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20화 : 나찰요귀 (3)
나찰요귀 (3)
조인창의 입에서 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자식이 왜?”
“내 여동생을 괴물이라고 부른 것 으로도 모자라 대놓고 희롱을 하려 했어. 내가 막으려고 녀석한테 덤벼 들었는데….”
“네가 맞는 걸 보고 열 받아서 폭주했다?”
설우진은 그제야 일련의 상황들이 이해가 됐다.
“그나저나 뒷수습은 어떻게 할 거야? 한 놈도 아니고 꽤 여러 놈이 시체가 돼 버렸는데.”
“지금으로선 조용히 떠나는 것 말고는・・・・・….”
“인마, 도망친다고 해결이 될 것 같아? 황보궁은 황보세가의 직계 혈 족이야. 놈이 네 여동생의 일을 떠 버리고 다니면 너희 둘은 평생 쫓겨 다녀야 돼.”
“그럼……?”
“너희 집안의 특기를 살려.”
“설마, 실혼명을?”
“안 될 것 없잖아. 먼저 시비를 걸 어온 건 황보궁이야. 일을 벌인 놈 한테 책임을 묻겠다는데 문제 될 게 없잖아.”
설우진이 확실한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조인창은 한참을 망설이는 듯하더 니 이내 그 방법에 따르기로 결정했 다.
“너희들 그 얘기 들었어? 글쎄, 황 보궁이 제 패거리들을 불태워 죽였 대.”
“에이, 설마, 그 자식이 아무리 성 격이 개차반 같아도 그건 좀 너무 앞서갔다.”
“야,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니 까. 황보궁이 직접 학사님을 찾아가 서 하는 얘길 들었어.”
“그럼, 진짜란 말이야? 대체 왜?
평소에 잘만 어울려 다녔었잖아.”
“나도 그게 의문이라니까.”
믿기 힘든 소문이 학관 전체에 빠 르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다들 헛소문이라 여겼다. 그대로 받아들 이기엔 그 내용이 너무나 터무니없 었기 때문이다.
한데,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황보궁 이 실제 제적 처리를 당하면서 분위 기가 반전됐다.
“실혼명을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
“사술에 능한 이가 있다면 모를까, 아마 어려울 거야.”
“그럼 됐어. 놈에 대한 건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 곧 승급 전을 치러야 하는데 그 정신 상태로 시험이나 제대로 치를 수 있겠어?”
설우진이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지난밤, 조인창은 팔 성에 이르는 실혼명을 활용해 황보궁에게 암시를 걸었다. 황보궁의 기억 속에는 친구 들과의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어 그 만 그들을 죽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내용이 강제로 심어졌다.
물론 그 기억을 뒷받침하기 위해 황보궁의 옷에 친구들의 피를 묻히 는 등의 사전 작업도 잊지 않았다.
“괜찮을까? 그 녀석.”
“지은 죄를 보자면 목이 잘려도 이상할 게 없겠지만, 황보세가라는 든 든한 뒷배를 가지고 있으니 아마도 몇 년 폐관수련하는 정도로 그칠 거 야.”
“다행이다.”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착한 척도 정도껏 해. 내가 만약 네 상황이었 다면 그 자식 절대 살려서 보내지 않았어.”
설우진은 술을 거칠게 들이쉬며 황 보궁에 대한 여물지 않은 분노의 감 정을 드러냈다.
그는 조예진을 보면서 단예를 떠올 렸다.
같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녀 는 자신에게 친동생 그 이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을 못 본 지도 꽤 오래됐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정말 혼자서 괜찮겠니?”
“어머니, 걱정 마세요. 천중 상단의 호병분들하고 함께 가는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환하게 미소 짓는 단예의 양쪽 얼 굴에 보조개가 깊이 패여 들어갔 다.
불과 일 년 사이에 그녀는 소녀의 티를 벗고, 숙녀로서의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분을 바른 듯 흰 피부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고, 고른 치열은 미소를 머금을 때마다 상큼함을 더했다.
그녀는 설우진이 학관에 가 있는 동안 그가 빠진 공백을 완벽하게 메 웠다.
그녀의 자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옷을 한 벌 지어 낼 때마다 그 성 장세가 눈에 확 들어올 정도였다.
“천중 상단의 호병분들은 믿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걸 가져가거 라.”
여소교가 전낭을 하나 내밀었다.
“따로 금전을 좀 챙겨 넣었다. 만 에 하나라도 도적들이 몸값을 요구 하면 이걸 내주거라.”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흉험하단다. 그걸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챙겨 두어라.”
