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10화 : 귀향지로 (3)
귀향지로 (3)
아까부터 아저씨란 호칭이 거슬렸 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애와 실랑이를 벌일 수 는 없는지라 꾹 눌러 참았다.
“이야, 우리 소담이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맞아 여기 진 오라버니가 내게 신기자수를 전수해 줬어. 내가 천수신녀란 과분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도 다 이 오라버니 때문이야.”
설우진을 바라보는 단예의 눈빛은 뜨겁고 격렬했다. 일 년 전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납치 사건이 그녀 의 심경에 변화를 준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소담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설우진을 향해 절을 했다.
‘얘가 왜 이래?’
설우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 담을 쳐다봤다.
“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언니들과 동생들이 배 안 곯고 따뜻 한 방 안에서 잘 수 있어요.”
“야,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거야? 예심원을 만든 건 어머니고, 너흴 돌본 건 여기 있는 내 동생인데.”
“전에 사모님께서 그러셨어요. 아 저씨 덕분에 일품점이 생겼고, 그 일품점 덕분에 우리 집이 만들어졌다고.”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듣고 보니 민망해할 필요가 없었 다. 아닌 말로 그가 아니었으면 작 은 포목점에 불과한 설가장이 전국 규모의 일품점을 내는 일은 꿈도 못 꿀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우진은 괜히 가슴 한구석이 뿌듯 해져 왔다.
“예아야, 혹시 이곳에 뭐 필요한 거 없냐? 오라버니가 하나 장만해 주고 싶은데.”
마음이 한껏 들뜬 설우진이 돈주머니를 열었다. 단예는 한참을 고민하 는 듯하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로 뜻 밖의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 실은 전부터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어요, 청운학관의 신락원 과 같은.”
단예가 언급한 신락원은 어린 관도 들이 심신을 단련하는 공간이다. 뭐 말이 좋아 심신 단련이지 실제 로는 뛰어노는 아이들이 태반이었 다.
신락원에는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그네부터 서로 마주 앉아 뜀을 뛰는 널뛰기까지 다양한 놀이 기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네는 단연 인기가 많은 것은 그네였고 누가 먼저 탈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거,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려나?”
설우진은 영감이 잡히질 않았다. 놀이 기구는 겉으론 단순해 뵈지만 의외로 만들기 까다로운 구석이 있 었다.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선 무엇보다 균형이 잘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널뛰기의 경우 균 형추가 틀어지면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지거나 널뛰기 도중에 사람이 튕겨져 나가기도 했다.
설우진은 뜻밖의 요구에 당황하면 서도 겉으로는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했다.
“그럼, 오라버니만 믿을게요.”
“그래, 그래. 그까짓 거 사흘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어. 조만간 인부 들 구해서 올 테니까 미리 장소나 정해 둬.”
설우진은 그길로 시전으로 향했다.
“형님, 계속 이렇게 지내실 겁니 까? 천하의 풍야패가 옷 가게 뒤치 다꺼리나 하고 있다니요!”
대낮부터 한잔 걸쳤는지 벌겋게 달 아오른 얼굴로 막철이 푸념을 늘어 놨고 그의 맞은편에는 말쑥하게 차 려입은 호걸륜이 앉아 있었다.
그는 지난 일 년간 일품점의 경비장으로 고용돼 가게를 찾아오는 날파리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해 냈다.
날파리들은 대부분 건달패 수준에 불과했기에 일은 그가 나서기만 하 면 깔끔하게 해결되곤 했다.
하지만 무한 뒷골목의 왕으로 군림 해 왔던 그에게 그 일들은 보람 대 신 모욕감을 안겨 줬다.
“식구들이 불만이 많은 모양이구 나?”
“말도 마십시오. 다들 술만 마셨다 하면 일품점과 고간 욕밖에 안 합니 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 사달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막철은 풍야패 내의 사정을 소상히 전했다.
그러고 그 답답한 속을 달래듯 연 신 술을 들이부었다.
“형님, 우리 한탕 거하게 하고 다 른 동네로 뜹시다. 일품점 본점의 금고를 털면 우리 식구들 충분히 먹 여 살릴 수 있습니다.”
