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품 고난 (1)
“놈들에게 완전히 당했습니다. 우 리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여 론이 퍼지면서 중원 전역에서 우리 옷에 대한 불매 운동이 일고 있습니 다.”
“허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지 점장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저희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 온 곳들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최근에 문을 연 곳들은 나빠 진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노골적으로 계약 파기 의사를 비쳐 오고 있습니 다.”
침중한 분위기가 감도는 집무실 안, 설무백과 고간은 무거운 표정으 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살인 사건 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고간에게 배상금을 받아 갔던 조선 상단의 행수 이성철이 시체로 발견 되고 그 배후로 일품점이 지목된 것 이다.
사실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 지만 문제는 여론이다.
사람들은 관부의 조사가 마무리되 지 않았는데도 설가상단과 일품점을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악의적인 소문까지 일파만 파로 퍼져 나갔고 그 여파는 고스란 히 일품점 매출의 손실로 이어졌다. 성장세가 조금 꺾이기는 했어도 꾸 준히 매출이 느는 기조였는데 그 사 고가 터진 이후로는 매출이 급전직 하했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일단은 여론을 잠재우는 게 급선무입니다.”
“무슨 수로 사람들의 입을 막는단 말인가?”
“그, 그건…….”
설무백의 반문에 고간은 마땅히 할말을 찾지 못했다.
한두 사람의 입이라면 강제로라도 틀어막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들이 막아야 할 입은 수천수만에 달 했다.
“관부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 까?”
설무백이 이마를 감싸 쥐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이틀 전에 기별을 넣었는데 계속 기다려 보라고만 하더군. 아무래도 그쪽에서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듯 하네.”
“아니,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입 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그들에게 얼 마나 많은 편의를 제공했는데!”
고간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 다.
그의 말대로 일품점은 관부에 많은 편의를 봐줬다.
그 대표적인 것이 관인들의 의복을 새로 맞춰 주거나 수선해 주는 일이 었다.
한데 여기서 그들이 간과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었다. 그들이 편의를 제공했던 무한 현청의 수장이 적잖 게 돈을 밝힌다는 점이었다.
설무백은 단 한 번도 현령 개인에 게 돈을 건넨 적이 없었다, 여러 번 독대하는 자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우리 쪽에서 따로 사람을 고용해 조사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소득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고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있는가?”
많이 답답했는지 설백이 반색하 며 되물었고 이에 고간은 하오문을 언급했다.
그리고 구린 일을 조사하는 데에는 그들보다 나은 세력이 없다고 했다. 설무백은 하오문을 이용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워낙 급 박한지라 결국 그 제안을 수용했다.
“득아, 돈 필요하다고 했지?”
“응, 어디 괜찮은 자리 났어? 막내 녀석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다음 달치 수업료를 모두 집에 부쳐 줬거 든.”
“그럼 나랑 일 하나 같이하지 않을래? 그냥 머릿수만 채워 주면 되는 데 보수가 꽤 세.”
풍야시전의 뒷골목, 상반된 외모를 지닌 두 명의 청년이 얼굴을 마주하 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고향에 서 나고 자란 절친한 친구 사이였 다.
“보수가 얼만데?”
얼굴에서 강한 인상을 풍기는 청년 공손득이 두 눈을 희번득거리며 물 었다.
“두당 은전 서른 냥.”
“그렇게나 많이? 혹시, 사기 아니야?”
“내가 모시는 형님이 소개해 준 일이야. 너도 전에 한번 봤잖아, 그 형님이 날 얼마나 챙기는지.”
길만세가 순박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좀 불안한데…… 괜히 은 전을 서른 냥이나 줄 리가 없잖아.”
“나도 처음엔 그게 걱정돼서 형님 에게 따로 여쭤봤는데 덩치들이 앞 에서 판을 벌여 놓으면 우린 그냥 그 뒤에서 적당히 손발만 맞추면 된 대.”