여소교의 강권에 단예는 어쩔 수 없이 품 안에 전낭을 챙겨 넣었다. 정오 무렵 단예는 천중 상단의 상 행에 합류했다. 이번 상행의 목적지 는 서안이었다.
스무 명의 호병이 열 대의 수레를 호위하고 서른 남짓한 일꾼이 그 뒤 를 쫓았다. 그리고 선두에는 단예를 태운 사두마차가 힘차게 내달렸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광룡가의 본 거지.
커다란 대청 안에 턱수염을 수북하 게 기른 중년 사내와 그보다 서너 살 정도 적어 보이는 거한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광룡가의 가주인 고대기 와 부가주인 관해철이었다.
“가주님, 정말 고 계집 하나만 납 치하면 저희 수중에 금전 오백 냥이 떨어지는 겁니까?”
“그래. 단, 그쪽에서 흔적을 남겨서 는 안 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럼 그 계집만 남겨 두고 모두 죽이면 되는 겁니까?”
관해철의 물음에 고대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그거 잘됐군요. 가뜩이나 복수할 그날만을 꿈꾸고 있었는데.”
관해철의 두 눈에 살의가 번졌다. 그는 반년 전, 설우진에 의해 관가 에 넘겨졌다. 다행히 가주인 고대기 가 인맥을 써서 한 달 만에 풀려나 기는 했지만 그때 겪었던 고초는 아 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광룡대 애들을 데려가겠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그만큼 남는 흔적도 많아질 테니 소수 정예가 낫습니 다.”
“좋다. 대신,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천중 상단이 작 정하고 덤벼들면 우리 광룡가에 승 산은 없다.”
“염려 마십시오. 깔끔하게 뒤처리 하고 돌아올 테니.”
잠시 후, 관해철이 스무 명 남짓한 부하들을 데리고 광룡가를 빠져나갔다.
“이거 영 불안하군. 녹림 놈들이 과연 시키는 대로 잘하겠는가?”
화려하게 꾸며진 대청 안.
옹이눈을 한 중년 사내 오백춘이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탁자를 손끝 으로 두들겼다. 이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굵직한 눈매의 중년 사내 성도 진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쯧쯧, 그놈의 새가슴 하고는. 광룡 가는 녹림 안에서도 수위에 드는 세 력일세.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어린 계집 하나 납치하는 게 무에 어렵겠 는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백춘이,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 네. 지금은 후환을 걱정하기 보다는 그 계집아이를 어찌 써먹을지 고민 하는 게 우선일세.”
두 사람은 일품점이 등장해 전국적 으로 인기를 끌기 전까지 고관대작 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벽라점의 수 석 장인들이었다.
벽라점은 돈 많은 부자들을 상대로 고급스러운 옷들을 지어 냈다. 한 벌 짓는 데 최소 금전 열 냥이 넘 게 들어갔지만 벽라점을 찾는 손님들은 한 점의 주저함도 없이 값을 치렀다. 덕분에 수석 장인인 그들은 매일같이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한데 일품점이 등장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많은 단골들이 매정하게 돌아섰다. 더 좋은 품질에 가격까지 저렴한데 누가 벽라점을 이용하려 하겠는가. 그들 입장에선 억울할지 몰라도 당 연한 시장 논리였다.
이후, 벽라점은 부랴부랴 가격을 낮추는 등의 대응책을 펼쳤다. 하지 만 가격만 가지고는 마음이 떠난 손 님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장고 끝에 악수를 뒀다.
간 크게도 일품점의 기술자를 납치하기로 공모한 것이다.
“힘들진 않느냐?”
“헤헤, 마차 타고 편하게 움직이는 데 힘들 게 뭐가 있겠어요. 힘든 걸 로 따지면 바깥에서 뙤약볕을 쬐면 서 걷고 있을 일꾼분들이 더하죠.”
“허허, 소문대로 마음씨가 참 곱구 나.”
이번 상행을 책임지고 있는 양택호 는 단예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데, 그 미소는 요란하게 날뛰는 말 때문에 빠르게 사라졌다.
“무슨 일이냐?”
양택호가 다급히 마차 문을 열어 상황을 살폈다.
마차를 끌던 네 마리의 말 중 하 나가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녀석의 왼쪽 눈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마부가 진정시켜 보려 애를 썼지만 뒤이어 날아든 화살에 결국 쓰러지 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요?”
