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22화 : 위기 중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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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4권 – 22화 : 위기 중첩 (3)


위기 중첩 (3)

설우진이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위험을 느낀 그녀는 손에 쥐고 있 던 돌에 내기를 실어 내던졌다. 그 자체로 상당히 훌륭한 암기였다. 하지만 설우진은 들이치는 돌을 보 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볍 게 고개를 틀어 피한 뒤 곧장 그녀 의 몸을 껴안았다.

“이거 놔!”

유설하는 설우진의 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설우진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꽉 틀어쥐었다.

순간 그녀의 몸이 그대로 경직됐다.

누구에게도 허락지 않았던 천인 미 답의 땅에 너무나도 거친 사내의 손 길이 닿은 것이다.

“나 나쁜 놈 만들지 마. 내가 여자 를 좋아하긴 해도 이런 식은 별로 내키지 않거든.”

“……”

“셋을 세지. 그때까지 답하지 않으 면 이 손이 어디까지 가게 될지 나 도 장담 못 해.”

설우진은 냉담한 표정으로 최후통첩을 했다. 이런 상황이면 흥분할 법도 하건만 그의 눈엔 어떠한 열기 도 담겨 있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미인계라도 쓸 생 각이었던 그녀는 그 눈빛에 담긴 감 정을 읽어 내고는 절망했다. 

‘죄송해요, 사부님!’

잠깐의 망설임 끝에 유설하가 어렵 게 입을 뗐다.

“저희한테 의뢰를 넣은 건 벽라점 의 총점주예요. 그쪽에서 요구한 건 무슨 수를 써서든 당신이 경연에 참 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이것들이 예아의 일을 그냥 조용히 덮고 넘어가 줬더니 또다시 수작 질을 부려!’

벽라점이란 이름에 설우진은 불같 이 분노했다.

예아가 납치당했을 당시 그는 벽라 점을 아예 세상에서 지워 버리려고 했다. 한데 단예가 극구 말렸다, 애 꿎은 사람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다 며.

‘예아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 처럼 아름답지 않단다. 호의를 베풀 면 그걸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꼭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후리지.’

“그쪽에 의뢰하는 데 얼마나 들지?”

“그건 갑자기 왜……?”

“나도 의뢰를 하나 맡길까 하거 든.”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유설하는 설우진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에 겐 선택권이 없었다.

“가격은 의뢰 내용을 들어 보고 말씀드리죠.”

“호오, 이런 상황에서도 제법 의연 하네. 맘에 들어.”

“그럼 일단 이 손부터 놓고 얘기하시죠.”

유설하가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점 거하고 있는 설우진의 오른손을 잡 아챘다. 설우진은 의외로 그녀의 요 구대로 순순히 손을 뗐다.

“우리 쪽에 원하는 게 뭐죠?”

그녀가 황급히 옷을 갈아입은 뒤 설우진에게 물었다. 무명천으로 가 슴을 감쌀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가슴 부위가 크게 도드라져 보였다. 설우진은 그녀의 가슴을 흘깃 쳐다 본 후 다시 대화를 이었다.

“그쪽이 나서서 판을 좀 키워 줬으 면 좋겠어.”

“…..무슨?”

“은밀히 내기 판을 만들라는 얘기 야. 황궁 경연 정도면 부자들의 구 미를 당기기에 충분하잖아.”

“그런 짓을 했다가 황실에 발각이 라도 되면 큰 난리가 날 텐데요.”

“그러니까 뒤탈 안 나게 깔끔하게 일을 진행해야지. 그리고 잘만 하면 그쪽도 한몫 챙길 수 있잖아.”

“설마 당신한테 돈을 걸라는 건가 요?”

“왜, 내가 질 것 같아?”

“혈봉의 독은 열흘 정도 효과가 지 속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몸으 로 어떻게 우승을 장담하는 거죠?” 

유설하는 설우진의 자신감이 이해 되지 않았다.

혈봉의 독은 마비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바느질처럼 정교한 작업을 하 는 이에게는 무척 치명적으로 작용 했다. 게다가 혈봉의 독은 사천 지 역이 아니고선 해독제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답을 미리 알고 있으면 재미가 없 지. 선택은 네 몫이야. 내가 못 미더우면 벽라점 쪽에 걸면 돼.”

