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32화 : 흑성 조우 (1)
흑성 조우 (1)
“여기서도 엇갈리면 곤란한데.”
북경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한 사내 가 머리에 쓰고 있던 방갓을 벗어 들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
진추성이었다.
그는 나흘 내내 쉬지 않고 달렸다. 장사에서 무한으로, 무한에서 북경 으로,
처음 무한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는 여유가 있었다. 설우진이 일품점에 머무르고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일품점에 들 러 설우진의 소재를 물으니 경연에 참여하기 위해 북경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진성은 북경으 로 내달렸다.
말을 이용해도 사나흘은 족히 걸리 는 거리였기에 쉴 여유가 전혀 없었 다.
진추성은 사람들로 붐비는 북경대 로를 지나쳐 강변의 후미진 골목으 로 들어갔다.
골목 안쪽에는 더위에 지친 거지들 이 늘어져 있었다.
진추성은 그 거지들을 유심히 살피다 허리에 흑색 매듭이 걸려 있는 이를 찾아 철전 하나를 던졌다.
쨍그랑.
철전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떼 로 얼룩진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런데, 그 손이 철전을 집으려는 찰나 진성의 검이 그 앞을 가로막 았다.
“웬 놈이냐?”
거지의 흐릿했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이에 진성은 가슴 어림 에서 칠흑빛의 목패 하나를 끄집어 냈다. 목패에는 天 자가 거꾸로 새 겨져 있었다.
“흑성을 뵙습니다.”
거지의 태도가 완전히 돌변했다.
진추성은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다 이내 대화를 이어 갔다.
“긴히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방주님께 서 최선을 다해 도우라 하셨습니 다.”
“그럼 사람 하나만 찾아다오. 이름 은 설우진. 무한 설가장 출신으로 황궁 경연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진추성은 설우진의 신상을 자세히 전했다. 거지는 이를 끝까지 경청하 더니, 반시만 기다려 달라 청하고 골목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 둘이 정말 정표를 나눴단 말이냐?”
“네.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 다.”
“지금 당장 낭인들을 이용해 놈을 외진 곳으로 유인해라. 내 직접 놈 을 찾아가 공주의 마음을 어지럽힌 죄를 물을 것이다.”
위소의 보고를 들은 천소강은 불같 이 화를 냈다. 아니길 바랐던 내용 이 사실로 드러났으니 그 심정이 오 죽하겠는가.
위소가 방을 나선 뒤 천소강은 벽 에 걸려 있던 자신의 애검을 집어 들었다. 바위도 일격에 갈라 버릴 수 있는 홍아검이었다.
천소강은 홍아검을 품에 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구문제독부 를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알차게 시간을 보냈군. 경연도 우승하고, 덤으로 금황침과 쓸 만한 정보 조직까지 얻고.”
주소령과 헤어진 뒤, 설우진은 유 설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짐을 챙겨 나왔다. 고향인 무한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로를 벗어나 니 한결 길이 한산해졌다.
설우진은 주변의 풍광을 둘러보는 여유를 보이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북경 외곽에 다다랐을 무렵.
한 무리의 사내들이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는 것이 인근의 흑도패로 짐작됐 다.
“형씨, 보아하니 돈 좀 있어 뵈는 데, 적선한다 치고 우리 술값이나 좀 보태 주지! 요즘 영업이 신통치 않아서 주머니가 보다시피 텅텅 비 었거든.”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애꾸 사내가 주머니를 들춰내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흑도패 놈 들이 이런 파리 날리는 곳에서 기웃 거릴 리가 없는데.’
설우진은 대번에 그들의 정체를 의심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 주변은 흑도패가 자리 잡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 다.
인근에 마을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규모가 작았고 무엇보다 시전이 너 무 멀리 위치해 있었다. 흑도패의 주 수입원은 시전 상인들에게 거둬 들이는 자릿세다. 규모가 큰 흑도패 라면 모를까, 저 정도의 흑도패라면 자릿세 말고 수입을 낼 것이 없었 다.
‘어디 진짜 흑도패 놈들이 맞는지 시험해 봐야겠군.’
“얼마를 원하지?”
“……우리 머릿수에 맞춰서 은자 스무 냥.”
애꾸 사내가 액수를 제시했다.
설우진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전낭에서 은자를 꺼내 앞으로 내밀 었다.
그 순간 애꾸 사내의 눈이 불안하 게 흔들렸다.
“왜, 부족해? 원하면 더 줄 수 도 있는데.”
설우진은 은자 스무 냥에 열 냥을 더했다. 하루 치 술값으로는 차고 넘치는 돈이었다.
이때, 흑도패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할 거요?
흑도패의 시선이 애꾸 사내에게 모아졌다.
-후훗, 오히려 우리에겐 잘된 일이다. 놈만 제압하면 저 돈까지 우리 것이 되는 것이 아니냐.
애꾸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주위의 사내들도 그 속내 를 알아차렸는지 덩달아 웃음을 지 었다.
“미안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겠 어. 우린 여자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거든.”
애꾸 사내는 설우진이 손에 쥔 은 자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는 노골적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 다. 일부가 아닌 전부를 가져가겠다 는 의사 표시였다.
“뒷감당할 자신들은 있는 거야?”
설우진은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애 꾸 사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순간, 애꾸 사내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쫄 렸다. 설우진의 기세에 압도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씨발, 저놈의 뒤에 누가 있든 구 문제독보다 세겠어.’
애꾸 사내가 설우진의 정면으로 짓쳐 들었다. 육중한 덩치와 달리 그 움직임은 상당히 기민했다.
쉬파팟.
허리에서 빠져나온 곡도가 사나운 울음을 터뜨리며 설우진의 옆구리를 훑었다. 일개 흑도패의 것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깔끔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설우진이라는 게 문제였다. 설우진은 곡도의 움직임 을 빤히 읽고 있었다.
야수안을 써서? 아니었다. 그는 마 치 애꾸 사내가 구사하고 있는 도법 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곡도가 들어올 자리를 미리 알고 한 발짝 먼저 위 치를 옮겼다.
덕분에 애꾸 사내의 곡도는 번번이 허공을 휘저었다. 이쯤 되니 애꾸 사내의 마음속엔 불안감이 스물스물 밀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가 감당 못 할 고수는 아니겠지?”
애꾸 사내의 손에 절로 힘이 더 들어갔다. 마음이 조급해지다 보니 동작이 커진 것이다.
설우진은 그 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회피 일변도에 기습적으로 앞으로 치고 들어가 정면에서 들이 치는 곡도를 옆에 흘려보낸 뒤, 애 꾸 사내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챘 다.
“요즘 흑도패들은 잔월도법도 익히나 보지?”
“그, 그걸 어떻게?”
“일전에 너와 같은 수법을 쓰는 놈 을 만난 적이 있거든. 그놈도 아주 상종 못 할 개새끼였지.”
설우진의 두 눈에 진한 살기가 맺혔다.
그가 곱씹는 존재는 제 이익을 위해 동료들의 등에 스스럼없이 칼을 꽂았던 막광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지만 아직도 놈을 생각하면 분기 가 끓어올랐다.
“네놈, 혈랑기 출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