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20화 : 위기 중첩 (1)
위기 중첩 (1)
“사람들은 좀 모았어?”
“그게, 생각보다……………”
“많이 모이질 않았다고?”
설우진은 어느 정도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철기방에 들지 못한 야장들 은 대부분 홀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 다. 일감이 적으니 사람이 모이려야 모일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런 사람들한테 물건을 팔아 주겠 으니 모이라고 한 말이 쉬이 먹힐 리 없었다.
“처음부터 시끌벅적하게 시작할 필 욘 없어. 어차피 이 사업은 한두 달 안에 끝나는 게 아니니까. 일단 이 돈으로 목 좋은 곳에 철기 공방부터 차려.”
“굳이 목 좋은 곳에 철기 공방을 세울 필요가 있겠소?”
“있어, 그게 이번 사업의 핵심이거 든.”
‘당최 무슨 소린지.’
나철환은 설우진과의 대화가 답답 하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설우진이 곧바로 부연 설명에 나 섰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유명 철기방 을 따라잡지 못해. 왜냐하면 사람들의 뇌리에는 그들 이름만 남아 있거 든. 그래서 난 사람들에게 직접 물 건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 야. 사람의 눈은 정직해서 일단 눈 에 들어오면 머릿속에 담아 두려 하거든.”
열린 공방. 이는 설우진이 낭왕 시 절에 유행했던 것 중 하나다.
그 시작은 산동 지역의 막가 철기 방이었다.
막가 철기방은 한때 산동군부의 철 기를 모두 공급할 정도로 큰 세를 누렸었다.
한데 칠대방주가 군부에 병기를 납 품하러 갔다 의도치 않게 전쟁에 휘 말리면서 사달이 벌어졌다. 물품 대금도 받지 못한 채 시체로 돌아온 것이다.
막대한 자금 손실을 떠안은 막가 철기방은 그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로부터 백 년이 흐른 뒤 막가 철기방은 이름만 덜렁 남았다. 일하 는 야장이라고 해 봐야 막가의 혈족 셋이 전부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 셋 중 하나가 철기방을 살릴 묘안을 하나 짜냈다. 그것은 바로 앞서 언급했던 열린 공방이다. 열린 공방은 이름 그대로 작업하는 모습을 물건을 사고자 하는 이들에 게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식이었다. 처음엔 다들 열린 공방 자체를 낯설게 여겼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열린 공방을 찾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눈으로 야장들의 실 력을 확인하면서 제품의 질이 뛰어 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막가 철기방의 성공으로 전국 각처 에 열린 공방이 문을 열었다. 대부 분이 영세한 업체들이었지만 그들 또한 막가 철기방 못지않은 인기를 끌게 되면서 대형 철기방도 하나둘 씩 열린 공방을 시작했다.
“일단 믿고 작업을 추진해. 솔직한 말로 당신들에게 손해날 건 없잖 아.”
“뭐, 그건 그렇지만. 망하면 손해가 막심할 텐데…”
“괜찮아. 그 정돈 감수할 만한 재 력이 있으니까.”
‘그래. 내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 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나철환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망설 임을 깔끔하게 털어 냈다.
살수지문은 긴 세월 강호에 암약해 왔다.
그들은 강호의 지배자가 누가 되든 상관하지 않았기에 그 세력을 온전 히 이어 올 수 있었다.
북경에 터전을 두고 있는 나살문은 오백 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살 수지문이다. 한때는 살각, 무영사 등 과 함께 삼대 살수지문으로 손꼽히기도 했었는데, 백여 년 전에 무당 장문인을 암살하려다 실패하면서 그 세가 확 줄었다.
분노한 무당의 검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개방과 연계해 나살문의 안 가들을 잇달아 침습했다. 살수지문 의 문도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힘의 격차가 너무 극명했다.
결국 나살문은 봉문을 결정했다. 이후 나살문은 부활의 때를 기다리 며 임시방편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봉문을 하더라도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의뢰 사업이었다.
나살문은 사람 죽이는 일만 제외하고 어떤 의뢰든 맡아서 수행했다.
