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1화 : 절반의 성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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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9권 – 1화 : 절반의 성공 (1)


절반의 성공 (1)

“후우후우.”

설우진은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늘게 몰아쉬었다.

그는 황룡학관을 빠져나온 뒤로 쉬지 않고 내달렸다.

등 뒤에서 맹수가 쫓아오는데 쉴 여유 따윈 없었다.

‘정말 미친놈처럼 따라붙는군. 뭐, 이쪽에서도 원했던 바지만.’

등 뒤에서 진한 살기가 전해졌다. 살기를 풍겨 대는 이는 흑랑대주 고금추였다.

그는 황룡 학관에서부터 줄곧 설우 진의 뒤만 쫓았다. 마치 ‘난 한 놈 만 조진다.’는 듯이.

하지만 그렇게 쫓고도 그는 제대로 손맛을 보지 못했다.

설우진이 공격을 할라치면 귀신같 이 눈치를 채고 피해 버렸기 때문이 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요리조리 잘 도 피해 가는구나. 하지만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결국 네 놈들은 우리 손에 잡히게 되어 있 다.”

고금추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그는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마천 내에서도 천주를 제하고는 자 신과 견줄 자가 없다고 공공연히 떠 들고 다닐 정도였다.

한데 오늘 그 고고한 자존심에 제 대로 금이 갔다.

황룡 학관을 나선 이후 그는 줄곧 설우진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 고 있었다.

놈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얼굴을 잡아채 목을 뽑 아 버리고 싶은데 공격은 번번이 빗 나가기만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설우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상대에게 등을 내보인 상태에서 공격을 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 니었다.

고금추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설우진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빌어먹을, 아직도 멀었나?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데.’

설우진은 고금추가 공격을 해 올 때마다 급격하게 방향을 전환하거나 몸을 틀어야만 했다.

때문에 그의 체력은 급속도로 소진 되고 있었다.

그 여파가 가장 직접적으로 와 닿 는 곳은 두 다리였다.

바닥을 박찰 때마다 종아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지금은 악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한계가 찾아올 터. 한시라도 빨리 고월장에 닿아야 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하늘도 알아준 것일까?

저 멀리 고장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잔뜩 일그러졌던 설우진의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끊어질 듯 아파오는 두 다리를 이끌고 설우진은 고월장을 향해 마 지막 질주를 감행했다.

고금추는 사납게 얼굴을 구기며 그 뒤를 맹렬히 쫓았다.

“대주님, 굳이 놈들을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흑랑대 선에서 모두 정리가 될 듯한데?”

앞서가는 흑랑대를 보며 맹고두가 요굉에게 물었다.

맹고두는 요굉의 오른팔로 백랑대 내에서는 소위 머리로 통했다. 생각 이란 걸 할 줄 안다는 얘기다.

“고두야, 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 냐?”

“뭐가 말입니까?”

“놈들이 도망치는 방향을 봐라. 어 째서안 밖이 아니라 더 안쪽을 향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혹시 놈들이 매 복에 이은 기습을 유도하려는 게 아닐까요, 정면 대결로는 우리와 맞붙어 승산이 없으니?”

맹고두의 추론은 꽤 그럴싸했다. 한데 요굉은 그게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근거가 있어 서라기보다는 오랜 경험에서 오는 일종의 감 같은 것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흑랑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네 말대로 진짜 매복하는 병력이 있 다면 추이를 봐서 흑랑대를 돕는 다.”

“흑랑대의 기세를 꺾어 놓을 심산 이시군요?”

맹고두는 두툼한 눈을 끔뻑거렸다. 기실 마천이라는 한 우리에 묶여있지만 전위대와의 사이는 그리 좋 은 편이 아니었다.

힘의 격차에 따라 천 내에서의 대 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흑랑대와 백랑대는 다른 전위대들 에 비해 모든 면에서 풍족한 지원을 받았다. 그건 그들이 그만큼 강하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도 미묘한 격차는 존재했다.

백랑대는 흑랑대에 비해 머릿수는 많았지만 고수라 불릴 만한 이가 적 었다.