‘흑도패들의 구역 싸움인 건가?” 공손득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도 소싯적에는 주먹 좀 썼다. 좀 과장해서 뒷산의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다 옛일이다. 지금 그 는 서원에 다니고 있다. 소작농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부모님이 장남의 입신양명을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이 다.
하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무한 시내에 자리한 서원의 비싼 학 비가 문제였다.
처음 몇 달은 그간 모아 놓은 돈 으로도 충당이 가능했지만 그 돈이 다 떨어진 뒤에는 수업료를 벌기 위 해 일을 해야 했다.
다행이 일감은 많았다. 문제는 일 의 강도에 비해 손에 들어오는 돈이 턱없이 적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일하면서도 항상 돈에 쪼들렸다. 특히 이번처럼 뜻하지 않은 지출이 생겼을 경우에 는 몸을 반으로 쪼개서라도 일을 더 해야 했다.
‘그래, 공손득, 네가 지금 찬밥 더 운밥 가릴 처지냐! 사람을 죽이는 일만 아니면 뭐든 해야지!’
짧은 고민 끝에 공손득은 길만세와 함께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길만세는 뛸듯이 기뻐하며 말을 이 어 갔다.
“잘 생각했어. 이런 돈벌이는 정말 흔치 않아.”
“고맙다. 그래도 어려울 땐 친구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하하, 그렇지. 우리 앞으로도 자주 보자. 어려운 일 생기면 언제든 얘 기하고.”
길만세는 공손득의 등을 가볍게 두들기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데 왜일까, 그의 순박한 미소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정오 무렵, 한산하던 일품점 본점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들 한 손에 위협적인 몽 둥이를 쥐고 있는 것이 좋은 의도로 모인 것은 아닌 듯했다.
“너희들도 소문을 들어 잘 알 것이 다, 이곳 일품점의 주인이 최근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한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여러 해 동안 풍야시전에서 패악을 부렸던 흑도패의 주인이 일품점주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무리의 한가운데 구릿빛 피부의 사 내가 눈 밑을 가로지른 흉터를 들썩 이며 목청을 높였다.
그의 이름은 황달호, 한때 풍야패 와 대립각을 세웠던 진호패 출신으 로 최근 다시 세력을 규합해 야금야 금 풍야시전에 손을 뻗고 있었다. 과거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 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설우진에게 있었다.
지난번에 무한에 내려왔을 때 그는 반란을 획책했던 막철을 죽여 버렸다.
뭐, 그의 입장에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막철이 죽으면서 풍 야패의 조직력에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했던가.
막철이 빠지면서 풍패는 삐거덕 거리기 시작했다. 호걸륜이 뒤늦게 나서서 수습해 보려 했지만 그 바닥 을 떠난 지 오래된 그의 말은 좀체 먹히지 않았다.
“이 황달호, 오늘 풍야시전에서 극 악무도한 무리를 몰아낼 것이다. 나와 뜻을 함께하고자 한다면 모두 내 뒤를 따르라!”
황달호는 일품점과 풍야패를 하나 로 싸잡아 명분을 세웠다.
흑도패치고는 제법 약은 수였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일품점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진 것이다.
황달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품점 안으로 부하들을 끌고 들어 갔다.
와장창 쿵쾅.
건물 안으로 들어온 황달호는 거침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가장 먼저 날벼락을 맞은 건 입구 쪽에 세워져 있던 목각 인형이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몽둥이에 목각 인형의 목이 부서지고 팔이 떨어져 나갔다.
비명도 지를 줄 모르는 목각 인형 은 그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손님, 왜 이러십니까?”
사색인 된 점원들 사이로 장씨가 용감하게 나섰다, 물론 심장은 사납 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당 장 점주 내려오라고 전해해, 이 황 달호가 그 잘난 낯짝 좀 보러 왔다 고!”
“총점주님을 뵈러 오신 거면 그 몽 둥이부터 내려놓으시지요.”
“왜? 이 거적때기를 팔지 못할까 봐 불안해?”
황달호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몽둥이 끝으로 들어올렸다. 그의 발 에 사납게 짓밟힌 탓인지 옷은 구깃 구깃해진 건 둘째치고 흙먼지가 잔 뜩 묻어 있었다.
