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5권 – 6화 : 황보 장로 (3)
황보 장로 (3)
간혹 사정을 모르는 신입 대원들 중에 그녀를 무시하며 시비를 거는 경우는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얼굴 이 박살 나서 의원으로 실려 나갔 다.
“월봉도 세다면서요. 그냥 일품점 에 가셔서 한 벌 사 주시면 되잖아 요.”
“나라고 안 사 주려고 했겠냐? 근 데 아무리 뒤져 봐도 마누라가 원하 는 옷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제남 지점이면 무한에 있는 지점보다 더 그 규모가 큰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마누라가 원하는 건 무슨 신수 한 정판이라 지점에서도 구할 수 없다 고 하더라.”
‘아, 그 한정판.’
설우진은 악불휘의 푸념을 듣고 자 신이 학기 중에 부업 삼아 만들었던 옷들을 떠올렸다. 서안 지점장에게 불티나게 팔렸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먼 제남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을 줄은 몰랐다.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동생, 제발 옷 한 벌만 만들어 줘. 동생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게.”
“진심이세요?”
“그렇다니까.”
“좋아요. 그럼 까짓거 한 벌 만들어 드리죠. 대신 아까 한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설우진은 악불휘의 간절한 청을 수 락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옷 한 벌 지어 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 었다. 이미 마음이 이는 대로 바늘 이 가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저 우직한 인간은 한번 자신의 입 으로 내뱉은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할 거야. 그럼 최소한 한 번은 날 위해 창우대를 써먹을 수 있 어.’
설우진의 두 눈이 의미심장한 빛을 발했다.
“이게 누구야? 창위 형이잖아!”
무리를 이룬 신입 관도들이 연무장 한편에서 열심히 수련에 임하고 있 는 여창위 앞에 멈춰 섰다.
그에게 알은체한 이는 무리의 대장 으로 보이는 앳된 외모의 소년이었 다. 육 척에 이르는 당당한 체구에 권법을 익혔는지 양쪽 팔이 기형적 이다 싶을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다.
“오, 오랜만이야, 민아.”
여창위가 어색한 얼굴로 황보민의 인사를 받았다.
“용케 황룡 학관에 들어왔네, 형 실력이면 입학 심사에서 떨어질 거 라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어. 노력하는 자세를 높 게 평가한다고 하셨거든.”
여창위는 어렵게 황룡 학관에 들어 왔다. 무공에 대한 재능은 함께 심 사를 치렀던 동기들에 비해 나을 게 없었지만 하고자 하는 열정이 남달 랐다.
“형,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리 비무 나 한번 할까? 예전처럼 실력을 겨 뤄 보는 거야.”
“그게, 학사님들의 허락을 받아야 해서……….”
“그거라면 걱정 마. 마침 이곳에 조부님이 와 계시거든.”
황보민은 오만한 얼굴로 비무를 강 요했다. 이에 여창위는 더 버티지 못하고 황보민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비무대에 마주 보고 섰다. 왼편에는 황보민이 자리 했고 오른편에는 여창위가 잔뜩 어 깨를 웅크린 채 서 있었다.
“자, 먼저 공격해 봐.”
황보민이 선심 쓰듯 선공을 권했 다. 여창위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 니 이내 주먹을 움켜쥐고 조심스럽 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창위는 황보세가의 권역 안에 자 리하고 있는 패주여가의 후예였다. 패주여가는 황보세가에서 전해지는 권법을 근간으로 세를 이뤄 왔던 터라 사실상 황보세가에 소속되어 있 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쉭.
여창위가 속도를 높여 황보민의 가 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 허 리를 가볍게 숙임과 동시에 두 주먹 을 연환해서 내뻗었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람. 황보세가 에서 파생돼 패주여가의 절기가 된 풍혼이었다.
하지만 황보민에게 풍혼은 산들바 람에 불과했다. 풍혼의 뿌리가 된 철왕권을 이미 대성한 상태였기 때 문이다.
황보민은 여창위의 주먹을 가볍게 흘려보내며 어깨로 그의 가슴을 두들겼다. 주먹을 내뻗은 뒤 생긴 작 은 빈틈을 노린 공격이었다.
퍽!