이는 그들이 맡고 있는 역할에서 비롯된 바가 컸는데 흑랑대의 경우 소수 정예로 암습을 해야 하기에 기본적으로 대원들의 수준이 높았다.

백랑대원의 평균적인 무력치와 비교 하면 반 수 정도의 차이였다.

이 때문에 고금추는 노골적으로 백 랑대를 한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요굉이 몇 번이나 발끈해 경고했지 만 입을 조심하는 건 그때뿐이었다.


“정말 그자가 올까요?”

궁악대주 염사독이 맞은편에 자리 한 위태성에게 물었다.

위태성은 현무문의 수신무위인 진 혼대의 수장으로 겉모습은 검 하나 쥐지 못할 정도로 유약해 뵈지만 그 의 검술은 현무문 내에서도 따를 자가 없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이를 방증하듯 턱수염을 매만지는 그의 손가락은 나무토막처럼 거칠고 두꺼웠다.

“그 서찰에 적힌 글씨는 분명 가렴 이의 것이었네.”

위태성이 담담한 어투로 대꾸했다. 이때 옆에서 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던 호군천이 두툼한 입술을 떼며 반문했다.

“대필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굳이 대필로 가짜 서찰을 만들어 우리를 대비케 하는 게 그나 통천문 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그건…….”

호군천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 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런 짓을 벌 여 통천문이 얻을 수 있는 게 없었 다.

세 곳의 수신무위가 모여 있는 이 곳의 전력은 강했다.

수호 가문 중 제일이라 평가받는 통천문이라 해도 기습이 아니면 확 실한 타격이 힘들 정도였다.

“내 짐작으론 적사호, 그자가 승부 수를 건 듯하네. 가렴이를 통해서 본 회가 통천문을 쳐 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마음이 조급해 졌겠지.”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군요. 저 같아도 가만히 서서 당하느니 화끈하게 한번 승부를 걸어 봤을 겁니다.”

염사독이 위태성의 의견에 적극적 으로 동조했다.

호군천도 같은 생각인지 조용히 고 개를 끄덕였다.

“적사호는 누가 맡을 텐가?”

위태성이 두 사람에 물었다.

순간적으로 공통된 감정이 둘의 얼 굴에 떠올랐다.

그건 바로 호승심이었다.

적사호와 비슷한 나이로 무공에 입 문했던 두 사람은 언제나 의도치 않 게 그의 비교 대상이 돼야만 했다. 그때마다 두 사람의 가슴에는 응어 리가졌다.

“제가 맡겠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나 온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를 향했다.

“자네가 양보하지, 활로 근접전은 치르는 건 무리인 듯싶은데.” 

“그건 내가 할 말일세. 그 무거운 언월도로 놈의 귀신같은 움직임을 쫓아갈 수나 있겠는가.”

둘 사이엔 날선 공방이 벌어졌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기들끼리 한 판 벌일 기세였다.

이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위태성이 둘 사이를 자연스럽 게 갈라놨다.

“두 사람 다 통천문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 같군. 발톱이 많이 빠지기 는 했어도 여전히 통천문은 한 방을 갖고 있는 맹호일세. 어찌 그런 안 일한 마음으로 통천문을 상대하려 하는가!”

위태성이 언성을 높였다.

틀린 말이 아닌지라 두 사람은 고 개를 수그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위태 성은 두 사람에게 합공을 제안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 선을 다한다고 했네. 그리고 무엇보 다 이곳에 도사리고 있는 수신무위는 앞으로 있을 거사에서 중임을 맡아 수행해야 하네. 하니, 한 명의 희생도 헛되이 해서는 안 돼.”

구구절절 옳은 얘기였다.

잠시 후 염사독과 호군천이 각각 염궁대와 천도대를 이끌고 정문 쪽 에 나란히 섰다.

앞 열에는 참마도를 든 천도대가 위치하고 뒤 열에는 활을 든 엄궁대 가 넓게 포진했다.

적이 정문으로 들어오는 순간 천도 대가 앞으로 달리고 그 뒤를 엄궁대 가 철시로 받칠 터였다.


‘다 왔다.’

눈앞에 고장이 가까워져 온다.

설우진은 한계에 다다른 두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고 문을 향해 내달렸 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살짝 빈틈을 보였다.