‘대체 뭐지, 이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유설하는 설우진이란 남자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표적이 아닌 남자 로서의 관심이었다.


끼익, 쿵.

설우진은 유설하와 계약을 맺은 뒤 숙소로 돌아왔다. 그의 양손에는 돌 아오는 길에 구매한 비단과 수실 뭉 치가 들려 있었다.

“이거 큰소리치기는 했는데, 잘될 지 모르겠군.”

비단과 수실을 탁자에 올려놓은 후 설우진은 주머니에서 바늘을 꺼냈다.

그리고 바늘에 수실을 꿰어 넣은 뒤 비단 한 귀퉁이를 잘라 그 위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비단에 난이 잎사귀를 늘어뜨렸다. 평소의 그였다면 반각도 걸리지 않 았을 텐데 이번엔 반시진은 족히 소 요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이 죽어 있었다.

‘역시 이 손으로 무리인가?’

설우진은 반복적으로 오른손 검지 를 까닥였다. 힘을 주니 안쪽으로 접히기는 하는데 내 몸이 아닌 것처 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에 설우진은 손에서 깔끔하게 바늘을 내려놨다.

무슨 다른 방도라도 있는 것일까?

설우진은 그 상태로 바늘을 빤히 바 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바늘이 공중으 로 떠올랐다. 그러고 한참을 빙그르 돌더니 비단 아래로 머리를 향했다. 잠시 후 바늘이 비단 위를 오가기 시작했다. 손으로 자수를 놓을 때와 비교해서는 그 속도가 확연히 느렸 지만 정교함은 되살아났다.

뚝.

새롭게 꽃을 피운 난 위로 땀방울 이 떨어졌다. 설우진의 이마에서 흘 러나온 것이었다.

그가 방금 전에 선보인 자수는 이 기어침을 활용한 것이었다. 이기어침은 이기어도처럼 기를 통해서 바늘을 움직이는 기술이었다.

사실 이기어침은 뇌력침을 가지고 놀다가 우연히 얻게 된 것이다. 손 으로 가지고 노는 게 시시해지니 자 연스럽게 내기를 사용하게 된 것이 다.

“흠, 확실히 심력 소모가 극심해. 겨우 난 하나 완성하는 데도 이리 힘이 드니.”

설우진은 손등으로 땀을 훔쳐 냈 다.

이기어침은 그 뛰어난 공능만큼이 나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바늘 자체가 가볍다 보니 조금만 집 중력이 틀어져도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자수는 정교함이 중요시되는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어침은 설우진 에게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설우진은 그 사실에 크게 부담 갖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어 려움은 전생에 수도 없이 겪어 봤기 때문이다.

‘이 정도도 못 해내면 낭왕이란 수 식어를 버려야지. 까짓것 몇 날 밤 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완전히 익히 고 말겠어.’

설우진은 다시 한 번 내기를 활용 해 바늘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바 늘은 공중에서 빙그르 한 바퀴 돈 후 비단으로 부드럽게 날아갔다.


사람들이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오 성각 뒷마당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 였다.

벽라점의 총점주인 고성만과 나살 문의 후계자 유설하였다.

그녀는 고성만에게 일의 진행 상황 을 전했다. 물론 설우진에게 발각된 사실은 숨겼다.

“실망이군, 그래도 이쪽 방면에서 꽤나 유서가 깊다 하여 맡겼던 것인 데.”

고성만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됐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대신 이 잔금은 도로 가져감세.”

고성만은 밖으로 꺼내 놨던 전낭을 다시 안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눈에 그 속셈이 뻔히 보였지만 유설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후훗, 이거 돈 굳었군. 놈이 완전 히 떨어져 나가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오른손 검지가 묶인 상태로 제 놈이 뭘 하겠어. 긴장도 풀겸 애월이 년 궁둥이나 좀 두들겨 주고 와야겠군.’

고성만은 두툼한 주머니를 매만지 며 오성각의 뒷문을 빠져나갔다. 그 가 떠난 뒤 한껏 미소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많이 분한가 보구나?”