“오, 옷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상관없잖아. 난 이곳에서 얌 전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점주 불 러와.”
황달호는 말로는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몽둥이를 쥔 오른손은 진열대를 노리고 있었다.
진열대에는 곱게 접힌 저고리들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데 그 위로 몽둥이 벼락이 떨어졌다.
쾅!
진열대가 부서지며 저고리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 모습에 장씨는 순간적으로 이성 을 잃고 황달호를 거칠게 밀쳤다. 매장의 옷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 겨 왔던 그이기에 지금의 상황을 참 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밀려난 건 황달호가 아니라 그였다.
“이 새끼, 더럽게 말 안 듣네. 그 래, 네놈이 아니면 다른 놈을 보내면 되지. 넌 저기 구석에 처박혀 있어.”
황달호가 장씨의 머리를 가볍게 젖 힌 뒤 옆으로 밀쳤다.
우당탕!
장씨의 몸이 진열대 위로 나뒹굴었다.
부딪친 충격이 컸는지 축 늘어진 머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지?’
공손득은 황달호의 등 뒤에서 인상 을 굳혔다.
큰돈이 되는 일이라기에 그는 당연 히 흑도패들 간의 다툼 정도로 예상 했었다. 한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 는 건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절대 받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세야.”
공손득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라도 얘기하고 빠질 요량이었 다.
한데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 붙어 있던 길만세가 보이질 않았다.
‘설마?’
그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전에도 이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학관에 입학하기 전에 있었던 일인 데 그때도 길만세의 부탁으로 싸움 판에 끼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상대 쪽의 머릿수가 배 이상으로 많았지만 그는 친구의 부탁이기에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계속 싸워 나갔다.
한데 동료들을 데려오겠다던 길만 세는 싸움이 다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타다닥.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져 갈 무 렵, 아래층의 소란을 접한 설무백과 고간이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황달호는 원하는 이가 나타났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목청을 높였다.
“어이, 설 대인, 나하고 얘기 좀 하지!”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설무백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직원들과 바닥 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두 눈에 담 았다.
적잖게 마음이 상했는지 그의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잠시 후 그는 계 단을 내려와 황달호와 마주 보고 섰 다.
“호오, 소문과는 영 딴판이네, 천생 샌님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무섭게 노려볼 줄도 알고.”
“불청객과 길게 얘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니 뭣 때문에 이 난리를 피웠는지 얘기하거라.”
“아이고, 말투에 잔뜩 날이 섰네. 뭐, 좋아. 나도 입 아프게 떠들어 대는 거 싫어하니 바로 본론을 얘기 하지. 그쪽에서 관리하고 있는 풍야 시전의 지분들을 우리 쪽에 좀 넘겨 줘야겠어.”
황달호가 지저분한 속내를 드러냈 다.
이번 일은 의뢰를 받은 것도 있지 만 실제로는 잿밥을 노린 것이다. 진호패의 일원으로 일할 당시, 그 의 눈에 비친 풍야시전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조금만 긁어내도 돈이 콸콸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한데 풍패가 진호패를 밀어내고 풍야시전을 장악하면서 그 돈줄이 꽉 막혀 버렸다.
설우진이 적당히 먹으라며 상인들 에게 거두는 세율을 대폭 낮췄기 때 문이다.
그 세율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황달호의 입장에선 그 노다 지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 지분만 넘기면 조용히 물러나 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우리가 당 신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도 있 어. 어차피 풍야시전에서 벌어들이는 건 당신한테 푼돈이잖아.”
“싫다면 어찌하겠느냐?”
“내 뒤에 모여 있는 놈들 안보여? 내가 명령 한 번만 내리면 이곳이 피바다가 되는 건 순식간이 야.”
황달호가 몽둥이를 매만지며 섬뜩 한 살의를 뿜어 댔다.
하지만 설무백은 굴복하지 않았다.
“내 가게를 지키고자 애꿎은 상인 들을 도탄에 빠뜨릴 순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