술김인지 막철은 극단적인 의견을 내놨다. 이에 호걸륜도 고민이 되는 지 한동안 말없이 빈 술잔만 빙빙 돌렸다.
“막철아, 뒷감당할 자신 있냐?”
호걸륜이 어렵게 입을 뗐다. 반쯤 은 막철의 의견을 수락했다는 의미 였다.
“그 괴물 같은 놈이 두려우신 겁니까? 걱정 마십시오. 제 놈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어도 저희가 작 정하고 몸을 숨기면 무슨 수로 찾겠 습니까. 더욱이 놈은 이곳 무한이 아니라 서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놈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왔을 때쯤 이면 저희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겁니다.”
막철이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래. 이대로 살 수는 없어. 특히 고간 그 녀석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더는 못해.’
콰직.
호걸륜의 손아귀에서 술잔이 바스 러졌다.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막철 못지않게 그의 자존심도 크게 뭉개져 있었다.
오랫동안 동생으로 데리고 있던 고 간이 일품점의 총관이 된 뒤로 볼 때마다 고개를 조아려야 했기 때문 이다.
고간이 지위를 앞세워 그를 무시하 거나 괴롭힌 적은 없었지만 그 자체 만으로도 참기 힘든 굴욕감을 느꼈 다.
“일을 치른다면 언제가 좋겠느냐?”
“결심이 서신 겁니까?”
“그래. 이왕 마음먹은 거 놈이 찾 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하자.”
“형님, 잘 생각하신 겁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거사를 치르 시죠. 때마침 점주 부부와 고간이 상인회 모임에 참석하려고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고간이 심어 놓은 경비 서넛만 제압하면 금고를 터는 건, 식은 죽 먹깁니다.”
막철의 두 눈에 진한 탐욕이 넘실 거렸다.
“이거 괜한 헛걸음했잖아, 이곳에 오면 뵐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일품점 본점의 꼭대기 층, 설우진 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의자에 걸터 앉았다.
엉덩이가 닿는 자리에 두툼한 털가죽을 여러 겹 깔았는지 푹신함이 남 달랐다.
“도련님, 댁으로 가서 기다리시지 요. 아마 빨라도 자정쯤에나 돌아오실 겁니다!”
“꽤나 중한 사안을 논의하는 자리인가 보죠?”
설우진의 시선이 장씨에게 꽂혔다. 장씨는 본점을 총책임지는 관리자로 승진한 상태였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전에는 없던 당당함이 느 껴졌다.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다 만 점주님께서 떠나실 때 황궁에서 사람이 내려왔다는 얘길 잠깐 언급 하셨습니다.”
“황궁? 그쪽에서 일개 상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일이 있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이기는 한 데, 근 시일 내로 황궁 주최 예복 경연이 열린다고 합니다.”
“예복 경연이면 황족들의 옷을 짓는 건가?”
“네. 그 대상이 누가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경연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엄청난 반사이익이 있을 것 으로 짐작됩니다.”
‘이 아저씨,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유식해졌네. 고간에게 따로 과외라 도 받은 건가?’
설우진은 막힘없이 답을 해 내는 장씨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장씨는 처음 설가 포목점에 들어왔 을 때 일자무식이었다. 집이 가난해 제때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설우진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장 씨가 뺨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에 설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황궁 경연에 우리 일품점도 참가하게 되는 건가요?”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본점은 그 위상이 하늘에 닿아 있습 니다. 저희 쪽에서 거절을 한다면 모를까 초청 명단에 십중팔구는 일 품점의 이름이 올라 있을 겁니다.”
장씨는 확신에 찬 말투로 얘기했다.
어느 정도 애사심이 섞여 있기는 하겠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 다.
일품점은 최근 일이 년 사이에 강 북을 뜨겁게 달궜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여인들 사이에서 일품이란 상표는 명품 그 자체로 통했기 때문 이다.
한데 그 일품점을 빼놓고 경연을 펼친다?
최고만을 추구하는 황궁의 특수성 을 감안해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무척 낮다고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사이 해는 서편으로 저물어 갔다. 대로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련님, 전 가게 마감을 좀 해야 해서………….”