그녀의 등 뒤에서 인자해 뵈는 노 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나살 문의 당대 문주인 묘상후였다.

“죄송해요. 아직도 이런 일엔 마음 이 쉬이 다스려지지 않네요.” 

“후훗, 네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이 다. 어찌 보면 그게 당연한 게야.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나누 “자꾸나.”

묘상후는 하륜이 오성각을 찾기 전 까지 유설하와 설우진이 제안한 내 용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가 비록 부상을 입은 뒤로 일선 에서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암흑가와 정계에 두루 걸쳐 져 있었다.

“판을 만드는 건 가능한가요?”

“부자들이나 고관대작들은 자극적 인 유흥거리를 즐긴단다. 그런 점에 서 황궁 경연은 아주 먹음직스러운 유흥거리라 할 수 있지.”

“만약 그자의 호언장담대로 우승한 다면 나살문을 재건할 수 있는 자금 도……?”

“그래, 한 번에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염두에 둬 야 한다. 만약 우승을 못 한다면 어 렵게 모은 자금을 한 번에 잃을 수 도 있다.”

“한마디로 도박이라는 거군요?”

유설하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가슴 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진 것이 다. 이에 묘상후가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며 말을 건넸 다.

“이 사부는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하 든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 줄 것이 다. 하니 주변의 눈치 볼 것 없이 네 소신대로 밀어붙여라.”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실패가 두려운 게냐?”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이 번 일이 잘못되면 본문의 백년지계 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요.”

유설하는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이에 묘상후는 진중한 표정으로 대 화를 이어 갔다.

“설하야,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란다. 네가 정녕 본문을 위한다면 그 마음 속의 두려움부터 떨쳐 내거라.”

‘그래 사부님의 말씀이 맞아. 이렇 게 갈팡질팡하는 건 이번 일에 아무 런 도움도 안 돼. 차라리 크게 걸고 그자가 우승할 수 있도록 옆에서 적 극적으로 돕는 게 나아.’

흔들리던 유설하의 눈빛이 제자리 를 찾았다.


“역시 황제가 사는 곳이라 그런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군. 여기에 비하면 낭천의 성은 헛간에 불과하겠 어.”

해가 중천으로 향해 갈 무렵, 수백 에 이르는 엄청난 인파가 오문과 태 화문을 지나 넓은 태화전 뜰에 다다 랐다.

태화전은 황제가 신하들의 의례를 받거나 국가적인 의식을 치르는 곳 으로 이렇게 관인이 아닌 자들에게 개방된 것은 무척 이례적인 경우였 다.

황궁 경연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 서 모여든 이들은 그 숫자가 기백에 달했다. 그들은 저마다 두 눈에 힘 을 잔뜩 주고 있었다. 긴장과 견제 의 의미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기 집에 온 듯 태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이들이 있었다.

북경 벽라점의 대표 장학우와 장사 태희점의 대표 홍설 그리고 무한 일 품점의 대표 설우진이 바로 그들이 었다.

장학우는 침선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반백의 노인이었다. 그는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두 눈에 정광이 흘러넘쳤는데, 그의 시선은 줄곧 반대편에 서 있는 홍설 을 향하고 있었다.

홍설은 매혹적인 붉은빛의 궁장을 걸치고 있었다. 불혹에 가까운 나이 임에도 꾸준히 관리해 온 덕인지 약관의 처녀들처럼 고운 피부를 자랑 했다.

‘어린 계집이 겁도 없이 찾아왔구 나. 이번에야말로 네 머리 위에 하 늘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흥, 그 잘나 빠진 눈빛은 여전하 네. 하지만 이번엔 당신이 내 발아 래 무릎을 꿇게 될 거야. 당신을 이 기기 위해서 남자도 끊고 필사적으 로 노력해 왔거든.’

두 사람의 시선이 맹렬하게 맞부딪 쳤다.

‘쯧쯧, 나이 먹고 저게 뭐하는 짓 들이야? 눈에 힘줄 시간에 바느질 연습이나 더할 것이지.’

설우진은 두 사람을 한심하다는 표 정으로 바라봤다. 그의 얼굴엔 피곤 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이기어침 을 숙달하느라 거의 밤을 지새운 것 이다.

바로 그때 요란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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