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10화 : 장강수로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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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8권 – 10화 : 장강수로채 (3)


장강수로채 (3)

“네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느냐?”

고수태의 주위로 혈운이 일었다. 하우연은 그 기세에 위축되지 않고 흑랑사자에 확고한 믿음을 표했다. 

“좋다. 그럼 이곳에서 하루만 더 기다리겠다. 하지만 내일도 놈이 이 곳을 지나지 않는다면 너의 목숨은 내 것이 될 것이다.”

고수태가 혈운을 거두며 돌아섰다. 온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린 하우연은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고 관도 너머를 바라봤다. 그 리고 간절히 바랐다, 흑랑사자가 설 우진을 이곳으로 데려오기를.


“어지간하면 그만 버티고 입을 열 지. 그렇게 충성한다고 네놈들한테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유유히 흐르는 장강 위로 한 척의 상선이 힘차게 노를 저으며 나아갔 다. 그리고 배에는 설우진과 그 일 행이 낯선 얼굴을 한 사내와 마주하 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중반쯤 됐을까? 사내 의 외모는 평이했다. 당장 길을 나 서면 그와 비슷한 얼굴을 쉬이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한데 평이한 외모와 달리 그의 눈 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입이 무거운 건 누란국에 왔던 놈 들하고 똑같네. 하여간 이것들은 말 로 해서는 들어 먹질 않는다니까.” 

설우진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 가 일었다.

그가 눈앞의 흑랑사자와 조우한 건 이른 새벽이었다. 육로로 이동하기 위해 근처 마방을 찾아가던 길이었 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 졌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봤더니 누란 에서 조우했던 흑랑사자가 떠올랐 다. 그제야 꼬리가 붙었음을 인지한 설우진은 역으로 흑랑사자를 유인했 다, 수풀이 우거진 근처의 숲으로. 숲에 도착하자 그는 귀식대법으로 숨소리를 죽이고 이어진 은신술로 자취를 감췄다.

갑자기 눈앞에서 그가 사라지자 뒤 따르던 흑랑사자가 당황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짧은 순간 설우진은 은신술을 풀고 벼락처럼 뛰어나가 흑랑사자의 면상을 후려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기습이라 피하고 말고 할 새 가 없었다.

흑랑사자를 제압한 그는 육로를 이 용하려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이후 급하게 객잔 주인을 통해 배를 구했다. 다행히 오전 중에 나루를 뜨는 상선이 하나 있었다.

설우진은 제자를 데려오겠다는 투 권을 남겨 둔 채 흑랑사자를 데리고 배에 올랐다.

“네놈들은 어지간한 고문에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겠지. 하지만 여 긴 어떨까? 고자가 아닌 이상에야 버티기 쉽지 않을걸.”

설우진이 흑랑사자의 입을 열기 위 한 최후의 수단으로 양물에 뇌기를 주입했다. 실처럼 뽑아낸 뇌기는 옷 을 파고들어가 흑랑사자의 양물을 휘감았다.

“크아악!”

궁악비의 거친 발길질에도 신음 한번 내뱉지 않던 흑랑사자의 입에서 괴로운 듯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작 은 자극에도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 는 곳인데 천지간에 가장 강하다는 뇌기가 들어갔으니 그 충격이 오죽 할까.

잠시 후 설우진이 뇌기를 거둬들였 다. 흑랑사자는 침을 질질 흘리며 멍한 얼굴로 설우진을 바라봤다. 

“이제야 좀 눈에 독기가 풀렸네. 그래 날 잡겠다고 몇 놈이나 붙었 지?”

“…….”

“이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뭐,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아주 작정하 고 놀아 볼까?”

설우진이 다시 손끝에 뇌기를 끌어냈다. 그걸 본 흑랑사자는 반사적으 로 사타구니를 양손으로 감쌌다. 사실상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 났 다. 인위적으로 감정을 지워 낸 흑 랑사자가 공포를 느꼈다는 건 보통 의 인간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했다. 결국 흑랑사자는 순순히 모든 걸 털어놨다, 하우연의 존재와 동행하 고 있는 귀마들의 숫자까지.