고금추는 빈틈이 보이자 마기를 집 중해 회심의 일격을 전개했고 갈고 리처럼 휘어진 오른손이 설우진의 등판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설우진이 몸을 역으로 비 틀었다. 미리 의도된 움직임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고금추의 손이 등판 을 스치고 문 위로 떨어졌다.

쾅.

손끝에 실려 있던 강한 힘에 고월 장의 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설우진은 다급히 비검 대에 전음을 보냈다.

-연막탄 터뜨려!

흑랑대의 끈질긴 추격을 버텨 내고 있던 비검대가 일제히 품 안에 손을 넣어 바닥에 둥그런 물체를 던졌다. 연막탄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고월장 주변이 희뿌연 안개로 뒤덮 였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은 흑랑대는 당황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안개 사이로 살기를 머금은 물건들이 들이쳤 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염궁대가 쏜 철시였다.

흑랑대는 황급히 검을 휘둘러 철시 를 쳐냈다.

시야가 어두워 기감으로만 그 위치 를 짚어 내야 했지만 마천의 정예답 게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 다.

하지만 그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 다.

철시가 한차례 쏟아진 이후 두꺼운 갑주를 걸쳐 입은 무사들이 들이쳤다.

호군천이 이끄는 천도대였다.

안개 속에서 두 무리가 격렬하게 맞닥뜨렸다.

그 선두에는 역시나 고금추와 호군천이 있었다.

카카캉캉캉.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쇳소리.

두 개의 신형이 쉴 새 없이 자리를 바꾸며 맹렬한 공격을 이어 갔 다.

고금추는 귀수마공을 기반으로 한 수강을 전면에 뿌려 댔고 호군천은 중장기병인 언월도를 마치 연검처럼 능수능란하게 휘둘렀다.

초반의 공방은 호각지세였다.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빠르게 치고받 았다.

‘빌어먹을,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이런 곳에 원군을 숨겨 두고 있었 군.’

‘통천문에 이런 숨은 전력이 있었나? 이자의 무공, 결코 내 아래가 아닌데.’

설우진의 의도대로 두 사람은 상대 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싸 움을 이어 갔다.

그것은 흑랑대와 천도대도 마찬가 지였다.

흑랑대는 비검대를 놓친 분풀이를 하듯 천도대에 맹렬한 공세를 퍼부 었다.

바짝 독이 올라 있는 상태였기에 천도대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면 서 요혈을 찔렀다.

그에 반해 천도대는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들 개개인의 무위는 흑랑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하게 무력치만 놓고 본다면 더 우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단 하나.

흑랑대에는 있고 천도대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전 경험이다.

천도대는 진짜 싸움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 차이는 생사를 넘나드는 난전에 서 생각보다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커억.”

천도대원 하나가 왼쪽 가슴을 파고 든 검을 보며 거친 신음을 토해 냈 다.

붉은 선혈이 목울대를 타고 입밖 으로 흘러나왔다.

방금 전 그는 해서는 안 될 행동 을 하고 말았다.

자신이 휘두른 칼에 옆구리를 얻어 맞은 흑랑대원이 뒤로 피하지 않고 되레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에 당황 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만 것이다.

경험의 부재에 온 치명적인 실수였 다.

“크크큭, 무사라는 놈이 피 보는 걸 두려워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흑랑대원이 비소를 흘리며 천도대 원의 가슴팍을 비집고 들어간 검을 힘차게 돌려서 빼냈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줄기.

천도대원은 더 버티지 못하고 바닥 으로 쓰러졌다.

이후 전세는 흑랑대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대주인 호군 천이 고금추를 떨쳐 내고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 애를 썼지만 고금추 는 끈덕지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이런, 시야가 확보돼야 놈들을 정 확히 노려 쏠 수 있는데………….”

뒤쪽에 자리하고 있던 염사독이 초조한 눈빛으로 전장을 주시했다. 천도대와 흑랑대가 겹쳐 있는 부분에는 여전히 희뿌연 연기가 그득했 다.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옅어지고는 있었지만 화살을 쏘기에는 아직 시야가 부족했다.

이에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위태성 쪽을 향했다, 그라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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