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14화 : 전생 인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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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1권 – 14화 : 전생 인연(2)


전생 인연(2)

‘최대한 자연스럽게.’

설우진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앞으로 몸을 날 렸다. 간발의 차이로 그의 양손에 술동이가 들 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설우진은 술을 흠뻑 뒤집어써야 했다.

“괘, 괜찮으세요?”

소녀가 술 범벅이 된 설우진에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의외로 예뻤다.

멀리서 처음 봤을 땐 너무 평범한 얼굴이지 않나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느낌이 전해졌다. 청순함과 귀여움 그리 고 농염함까지.

“술 좀 뒤집어쓴 것뿐이니까 걱정 마. 근데 어 떤 무식한 인간이 너한테 술심부름을 시킨거야?”

“저희 아버지……”

“못된 양반이네. 술동이는 내가 집까지 대신 들어다 줄 테니까, 앞장서.”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가다가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 어차피 할 일 없이 돌아다니던 중이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내가 덩치가 커서 그렇지 나이는 네 또래야. 편하게 말 놔.”

설우진은 학관의 친구들을 대할 때와 달리 소 녀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댔다. 뚜렷한 목적을 지닌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 는 순진한 소녀는 자신의 이름까지 먼저 소개하며 그 불순한 호의를 좋게 받아들였다.

“내 이름은 주가려야. 나이는 올해로 열셋.”

“난 설우진. 나이는 너와 같아.”

“이렇게 신세를 져도 되는지 모르겠어. 여기 서 우리 집은 꽤 먼데………….”

“걱정 마. 보다시피 다른 건 몰라도 힘 하나는 자신 있거든.”

설우진은 한 손으로 술동이를 들어 올리며 한 껏 힘을 과시했다. 주가려가 놀란 토끼 눈을 하 고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귀엽네.’

설우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어린애라고 생각을 하면 서도 이상하게 끌렸다.

이후,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시전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시전 너머에 한 채의 장원이 보였다.

그리고 정문 대들보에는 유려한 필체로 주호장이라 쓰인 문패가 내걸려 있었다.

‘주호장? 왠지 낯설지가 않은데.’

설우진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인데, 이상하 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 술동이 가져오느라 힘들었지? 잠 시만 기다려. 시원한 수정과 가져다줄게.” 

장원 앞에 서자 주가려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 가려 했다. 설우진은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 어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수정과는 됐고, 이거면 충분해.”

설우진이 양손에 쥐고 있던 술동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점 망설임도 없이 입안으 로 쏟아부었다.

벌컥벌컥.

술 넘어가는 소리가 참 맛나게도 들렸다.

“캬아, 좋다.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백화주인지.”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는 백화주의 열기에 설 우진은 한껏 들떴다. 어린 시절로 돌아온 후, 그는 제대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집에 술 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방에 그를 주시하는 눈길이 있어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괜찮아?”

주가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백화주가 얼마나 독한 술인지 그녀도 몇 번의 시음(?)을 통해 경험한 바 있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한창 잘나갈 때는 중원에서 가장 독하다는 심혼주도 단번에 비웠던 몸 “이야.”

“허, 고놈 참 당돌하구만. 남의 술을 훔쳐 마 신 것도 모자라 돼도 않는 허풍까지 쳐? 가려야 , 저 물건 어디서 주워 왔냐?”

어느 틈에 나타났을까.

주가려의 옆자리에 이목구비가 매혹적인 미 남자가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미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설우진 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뜻하지 않은 곳 에서 전생의 인연과 조우한 것이다.

‘하아, 어쩐지 주호장이란 이름이 익숙하다 싶었어. 광주신협 주천기, 설마 그가 이곳에 살 고 있었을 줄이야.’

광주신협 주천기.

별호에서 느껴지듯 그는 하루라도 술을 마시 지 않으면 입에서 가시가 돋친다는 소문난 주 당이었다.

특히, 술만 마시면 맘에도 없는 협객 행세를 해대서 뜻하지 않은 은원을 만들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우진과 깊은 관계가 있는 한 인물과 친분이 무척 두터웠다. 그 인물은 바 로 설우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원흉 이자 스승인, 야도 팽천호였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저 친구가 바닥에 떨어질 뻔한 술동이를 구해 줬어요.”

“호오, 그래? 그럼 감사의 표시를 해야지. 어 이, 어린 친구! 바쁘지 않으면 들어가서 한 잔 더 하지. 술이란 건 모름지기 대작을 해야 제맛 이거든.”

주천기가 술자리에 설우진을 초대했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행동이었지만 설우 진보다 어린 나이에 술을 접했던 그는 전혀 개 의치 않았다.

주천기를 따라 들어간 주호장은 일단 넓게 펼 쳐진 앞마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장원에 비해 유난히 마당의 크기가 컸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듯 마당 한구석에 갖가지 병장기들이 세워져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도검, 창은 물론이고 군부에서나 사용 한다는 극과 겸도 심심찮게 보였다.

“병장기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후후, 그걸 말이라고. 저 날카롭게 날이 선 병기들을 보게.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아, 네………….”

설우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그 반응이 마음이 들지 않았는지 주천 기가 갑자기 병기대로 향하더니 쌍겸을 하나 집어 들었다.

“어린 친구가 아직 이 녀석들의 매력을 못 느 낀 모양인데,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겠네.” 

쌍겸을 들고 마당 한가운데 선 주천기.

그가 의미심장한 눈짓으로 설우진과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후, 쌍겸이 사납게 허공을 갈랐다.

찌르고 휘두르고 베고.

단순한 동작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무료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설우 진의 눈동자가 언제부턴가 격렬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저 양반, 가상의 적을 두고 철저하게 요혈을 노리고 있어. 화려하진 않아도 실전에선 꽤 큰 힘 을 발휘할 거야.’

설우진은 어느새 전문가의 눈으로 주천기의 병기술을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일평생 한 자루의 도만을 사용했지만 눈 으로 만나 온 병장기의 숫자는 그 수를 헤아리 기 힘들 만큼 많았다. 덕분에 식견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시연이 끝나고.

설우진은 진심 어린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이에 주천기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하하하, 어린 친구가 보는 눈이 있군. 혹시라 도 이쪽 계통으로 진로를 정하게 된다면 나를 찾아오게. 내 성심성의껏 가르쳐 줌세, 것도 공 짜로.”

‘가만, 이 양반한테 병기술을 배우면 내가 좋 아하는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잖아. 그럼 당연 히 거절하면 안 되지.’

“정말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어린 친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좋아요, 그럼 이틀에 한 번씩 오시 무렵에 이쪽으로 올게요.”

설우진은 술을 위해 주천기의 제자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 동기가 참으로 어이없었지만.

그로 인해 비동에 이은 또 다른 운명의 뒤틀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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