정오 무렵 북경 대로변에 자리한 오성각 안으로 낯익은 사내가 얼굴이 비췄다. 설우진이 경연에 참가한 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던 벽 라점의 총점주 고성만이었다.
그는 식당 안을 휘둘러보더니 창가 쪽이 비어 있는데도 가장 안쪽에 자 리를 잡고 앉았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원하는 요 리가 있으시면 이 종이에 써서 제게 건네주십시오.”
인상 좋아 뵈는 점소이가 종이와 붓을 건네주고 갔다. 그만 특별 대접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식탁에서도 종이와 붓이 보였다.
고성만은 종이를 앞에 두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붓을 들어 시원 하게 휘갈기기 시작했다.
설우진. 우장 분골. 금일백.
간단하게 써 내려간 몇 가지 단어. 그 안에는 나살문에 전하는 함축적 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고성만은 붓을 내려놓은 뒤 점소이를 다시 불 러 종이를 건네줬다.
점소이는 종이에 적힌 글귀들을 한 차례 훑어 내더니 입가에 살짝 미소 를 그리며 주방에 대고 소리쳤다.
“여기 소향채 한 접시, 동파육 한 접시.”
오성각에서 자주 찾는 요리들이었 다. 특별할 게 없는 주문이라 손님 들 중에 고성만을 주목하는 이는 아 무도 없었다.
잠시 후 두 요리가 고성만의 식탁 에 올라왔다. 고성만은 평범하게 식 사하면서 접시 바닥을 자연스럽게 들춰냈다. 신기하게도 그 안에는 하 나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허許.
글자를 확인한 고성만은 식탁에 돈 을 올려놓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의뢰, 괜찮겠느냐?”
은은하게 불빛이 감도는 방 안. 두 노소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 다. 병을 앓고 있는지 노인은 병색 이 완연했다. 청년은 그런 노인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사부님, 걱정 마세요. 뒤탈 없이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어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하오문 의 장 노인이 귀띔해 주길 검귀의 친우라 했다. 무공광인 검귀와 연분 을 맺을 정도면 그자 또한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혔다고 봐야 한다.”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살수를 겪 어 보지 못한 이들은 우리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어요. 그건 사부님께 서 더 잘 아실 텐데요.”
“흐음, 그렇긴 하다만.”
“일단 저한테 맡겨 주세요. 이번에 멋지게 의뢰를 수행해, 절 못 미더 워하시는 장로님들의 신임을 얻어 낼게요.”
청년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래. 재능만큼은 최고인 아이이 니 경험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잘 해 낼 것이야.’
노인은 청년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오성각의 점소이 하 나가 결근했다.
“황궁의 경연이니만큼 다들 최고의 재료들을 가져오겠지.”
경연을 하루 앞둔 날. 설우진은 북 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화 평시전을 찾았다. 경연에 쓸 비단과 수실 등을 사기 위함이었다.
시전 안은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 정도로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크게 붐볐다.
하지만 설우진은 중요한 경연을 앞 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로 여유가 넘쳤다. 급한 마음에 억 지로라도 길을 열고 나갈 법하건만 그는 세월아 네월아 길이 열리기만 을 기다렸다.
‘평생을 화려한 옷만 입고 산 공주 야. 그런 공주에게 화려함만을 강조 한 옷은 전혀 자극이 되질 못하지. 그렇다면 아예 접근 방식을 달리해 야 해.’
설우진은 시전 구석구석을 둘러보 며 경연에 선보일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이번 황궁 경연이 만만치 않 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보 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장인들이 대 거 출사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사실 뇌기 자수는 꼼수에 불과해. 뇌기 자수만 믿고 덤볐다간 큰코다 치고 말 거야.’
설우진은 스스로의 한계를 뚜렷하 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자수 실력은 분명 뛰어난 편 에 속했다. 하지만 이는 평범한 사 람들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야기이 고, 사실 단예와 같은 천재들과 비 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고민이 깊어질 무렵 설우진의 정면 에 눈에 띄는 청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