‘이거, 아무래도 배를 잘못 탄 것 같은데. 뭔 놈의 귀마가 하나도 아 니고 다섯이나 이놈한테 붙어.’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궁악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우진 하나를 잡기 위해 무려 다섯의 귀마가 움직였으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과장인 줄로 만 알았던 설우진과 마천의 악연은 진짜였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이거 육로로 갔으면 정말 위험했 을 뻔했네. 한둘이면 몰라도 다섯은 확실히 부담스러운 숫잔데……….” 

궁악비 못지않게 설우진도 귀마의 숫자를 듣고 심장 한 구석이 떨렸 다.

귀마들은 기본적으로 초절정에 다 다른 실력자들이다. 아무리 그에게 개세마공인 벽뢰진천이 있다고 해도 다수와 정면으로 맞붙는 건 위험했 다.

“대체 놈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겐가? 쌍룡맹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전력인 귀마를 다 섯이나 뺀 걸 보면 어지간히 미운 털이 박힌 듯한데.”

궁악비가 넌지시 물었다. 이에 설 우진은 태연한 얼굴로 그간 마천과 있었던 일들을 순순히 털어놨다. 

“그러니까, 마천의 신물인 혈옥불 을 빼돌린 것으로도 모자라 놈들의 전위대 중 두 곳을 화끈하게 물 먹 였다?”

“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궁악비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 다. 혈옥불이야 어찌 운이 닿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해도 청랑대와 적랑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건 현실적으로 믿기가 힘들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면 마천이 미쳤 다고 귀마를 다섯이나 제게 붙였겠습니까?”

“그, 그야…….”

“암튼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좋을 겁니다, 언제 어디서 마천 의 마수가 뻗쳐올지 모르니.”

설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경각심을 일깨웠다. 궁악비도 낭왕 자리를 거 저 꿰찬 것은 아니었기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부터 경계했다. 넓게 펼쳐지는 기감, 다행히 수상쩍은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이대로 무한까지 가는 건가?”

궁악비가 기감을 거두며 물었다. 설우진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 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화를 이 었다.

“놈들이 우리의 목적지를 알고 있 는 이상 무한에 내리는 건 위험합니 다. 하니 무한을 그대로 지나쳐 동 호 인근의 약주에 배를 세울 것입니 다.”

“흠, 과연 약주라고 안전할까?”

“놈들은 소수로 움직이고 있습니 다. 넓은 지역에 인원을 배치하기는 힘들 겁니다.”

날카로운 판단이었다.

흑랑사자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적들의 숫자는 여섯, 어디서 배를 세울지 모르는 상황에서 약주까지 인원을 분산시키기는 현실적으로 불 가능했다.

“그럼 최소한 이 배를 타고 있는 동안은 푹 쉬어도 되겠군?”

“그거야 모를 일이죠, 이 배에는 우리만 타고 있는 것이 아니니.”

설우진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 졌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말 이 끝나기 무섭게 뱃전에서 북소리 가 연달아 세 번 울려 퍼졌다.

배에서 북을 세 번 치는 건 적이 쳐들어왔다는 신호였다.


부우웅, 부우웅.

상선 주위로 세 대의 배가 모여들 었다.

선체가 날렵하게 빠져서인지 가볍 게 내젖는 노질에도 그 움직임이 무 척이나 날랬다.

상선의 선주가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 선원들을 독려했지만 짐칸에 많은 짐을 실은 탓에 좀체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사이 상선을 포위한 배에서 무장 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가슴에는 청호라는 글귀와 함께 호 랑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갈고리를 던져라.”

독안의 사내 감여가 큰 소리로 외 치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대의 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갈고리가 날 아들었다. 상선의 호위무사들이 다 급히 검을 뽑아 들고 갈고리를 쳐내 려 애썼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 다.

결국 수십 개의 갈고리가 상선에 틀어박혔다.

“광호대는 내 뒤를 따르라!”

감여가 기세 좋게 칼을 뽑아 들고 상선과 연결된 줄 위로 몸을 내던졌 다.

줄의 길이가 상당함에도 그의 움직 임엔 거침이 없었다.

타다닥.

감여를 필두로 수십 명의 무사들이 상선으로 넘어왔다. 그들은 상징처럼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머리띠를 이마에 걸치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선주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익환이, 오랜만이야. 한동안 뜸해 서 장사를 접었나 했는데 용케 다시 배를 끌고 나왔네. 그동안 벌어 놓 은 재산이 제법 되나 보지?”

