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5권 – 24화 : 적랑 출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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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5권 – 24화 : 적랑 출현 (3)


적랑 출현 (3)

북리강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해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의 마음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이 몸이 누구 때문 에 진짜 싸움에 껴 보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끌려 왔는데. 이 더러운 기분을 씻어 내기 전까지 네놈은 살 지도 죽지도 못해.”

태찬월은 북리강에게 분풀이를 했다.

본래 그의 계획은 마천의 본대가 움직일 때 선봉에 서서 활약하는 것 이었다. 그가 속한 적랑대는 돌격부 대의 성향이 짙기에 그 계획은 무리 없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청랑대가 일을 그르치면서 그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가문 의 힘을 통해 그 명령을 거부해 보 려 했지만 천주의 직령이라 소용이 없었다. 그 때문에 태찬월은 중원에 나와 있는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북리강이 태찬월에게 붙들려 있는 동안 사방으로 흩어진 관도들은 필 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움직임을 보인 이는 나불 진이었다.

나불진은 경공에 특화된 관도답게 현란한 방향 전환으로 뒤따르는 적 랑대원을 농락했다. 위험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잔뜩 열이 받은 적랑대원이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나불진에게 검기를 휘둘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사나운 살기에 나불진은 기겁하며 바닥에 엎드렸 다. 간발의 차이로 검기가 그의 등 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순간의 위기는 넘겼지만 검 기를 피하느라 발이 묶인 탓에 적랑 대원에게 뒤를 따라잡히고 말았다. 

“쥐새끼 같은 놈. 그 두 다리를 잘 라 기어 다니게 만들어 주마.”

적랑대원은 재차 검기를 휘둘렀고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나불진 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 다. 한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두 다리에는 통증이 전해지지 않았다. 나불진은 속으로 의아해하며 조심 스럽게 눈을 떴는데 그의 앞에 두 눈을 사납게 치켜뜬 적랑대원이 서 있었고 그의 목덜미 한복판에 익숙 한 모습의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 다.

‘저, 저건 천뢰도?”

나불진이 다급히 사위를 둘러봤다. 잠시 후 수풀 너머에서 설우진이 바람처럼 달려 나왔다. 그제야 나불 진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진 것이 다.

“젠장, 구해 주려면 진즉 구해 줄 것이지. 겁나서 바지에 오줌 지릴 뻔했잖아!”

나불진이 반가운 마음에 설우진을 보고 볼멘소리를 했다.

“인마, 상대가 적랑대였으면 지려 도 뭐라 할 사람 없어. 그보다 상황 은 어때?”

“최악이야. 관도들은 뿔뿔이 흩어 졌고 놈들은 사냥하듯 그 뒤를 쫓고 있어.”

“숫자는?”

“정확히 세지는 못했지만 스무 명이 조금 넘어 보였어.” 

‘다행히 많은 숫자가 오지는 않았 군. 게다가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라 면 무리하지 않고 각개격파를 통해 놈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겠어.’

설우진은 나불진의 얘기를 듣고 앞 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머릿속으로 동선을 짰다. 또한 그와 동시에 청 각을 극대화했다. 적랑대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매서운 칼 소리가 들렸다. 일개 학관의 관도가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에 설우진 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신형을 튕겼다.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등 뒤로 천뢰도가 발 빠르게 쫓아왔다. 자세히 보니 천뢰도의 도병에 수실이 묶여 있었다.

설우진은 잠시 후 두 번째 적랑대 원과 맞닥뜨렸다. 그는 정신없이 도 망치는 관도를 옆으로 밀치고는 적 랑대원의 가슴팍으로 천뢰도를 쏘았 다.

수실에 묶여 있는 천뢰도는 이기어 도를 펼치는 것처럼 설우진의 의지 에 따라 빠르고 유연하게 적랑대원 의 가슴으로 짓쳐 들어갔다.

기습적인 공격에 적랑대원은 당황 해하면서도 빠르게 뒷걸음질을 쳐 수중의 도로 천뢰도를 옆으로 쳐 냈 다.

힘에서 밀린 천뢰도는 순간적으로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이에 적랑 대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반격 을 시도했다. 한달음에 땅을 박차고 날아드는 그의 공격은 상당히 매서 워 보였다.

쉬익.