여창위의 신형이 뒤로 크게 밀렸 다. 황보민은 그 여세를 몰아 파상 공세를 펼쳤다. 황보세가의 무공은 여타의 권법과 비교해 속도가 느린 대신에 묵직했다. 한 대 한 대가 위 력적이란 뜻이다.
여창위는 두 사람의 몸이 맞닿을 때마다 휘청거렸다. 입술 새로 핏기 까지 내비치는 것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이, 이제 그만하자.”
여창위는 힘겹게 신형을 바로잡으며 비무를 끝내자 청했다.
“형, 이러면 곤란하지. 이제야 겨우 몸이 풀렸는데 어떻게 그만둬.”
“나 더는 못 버텨. 봐, 가만히 서 있는데도 두 다리가 떨리고 있잖아!”
“그건 형 사정이고. 난 계속할 테 니까 알아서 해.”
황보민은 여창위의 말을 가볍게 무 시했다.
“저대로 둬도 되는 걸까? 한두 대 만 더 맞아도 쓰러질 것 같아.”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니야. 괜히 밉보였다가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떻 게 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여창위를 보면서 관도들은 철저히 방관했다.
황보민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황보 세가가 두려운 것이다.
그사이 여창위는 배 속으로 파고드 는 황보민의 주먹을 맞은 뒤 그대로 비무대 위로 쓰러졌다.
“어떤 새끼야!”
설우진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눈앞에는 여창위가 옅은 신음 을 내며 누워 있었다. 온몸에 침이 박혀 있는 것이 상세가 꽤나 심각해 보였다.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몸 곳곳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들이 그 득했다.
“황보민이라고 이번에 수석으로 입 학한 신입 관도가 비무를 청했대.”
“단순히 비무를 했을 뿐인데 저 지 경이 됐다고?”
“그게 승부가 이미 난 상황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 대.”
“뭐야? 미친 새끼! 창위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었던 거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는데, 벽이 말로는 창위의 가문이 황보가 산하 에 있다고 했어.”
“쉽게 얘기해서 주인집 도련님이 하인의 아들내미를 갖고 논 거네?”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지. 근데 행여 성질대로 움직이진 마. 어제 이곳에 도착한 황보준 장로가 그 녀 석의 조부니까.”
조인창은 설우진에게 강한 어조로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그에게 조인창의 말이 귀 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앞장서”
“우진아, 제발 참으라니까. 손을 보 더라도 황보준 장로가 간 뒤에 …..”
“누가 대놓고 두들겨 패겠대? 나도 그 정도는 머리는 가지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하려고?”
“놈이 써먹은 좋은 수법이 있잖아.”
설우진은 황보민이 여창위에게 한 그대로 되갚아 줄 요량이었다. 비무 는 상대가 어느 정도 다쳐도 용인되 는 싸움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 존심이 강한 황보민이 쪽팔려서라도 쉽게 비무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 계 산도 깔려 있었다.
“비무를 거부하면 어쩌려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은 절대 거절 못 해. 제 놈이 최고인 줄 알 “거든.”
설우진은 곧장 일 년 차 관도들이 수업하는 교실로 향했다.
“선배, 지금 나보고 비무를 하자고 한 거예요?”
황보민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설우진을 쳐다봤다.
그는 설우진을 몰랐다. 그저 가슴 에 새겨진 지地 자를 보고 선배라 불렀을 뿐이었다.
“실은 예전부터 강호에 명성이 자 자한 황보가의 권법을 견식해 보고 싶었거든.”
‘호오, 이거 먹잇감이 제 발로 굴 러들었네. 창위 그놈은 맷집이 약해 서 때리는 맛이 덜했는데, 이 녀석 은 근육이 탄탄해 뵈는 게 손맛이 제법 있을 것 같아.’
황보민은 구미가 당겼다.
“전 비무라고 해도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데, 괜찮겠어요?”
“하하, 그런 건 걱정 마. 내가 보다시피 맷집 하나는 타고났거든.”
“좋아요. 그럼 내일 연무대에서 보죠.”
황보민이 비무를 수락했다.
“그래, 내일 보자.”
설우진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 섰다. 그런데 돌아선 그 순간 그 미 소는 진한 살기로 돌변했다.
“선배님, 마천 놈들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무슨 꿍꿍이 속인지는 모르겠네만 난주에 틀어박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네.”
“흐음, 그럼 현재 섬서 지역의 방 비는 어떻습니까?”
