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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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14)


케이 보좌관은 탁자 위에 놓아둔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동생분이 왜 나가를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주위에 나가를 증오하는 사람밖에 없으니까.”

“동생분이 주위에 휩쓸렸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그 애가 줏대 없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 애는 용인이야. 용인이 뭔지는 알지?”

“물처럼 예리해진 사람이지요.”

사모는 케이 보좌관을 쳐다보았다. 보좌관은 설명을 덧붙였다.

“물은 어디든지 스며듭니다.”

“어디든지…… 그래, 맞아. 그 애는 나가를 증오하는 북부군들과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었어. 내 동생이 그 예민함으로 무엇을 느꼈을지는 여신만이 알아.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나가에게 뺏긴 자들 가운데서 4년을 보냈어. 그중 2년은 용인으로서.”

“어디든 스며드는 물은 무엇으로든 변하지요. 피가 섞이면 핏물이 되고 독이 섞이면 독물로 변합니다. 동생분이 증오에 휩싸인 북부군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그 스스로 증오로 바뀌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보좌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생각에는 그럴 것 같지 않군요. 또 한 명의 케이건 드라카가 겨우 4년 만에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케이건 드라카를 잘 알아?”

“그 분을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사모는 보좌관의 말투에 섞여 있는 이상한 음색을 느꼈다. 하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보좌관이 말했다.

“어쨌든, 당신과 당신의 동생에 관한 일은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 당이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도로와 숙식입니다. 요새를 전투용으로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사모는 애타는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제발 재고해 줄 수 없겠어?”

“재고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제공하는 것만을 이용해야 합니다.”

사모는 다시 한 번 애원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사모는 보좌관이 또다시 기묘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좌관은 거절을 말하는 대신 ‘우리가 제공하는 것만을 이용하라’고 말했다. 사모는 황급히 보좌관의 표정을 살폈고, 그리고 깨달았다.


하늘이 열린 이래 처음으로, 시구리아트 산맥의 고산준령은 더위를 느꼈다.

물은 열을 흡수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과도하게 압축되면 열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대지에 떨어지는 햇빛으로부터 욕심껏 열을 훔쳐 왔던 물은 과도하게 집중되자 풍성한 열을 내놓았다. 하여, 시구리아트 산맥은 미증유의 더위에 헐떡이게 되었다. 습기는 나무줄기를 따라 흐르는 땀이 되었고 산들이 두르고 있던 안개는 농밀해지다 못해 나가들의 팔다리를 붙잡는 장애물이 되었다. 수영의 경험이 있을 리 없는 나가들은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듯한 그 느낌에 몹시 당혹했다.

그 기상천외한 천재지변은 한 수호 장군의 명령에 의해 일어나고 있었다. 대장군 갈로텍은 보다 낮은 땅에서 닥치는 대로 습기를 끌어모아 산맥 위에 쌓아 올렸다. 아쉽게도 나가들에게 쾌적할 정도의 온도는 이룰 수 없었지만, 갈로텍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정신을 잃어야 할 곳에서 나가들이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게끔 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이룩한 위업에 기쁨을 느껴도 되련만 안타깝게도 갈로텍에겐 그런 즐거움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요구에 화를 내고 있었다. 군령자에겐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다. 갈로텍은 주퀘도의 요구에 분노를 느낄 지경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유료 도로당은 통행료만 지불하면 누가 지나가건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요?”

“물론 그래. 음. 그들은 그렇게 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통행료를 지불하고 이곳을 지나갈 겁니다. 왜 전투를 벌이자는 겁니까?”

“이봐, 갈로텍. 어차피 북부를 모두 정벌한 다음엔 이곳 또한 정벌해야 하잖아? 그렇다면 그것을 지금 시도해선 안 될 이유가 뭐지? 오동나무 군단과 야자수 군단의 복수를 해야 하잖아.”

주퀘도가 거론한 군단들은 언젠가 시구리아트 관문 요새를 공격했다가 고지대의 혹한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던 군단들이다. 하지만 갈로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유가 뭐냐고요? 대수호자 키베인을 구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괜한 전투를 벌여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퀘도는 분노를 억누른 채 사정하듯 말했다.

“갈로텍, 갈로텍. 내가 어떤 기분일지 짐작하겠지? 그래. 나는 두 눈 뜬 채 저 요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250년 전과는 달라. 2만 명의 병력, 그것도 거의 불사신이며 17분 동안이라면 레콘 외에는 당해 낼 자가 없는 병사들이 여기 있어. 수력을 자유로이 다루는 수호 장군들도 있고. 이런 병력이 있는데 날더러 저기를 그냥 지나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야. 그러면 나는 미쳐 버릴지도 몰라. 이해할 수 없어?”

갈로텍은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퀘도가 사정하는 경우를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로텍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저 아래에 내려가 잠이나 좀 주무시죠.”

보통 사람들은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을 일이지만 군령자에겐 때론 아쉬운 사실이 있는데, 자기 자신을 쏘아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어쨌든 주퀘도는 갈로텍을 노려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갈로텍은 주퀘도가 그런 기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갈로텍은 달래듯이 말했다.

“주퀘도. 당신 말대로 언젠가는 저 요새를 함락시켜야 할 겁니다. 그때 당신에게 모든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은 대수호자를 구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시바삐 키보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엔 약속하지요. 2만 명이 아니라 20만 명이라도 제공하겠습니다. 지금은 참아 주십시오.”