적랑대원의 도가 매서운 칼바람을 일으키며 설우진의 면전으로 들이쳤 다.

단 일격에 얼굴을 갈라 버릴 기 세였다. 한데 눈앞에 위기가 닥쳤는 데도 설우진은 웃고 있었다.

‘이 자식이 대체 뭘 믿고?’

적랑대원은 가슴 한구석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싹텄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아졌다.

마음의 불안감을 해소하려 적랑대 원은 손끝에 더 힘을 실었고 기세를 머금은 도가 설우진의 머리 위로 떨 어졌다.

바로 그때 설우진의 오른손이 천뢰 도의 도병에 연결되어 있던 수실을 거칠게 잡아챘다. 순간 갈 곳을 잃 고 방황하던 천뢰도가 벼락처럼 호 선을 그리며 적랑대원의 뒷덜미로 날아들었다.

서걱.

섬뜩한 파륙음과 함께 천뢰도는 적 랑대원의 목을 갈랐다. 설명은 장황 하지만 이 일련의 상황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펼쳐졌다.

이후 설우진은 소리를 쫓아 적랑대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다수 로 붙었으면 상당히 힘겨웠을 상대 들이었지만 하나씩 상대하다 보니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숨통을 끊 을 수 있었다.


“이것들이 어디까지 쫓아간 거야?”

태찬월은 피 묻은 면도를 털어내며 사위를 둘러봤다. 그의 앞에는 잘 저며진 북리강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태찬월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북 리강의 근맥을 하나씩 끊어 놨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태찬월이 단전만 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더 놀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북리강의 입장에선 그 사실이 별반 위로가 되질 않았다. 어차피 살아 돌아가기는 힘들다 판 단한 것이다.

한데 거기서 태찬월은 더 공격을 이어 가지 않았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냐?”

북리강이 힘겹게 바닥을 기며 소리 쳤다. 그의 두 눈은 원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뭘 그렇게 열을 내? 살려 주겠다 는데.”

태찬월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떠 올리며 뻔뻔스럽게 말을 지껄였다. 북리강의 입장에선 머리가 거꾸로 설 상황이었다. 지금 그는 두 발의 근맥이 잘려 제자리에 기는 것 외에 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 다. 한데 이런 몸으로 어찌 산을 내 려간단 말인가. 숨통을 끊어 놓는 것보다 더한 악취미였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 놈 말을 듣는 거였는데………….”

북리강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설 우진의 말대로 상인을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처참한 꼴을 당하지 는 않았을 것이란 부질없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엔 꼴도 보기 싫었던 설우진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그때 태찬월이 정색하며 바닥 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거칠 게 찼다. 강한 힘에 튕겨 날아간 돌 은 수풀 사이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돌이 태찬월에 게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아까보다 더 강한 힘을 품고.

태찬월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돌 멩이를 피해 냈다. 돌멩이는 태찬월 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던 참나무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놈인가?’

참나무에 박힌 돌을 보고 태찬월은 청랑대의 일을 방해했다는 문제의 관도를 떠올렸다.

저벅저벅.

잠시 후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에서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 가 드리웠다.

“설우진…….”

북리강은 헛것을 본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순간 두 사람 의 시선이 교차했다.

“쯧쯧, 자신 있게 나서더니 꼴좋게 됐구나.”

“이, 이게 다 네 녀석 때문이다. 네 녀석이 다른 관도들을 빼돌리지 만 않았어도…”

“관도들이 다 왔으면 오히려 피해 만 더 커졌을 거다. 그건 놈들의 무 력을 직접 경험한 네 녀석이 더 잘 알 텐데.”

날 선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설우 진이 정곡을 찔렀다. 설우진의 말대 로 관도들이 모두 왔다고 해도 적랑 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무위 보다는 실전 경험이 문제였다.

사람을 죽여 본 자의 검과 죽여 보지 않은 자의 검은 확연히 다르 다.

전자의 경우 검 끝에 망설임이 없 다. 숨통을 끊고자 할 땐 확실하게 끊는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후자는 마지막 순간에 망설이게 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생사가 오가는 싸움에선 이 빈틈이 치명적으로 작 용했다.

“청랑대의 일을 방해했다는 그 애송이가 네놈이냐?”

