마도요가 걱정스러운 표정 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도요야, 돈 걱정은 나한테 맡겨 두고 일단 먹 어.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식으면 맛없어.”
설우진이 젓가락으로 동파육 한 점을 집어 마도요의 입에 밀어 넣었다.
혀끝에 감겨 오는 동파육의 풍미.
마도요는 허겁지겁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후, 요리는 게 눈 감추듯 빠르게 사라졌다.
‘자식들, 한창 자랄 때라 그런지 먹성 좋네. 그 래, 밤새 일하려면 힘들 테니 배불리 먹어둬라 :
설우진은 맛있게 요리를 먹는 아이들을 보면 서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아, 배부르다. 이렇게 배 터지게 먹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몰라.”
“나도, 지난 명절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
“우진아, 덕분에 잘 먹었어. 다음엔 우리 집으 로 한번 초대할게.”
오미객잔을 나서는 길.
마도요를 비롯한 아이들이 저마다 설우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에 이어진 설우진의 말 때문이었다.
“얘들아, 이제 배도 두둑이 채웠으니 하던 일, 마저 해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 천화각에서 무석이랑 내가 나눈 얘기 못 들었어? 외가에 다녀오느라 숙제를 못 했다 고 했잖아.”
“그건 아는데.”
“내 사정 좀 봐주라. 너희들 먹이느라고 전낭도 이렇게 텅텅 비었어.”
설우진이 아이들 앞에서 전낭을 까집어 보였다.
날리는 건 먼지뿐.
돈은 철전 일 문도 보이지 않았다.
음식값을 앞세운 협박 아닌 협박에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설우진의 뒤를 따라나섰다.
청운학관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아이들은 저마다 두툼한 필사본을 품에 안고, 학관 문턱을 넘었다.
“참, 오랜만이네.”
설우진은 학관 정경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깊 은 감상에 젖었다. 수업이 이뤄지는 백문관부 터 아이들이 체력 함양을 위해 뛰어노는 연무장까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우진아.”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학 숙제를 완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마도요였다.
“숨이 거치네. 내 말대로 뛰기 시작한 거야?”
“으응,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는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
“그래도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진 마. 체력이 란 건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거든. 차분 히 운동하는 시간과 강도를 끌어올려.”
설우진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충 고를 건넸다.
그는 마도요의 모습에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 을 투영했다. 곱상한 외모에 허약한 몸뚱이 그리고 대범하지 못한 성격까지.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
세상에 맞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두 사람은 함께 입학식이 열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수백 명의 관도들이 오와열을 맞춰 서 있었다.
“우린 저쪽이네.”
마도요가 선두의 깃발을 보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설우진은 조용히 그 뒤를 따르며 사위를 찬찬 히 둘러봤다. 그리고 하나의 시선과 마주했다. 매서운 눈초리를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초무석이었다.
‘아이구, 이거 눈빛만으로 사람 잡아먹을 기세네.’
설우진이 씩 하고 웃었다.
어차피 그 한 번으로 초무석이 조용히 지내리 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나이가 어리긴 해도 학관이라는 공간에서 이 년 동안 권력을 누렸 던 초무석이다. 그 달콤함 때문에라도 쉽게 고 개를 숙이지는 못할 터였다.
‘그래, 뭐가 됐든 한 번 더 덤벼 봐라. 이번엔 낭인의 철칙대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 저히 짓밟아 주마.’
설우진의 눈가에 잠깐이지만 섬뜩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초무석은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루한 입학식이 끝나고.
새롭게 반을 배정받은 아이들이 백문관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설우진과 마도요도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이 속해 있는 삼 년 차 청월반은 백문관 이 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일 년간 교육을 책임질 학 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 입은 붉은색 학창의가 눈에 확 들어왔다.
관도들이 하나둘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마, 망했다.’
‘왜 삼 년 차에 적포사신이 오냐고.’
‘앞으로 일 년 동안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 해야겠네.’
관도들을 공포에 젖어 들게 만든 붉은 학창의 의 주인은 적운선생이었다. 나이는 청운 학관 에 속해 있는 스무 명의 학사들 중 가장 젊은 축 에 속했지만 그 학식은 관주에 버금갈 정도로 드높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화끈한 교육 방식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체벌을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 기름을 먹여 만든 몽둥이에 사애師愛 라는 이름까지 새겨 넣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화끈하게 몽둥이로 훈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