“알았어요. 그만 내려가 봐요.”
장씨는 급하게 계단을 타고 일층 으로 내려갔다. 일품점은 보통 해가 저무는 유시 무렵에 매장을 정리하 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 문을 닫은 이후에는 경비를 서는 일부 직원들 만 남고 매장 관리와 판매를 맡은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다.
장씨가 내려가고 이각여쯤 지났을 까. 일 층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확 줄어들었다. 다들 퇴근하고 경비를 맡은 직원들만 매장에 남은 것이다.
‘슬슬 배도 고파 오는데, 주가장에 가서 밥이나 얻어먹을까?”
설우진은 창밖으로 주가장을 내려 다봤다.
시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꽤 먼 거리인데도 주가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설우진이 계단을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막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 려서려는 찰나 그의 신형이 어둠 속 으로 사라졌다. 의도적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바로 그때 희미한 불빛을 내며 일단의 무리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들이 지나온 길에는 경비를 맡고 있 던 점원들이 쓰러져 있었다. 일격에 제압을 당했는지 저항의 흔적은 보 이지 않았다.
“금고는 작업실 지하에 숨겨져 있 다. 고간이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기관을 설치해 뒀으니 섣불리 접근 하지 말고 기관이 발동될 때까지 기 다려라.”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 호걸륜의 얼 굴이 비쳤다.
그는 부하들에게 단단히 경고를 한 뒤 작업실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작업실은 다섯 명의 인원이 머무는 공간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넓은 규모를 자랑했다. 일 장 간격 으로 작업대가 놓여 있고 한쪽 구석 에는 언제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푹신한 침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 다.
선두에 선 호걸륜은 작업실을 그대 로 가로질러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 다. 그러고 횃불을 들어 그 주변을 살피더니 바닥에 살짝 돌출된 부위 를 지그시 아래로 눌렀다.
드르륵.
요란한 기관음과 함께 침상은 거꾸 로 들렸고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대조가 눈치채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야 한다. 내가 금고를 열면 전표는 제쳐 두고 금괴와 같은 현물 만 챙겨 넣어라.”
호걸륜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통로는 십장 정도 이어져 있었는데, 그 끝에 쇠로 된 문이 자 리하고 있었다.
‘일단 기관부터 작동시켜야지.’
호걸륜은 품 안에서 두툼한 차돌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넉넉하게 거리 를 확보한 뒤 힘차게 악력을 실어 차돌을 문 한복판으로 내던졌다. 파파팟.
차돌이 문과 부딪침과 동시에 네 방향에서 동시에 쇠꼬챙이가 튀어나 왔다. 잔뜩 날이 선 쇠꼬챙이에는 검푸른 빛깔의 독까지 발려 있었다.
“형님, 여기 무음탄입니다.”
기관이 멈추는 걸 보고 뒤쪽에 대 기하고 있던 막철이 계란만 한 크기 의 동그란 물체들을 앞으로 내밀었 다.
살수들이 침투 시에 사용하는 무음 탄이었다. 무음탄은 그 이름처럼 폭 발음이 다른 화탄에 비할 데 없이 작았다. 단, 소리를 죽였기 때문에 화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호걸륜은 건네받은 무음탄 심지에 한꺼번에 불을 붙였다. 부족한 화력 을 양으로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퍽!
잠시 후 가는 폭음과 함께 시퍼런 불길이 문을 뒤덮었다. 불길에 닿은 부분은 그대로 녹아 들어갔고 불길 이 잦아진 뒤에는 어른 하나가 기어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생겼다.
“형님, 제가 꺼내 오겠습니다.”
막철이 자진해서 구멍 안으로 기어 들어갔고 겉보기와 다르게 금고 안 은 크고 넓었다. 유사시에 도피처로 사용해도 될 정도였다.
막철은 부푼 마음으로 금고 안을 살폈다.
그런데 희망으로 부풀었던 그의 얼 굴은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흑색으 로 변해 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금괴는 커녕 전표 쪼가리 하나도 보이질 않잖아!”
금고 안은 그야말로 텅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