태찬월은 면도를 가볍게 쓰다듬으 며 설우진에게 말을 건넸다. 새롭게 나타난 분풀이 대상에 적잖게 흥분 한 눈치였다.

‘저놈은 지난번에 학관으로 쳐들어 왔던 놈보다 눈빛이 더 마성에 젖었 잖아. 이거 쉽지 않겠는걸.’

설우진은 태찬월이 은연중에 뿜어 대는 마기에 살짝 긴장된 모습을 내 비쳤다.

마천의 무공은 마기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당연히 마기가 짙으면 짙을수록 무공의 위력도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태찬월은 마백풍보다 더 위험한 상대였다.

하지만 상대가 강하다고 위축될 설 우진이 아니었다. 그는 되레 투기를 발산하며 태찬월과 맞섰다.

“보아하니 나하고 나이 차도 그리 많이 나 보이지 않는데, 언제 봤다 고 반말이지?”

“호오, 넌 내가 무섭지 않은가 보지?”

“나보다 약한 상대한테 겁을 먹을 이유가 없잖아.”

“…….”

태찬월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주먹 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 애 송이다. 한데 대놓고 자신을 아래로 깔다니. 심중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에 마성이 그의 분노를 양분 삼아 폭발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두 눈은 빠르게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태가의 비전마공이자 백 팔천마공의 하나인 혈신무강이었다. 혈신무강은 마기를 강기처럼 응축 시켜 사용하는 무공으로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그 형태를 바꿀 수 있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적들과 싸운다 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말은 곧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이란 얘 기다.

“그 혓바닥부터 찢어발겨 주마.” 붉은 마기가 태찬월의 양손에서 한 쌍의 혈조로 분했다. 손끝에서 일렁이는 붉은 마기는 흉험한 살기를 풍 겼다.

쉬쉬쉭.

한 쌍의 혈조가 날 선 칼바람을 일으키며 설우진의 전면으로 짓쳐 들었다. 방어 따위는 생각지 않는 공격 일변도의 움직임이었다.

‘무식할 정도로 저돌적이군. 하긴, 미쳐 날뛰는 건 저놈들의 특기지.’ 

설우진은 재빨리 보법을 밟으며 가 슴으로 짓쳐 드는 혈조를 피했다. 일정한 궤적 없이 마구잡이로 달려 드는 공격인지라 야수안을 펼치고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아찔한 위기의 순간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혈조가 담고 있는 힘은 파괴적이었다. 살짝 스쳤을 뿐 인데도 옷깃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 고 어지간한 충격에는 티도 나지 않 는 설우진의 몸에 가는 혈선이 그어 졌다.

스치듯이 맞았기에 망정이지 정타 를 허용했다면 꽤나 위험했을 것이 다.

하지만 설우진은 혈조의 위협적인 공격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오 히려 어느 때보다 냉정한 눈빛으로 혈조의 움직임을 읽었다.

‘힘을 앞세운 공격은 그 궤적이 단 조로워지기 마련이야. 당장은 틈이 나지 않을지라도 참을성 있게 버티면 분명 기회가 올 거야.’

설우진은 아슬아슬하게 혈조의 공 격을 옆으로 흘려보내며 그의 움직 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간 거 지? 피하지만 말고 사내답게 정면에 서 맞붙어라.”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하시지. 싸움 이란 건 언제나 최후에 승리하는 쪽 이 진리인 거야. 어떤 식으로든 이 기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거지.”

설우진은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했 다. 이는 낭인으로 긴 세월을 살았 던 그에겐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낭인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그리고 돈과 실리는 한 몸이나 진배없다.

심리전에서 밀린 태찬월은 지나치 게 흥분했다. 이는 곧 혈신무강의 변화로 이어졌는데, 혈조가 한 자루 의 혈도로 바뀌었다.

태가는 사실 도법으로 일가를 이룬 곳이었다. 혈신무강은 그 뒤에 천주 로부터 얻을 것일 뿐 태가의 근간은 혈룡마도였다.

혈룡마도는 패도다. 예리함은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힘만큼은 마천 내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했다.

쉭쉭쉭.

혈도가 묵직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설우진의 숨통을 조여 왔다. 혈조 때와 달리 이번엔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터져 나갈 것이기에 설우진의 발놀림은 전보다 더 기민해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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