“섬서 지부를 중심으로 열두 개 문 파의 정예 오백 명이 길목을 지키고 있네. 어떤 길로 오든 우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걸세.”
사마무기와 황보준은 마천의 최근 동향에 대해 자세히 얘기를 나눴다. 대화는 황보준이 묻고 사마무기가 답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창우대는 언제 움직일 셈인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천양으로 향 할 생각입니다.”
천양은 감숙과 섬서를 잇는 관문 도시로 섬서의 전력이 가장 많이 집 중되어 있었다. 그곳이 뚫리면 섬서 로 통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창우대는 모두 데려가는 겐가?”
“마천 놈들이 행여 이곳을 노릴지 모르니 일부는 남겨 놓을 생각입니 다”
“허허, 괜한 걱정을 하는구먼. 우리 학사들 모두 일당백의 실력자들이 네. 창우대의 도움이 없어도 방비가 가능하니 쓸데없이 전력을 분산시키 지 말고 모두 데려가게.”
사마무기는 황룡학관의 학사들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보였다. 하지만 황보준은 영미덥지 않은 얼굴이었 다.
‘여기 있는 학사 놈들이라고 해봐 야 중앙에서 밀려난 낙오자들뿐인 데, 무슨 수로 마천 놈들을 막겠다 는 거야?’
낙오자.
외부에서 바라보는 황룡 학관 학사 들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들 대부 분은 마천 쟁투가 끝난 직후 논공행 상에서 밀려 한직이나 다름없는 황 룡 학관으로 발령받았다.
여러 가지 그럴싸한 이유들이 붙었 지만 실제 이유는 그들이 약하다는 데 있었다.
학사들의 무위는 대부분 일류 끝자 락에 걸려 있었다. 결코 낮은 수준 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수로 치 기에는 조금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선배님의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맹 주님의 전언이 계셨습니다, 미래의 동량들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어른들이 할 일이라고.”
“흠, 맹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면 따라야지. 알았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사마무기는 순순히 자신의 뜻을 꺾 었다. 맹주의 말이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믿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이걸로 민이의 안전은 도모할 수 있겠군. 누구를 남기면 좋을까? 이 왕이면 내 입김이 통하는 놈이 좋을 듯싶은데…………..’
황보준은 머릿속으로 창우대의 면 면을 떠올렸다. 그러고 이번 일을 맡길 최고의 적임자를 찾아냈다.
사마무기와의 독대를 마치고 황보준은 창우대가 머물고 있는 연무장 으로 향했다. 그의 등장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창우대원들이 앞다퉈 고 개를 숙였다.
황보준은 환한 미소로 그들의 인사 에 화답하며 십+이라 쓰인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 는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양손 검지 로 땅을 짚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 었다.
“철기, 자넨 한결같군. 그리도 강해 지고 싶은가?”
“후우, 무사가 강해지고 싶은 것이 야 타고난 본능이 아니겠습니까. 한 데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맹철기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 으로 닦아 내며 황보준과 눈을 맞췄 다.
그는 창우대주 휘하에 있는 열 명 의 조장 중 하나였다.
창우대는 군대 조직처럼 백명씩 열 개의 조로 움직였다. 다수의 인 원을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조 치였다.
“실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왔네.”
“장로님께서 직접 걸음하셨을 정도 면 꽤나 중한 일인가 봅니다?”
“내게는 중한 일이지. 내일 이곳을 떠나기 전에 창우대주에게 지시해 한 개조를 이곳에 남길까 하네.”
순간 맹철기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곧 있을 마천과의 만남에 크 게 고무돼 있었다. 마천 놈들을 때 려눕히고 당당히 실력을 인정받겠다 는 계산이 서 있었던 것이다. 한데 이곳에 남으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꼭 저희 조가 남아야 하는 겁니 까?”
맹철기의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자네 말고는 믿고 부탁할 만한 사 람이 없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로님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 드 려야죠.”
“후훗,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한 다니까. 얼마 전에 내 손자 녀석이 황룡 학관에 입학했네. 그냥 입학도 아니고 수석 입학이지. 한데 귀하게 만 자라서 철모르고 날뛰는 경우가 종종 있네.”
“하면……?”
“자네가 주변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 아이를 좀 지켜 줬으면 하네.”
“이 안에서 위험할 일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