단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에 양택호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마차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저 어린 계집만 빼고 모두 숨통을 끊어라.”
수풀 너머에서 관해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양택호의 품에 안겨 있는 단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이내 앞으로 내달렸다.
그가 노리는 사냥감은 양택호였다. 양택호는 굳은 표정으로 단예의 앞 을 가로막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 을 뽑아 들었다.
그도 한때는 본산인 화산의 주목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자랑 했던 화산 속가의 제자였다. 그가 몸담고 있던 매검문은 질풍매화검으 로 유명했다. 질풍매화검은 부드러 움 속에 날카로움을 담아낸 것이 특 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만은 지 켜야 한다.’
양택호는 마음속으로 굳게 의지를 다지며 기수식을 취했다. 선공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발이 바쁘게 흙먼지를 일으키 며 검에 힘을 실었다. 날카로운 파 공성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검이 관해철의 미간으로 날아들었 다.
질풍과도 같은 검격이었다.
하지만 관해철은 넓적한 도신을 활 용해 양택호의 검을 가볍게 막아 냈 다.
“상인 놈치고는 제법 손이 맵군. 하지만 그 정도론 내 상대가 못 돼. 왜냐면 그 개자식한테 당한 뒤로 절 치부심하며 칼을 갈았거든.”
관해철이 검을 앞으로 밀어내며 반격을 펼쳤다.
사납게 이는 한줄기 폭풍.
양택호는 성난 파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위태위태하게 공격을 받아 냈다.
확연히 드러나는 힘의 격차.
하지만 양택호는 단예를 지켜야 한 다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수비를 도 외시한 공격으로 맞섰다.
양택호의 검은 묵직한 칼의 무게를 견뎌 내며 폭발적인 기세로 앞으로 나아갔다. 관해철도 당황했는지 대 응이 처음보다 기민하지 못했다.
간발의 차이로 검이 관해철의 옆구 리를 훑고 지나갔다. 점점이 번지는 혈흔. 관해철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 러졌다.
“네놈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사지를 찢어발겨 산짐승들의 먹잇감 으로 던져 주마!”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보고 광 분한 관해철이 사납게 도기를 뿌렸 다.
내력 소모가 심해서 잘 쓰지 않는 공격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가히 가공 절후했다.
캉.
도기와 정면으로 맞선 양택호의 검 이 부러졌다.
부러진 검날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제 주인의 가슴을 찔렀다. 양택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관해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 까 공언한 대로 양택호의 사지를 사 정없이 난도질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피와 함께 몸에 서 떨어져 나간 팔다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단 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힘없 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열셋의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경험이었다.
“흐흐, 너무 겁먹을 것 없어. 네년 은 귀한 몸이니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야.”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관해철이 단예에게 다가섰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단예는 뒷걸음질 쳤지만 관 해철의 억센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 다.
“아직도 정리 못한 게냐?”
단예를 한 손에 쥔 채 관해철이 광룡대에 물었다.
이에 광룡대주 석구한이 마지막 남 은 호병의 목에 칼을 꽂아 넣는 것 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직도 안 온 게냐?”
“네. 중도에 일이 생겼다면 전서구 라도 날려 소식을 전했을 터인 …….”
천중 상단의 서안 지부장 고진성이 훤히 벗겨진 이마를 매만지며 말꼬 리를 흐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총단 주인 강무호가 사나운 눈초리로 그 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이 생겼으면 당장에 사람을 보 내 경과를 알아봐야 할 것 아니냐!”
“그렇지 않아도 하오문에 의뢰를 넣었습니다. 발이 날랜 자들을 보낸 다 했으니 조만간 양 행수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 하필이면 예아 그 아이가 함 께한 상행에 사고가 터지다니.’
강무호는 가슴이 타들어 갔다. 단예가 양택호와 함께 이곳으로 온 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누구보 다 뛸 듯이 기뻐했다. 평소 예쁜 얼굴에 심성까지 고운 단예를 친손녀 처럼 아꼈기 때문이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대 한 빨리 그 아이의 행적을 알아내 라.”
강무호는 그 말을 하면서 뇌리에 설우진을 떠올렸다.
올해 초, 그가 광룡가의 산적들을 상대로 보여줬던 무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데 비월은 그마저도 실 력을 다 드러낸 게 아니라고 했다.
‘예아야, 제발 무사해 다오. 네 오 라비가 네 신상에 문제가 생긴 걸 알게 되는 날에는 강호가 한바탕 뒤 집어질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