감여가 선주인 장익환에게 손을 흔 들며 알은척했다. 하지만 장익환은 그 인사에 화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불과 석 달 전, 감여가 이끄 는 청호채에 배를 빼앗겼다.

오랫동안 장강의 뱃길은 평화로웠 다. 십 수 년 전, 쌍룡맹이 마천에 협조한 장강 십팔 수로채를 쓸어버린 덕이었다.

한데 최근에 그 후신을 자처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그 세는 전성기 의 장강 십팔 로수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흉악함 만큼은 꼭 닮 아 있었다.

장강을 오가는 상단들이 몇 번이나 그들의 전횡을 맹에 알렸지만 소용 없었다. 마천이라는 대적이 눈앞에 있는데 누가 후방의 수적들 따위를 신경 쓰겠는가.

때문에 죽어나는 건 장익환과 같은 중개상들이었다.

“우리 괜히 전처럼 힘쓰지 말자고. 제법 실력 좋은 호위들을 고용한 모 양인데 그래 봐야 우리 광호대의 상대는 못 돼.”

감여가 뒤쪽에 늘어서 있는 광호대 를 가리켰다.

광호대는 일개 수적이라고는 믿기 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무력을 지니 고 있었다. 특히 대나무처럼 가늘고 길게 생긴 광호대주 목가유는 채주 인 감여보다 그 무위가 더 뛰어났 다.

“이 배는 절대 넘겨줄 수 없다.” 

광호대의 위협적인 기세에도 장익 환은 배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 를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게 이 배는 그의 전부 였다. 지난번에 배를 빼앗기고 그간 에 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해 마련한 것이 바로 이 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쯧쯧, 쓸데없이 고집 부리기는. 뭐, 할 수 없지, 죽여 달라면 죽여 줄 수밖에. 대신 이것 하나만 명심 해, 너 하나 때문에 애꿎은 수십 명 의 일꾼들이 죽게 됐다는 걸.”

감여가 가볍게 혀를 차며 광호대에 눈짓을 보냈다.

선두에서 목가유가 긴 혀로 톱날처 럼 생긴 도신을 핥으며 장익환의 앞 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사용하는 병기는 거치도였다.

거치도는 날이 짐승의 이빨처럼 갈 려 있어 일반적인 모양의 칼보다 살상력이 더 뛰어났다.

“어디부터 썰어 줄까?”

목가유가 거치도를 세워 장익환의 몸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이에 호위 무사들이 장익환의 주위를 둘러쌌 다.

어차피 항복한다고 해도 살려 줄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럴 바에 야 고용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게 낫 다고 판단했다.

잠시 후 목가유를 필두로 한 광호 대와 장익환의 호위들이 맞닥뜨렸 다. 전체적인 머릿수는 비슷했지만 무공의 격이 달랐다. 호위들이 휘두 르는 검은 밋밋한 데 반해 광호대가 휘두르는 칼은 은은한 도기를 머금고 있었다. 서걱.

동시다발적으로 검신이 잘려 나갔 다. 호위들의 얼굴에 절망과 두려움 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그런데 광호대의 칼이 호위들의 몸을 베고 지나가려는 찰나, 허공을 격하며 가 느다란 물체가 날아들었다.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기에 광호대는 한발 뒤로 물러서며 그 물 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티티팅.

날카롭게 터져 나오는 쇳소리, 광 호대의 무사들이 그 소리를 좇아 부 지런히 눈을 움직였다.

‘아니, 저건!’

모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칼이 뒤로 젖혀질 정도로 강한 충격을 전 해줬던 물건의 정체는 놀랍게도 나 무젓가락이었다.

일순간 분위기가 반전됐다. 시종일 관 여유가 넘치던 감여의 얼굴에 처 음으로 긴장감이란 생소한 감정이 드러났다.

“장 선주, 오늘 여러모로 날 놀라 게 하는군.대체 누굴 태운 거지? 이만한 실력자를 돈 주고 고용하기 는 쉽지 않았을 텐데?”

감여가 물었다.

“나도 그분들에 대해선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네놈들이 잠자는 호랑이의 콧수염을 건드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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