“제기랄, 그 약속은 이미 오래전에 했던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아! 네가 빌어먹을 나가들의 빌어먹을 대장이 되도록 도와주는 대신 북부에서는 내 마음대로 싸우게 해 주겠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후일을 기다리라고? 그 말이 또다시 식언이 되어 버리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보장할 거냐!”

주퀘도의 폭발적인 반응에 갈로텍은 황당함마저 느꼈다. 그 모습은 갈로텍이 아는 주퀘도가 아니었다. 갈로텍은 주퀘도를 무시할지, 그렇잖으면 다시 한 번 달래 볼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리고 갈로텍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보라크 군단장이 그에게 닐렀기 때문이다.

<대장군님. 뱀단지로 연락이 왔습니다.>

갈로텍은 묻는 눈초리를 보냈다. 보라크는 대답했다.

<지도그라쥬의 뱀단지입니다. 대장군님과 대화를 원하는군요.>

갈로텍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퀘도. 좀 있다 이야기합시다. 뱀단지로 연락이 왔습니다.”

<수호 장군들과 함께 기온을 맡게.〉

보라크 군단장은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군단장이 다른 수호 장군들에게 니름을 보내는 것을 들으며 갈로텍은 뱀단지 수레로 걸어갔다.

수레의 뒤편 계단을 올라간 갈로텍은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수레 내부는 마치 약술사의 연구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사방의 벽을 두른 선반들과 그 선반에 빽빽하게 놓여 있는 단지들 때문에 그런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 단지들은 나가들의 도시와 군단들과 연결되는 뱀단지들이었다. 그리고 수레 가운데는 일종의 탁자 비슷한 것이 놓여 있었다. 보통의 탁자와 다른 점은 테두리에 작은 벽이 있어 수레가 이동 중이더라도 탁자 위의 물건이 쏟아지지 않게 고안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 그 탁자 위에는 뱀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탁자 옆에는 뱀 부리미가 서 있었다. 갈로텍은 탁자 옆에 서서 닐렀다.

<대장군 갈로텍이 왔다고 전하게.>

정신 억압자인 뱀 부리미는 가볍게 목례한 다음 뱀들에게 의식을 전달했다. 업무 특성상 무수한 비밀을 취급할 수밖에 없는 뱀 부리미는 대개 과묵한 편이었다. 정신 억압은 할 수 없지만 사어를 읽을 줄 아는 갈로텍은 지도그라쥬에서 보내오는 회답을 읽었다.

‘수호자 오라기입니다. 편안하신지요.’

<감사합니다. 오라기.>

‘열흘 가까이 대화를 나눌 수 없더군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르마크 상장군이 저 대신 추적전을 지휘했습니다.>

‘대수호자께서 적의 수중에 계신이 다급한 상황에서 대장군이 임무를 방기하고 있었다는 니름이십니까?”

<주퀘도 사르마크는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명장 중의 한 사람입니다. 임무를 방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보다 훌륭한 자에게 맡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심장병은 어떻습니까?>

갈로텍은 조금 전 주퀘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자신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니름을 하고 있는 건가 하며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뱀들이 다시 움직였다.

‘대수호자님의 심장병에는 별일이 없습니다. 그 분은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현재 대수호자님을 구출하는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대답할 니름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갈로텍은 ‘불신자들과 싸우는 것은 나니까 너는 닥치고 주는 것이나 받아먹어라’고 닐러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꼈다. 지도그라쥬는 강대했다. 존경심을 위조해야 할 만큼.

<현재 저와 대나무 군단은 시구리아트 산맥에 있습니다. 이곳은 대단히 높은 곳이며, 그 때문에 기온 조절에 약간 애를 먹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곧 그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자꾸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만 대수호자의 실종으로 지금 수호자들은 큰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대수호자님이 우리에게 귀환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슬픔과 공포를 달랠 수단이 없습니다.’

<대수호자님은 반드시 돌아가실 겁니다. 저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 분으로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저는 되도록 대수호자의 많은 부분이 구출되었으면 합니다. 다른 수호자들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갈로텍은 기어코 폭언을 퍼붓고 말았다.

“그래, 머리가 붙은 채로 데려다주마! 내 누이와 달리 !”

마지막 자제력 때문에 갈로텍은 그것을 육성으로 내뱉었고 라서 그것을 들은 것은 주퀘도 뿐이었다. 뱀 부리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낀 갈로텍은 곤두선 비늘을 눕히며 닐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오라기는 지지부진한 말 몇 마디를 남긴 다음 대화를 끝냈다. 주먹을 움켜쥔 채 뱀 부리미가 뱀을 쓸어 담는 모습을 바라보던 갈로텍은 뱀 부리미에게 닐렀다.

<하텐그라쥬의 뱀단지를 꺼내어 주게.>

뱀 부리미는 하텐그라쥬의 뱀단지를 찾아내었다. 잠시 후 하텐그라쥬의 세리스마가 갈로텍의 소환에 응했다.

‘갈로텍.’

〈세리스마. 키베인이 불신자들에게 붙잡힌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그 얼빠진 녀석 대신 새로운 대수호자의 선출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도그라쥬의 오라기는 그 얼간이의 행방불명에 세상의 모든 수호자들이 공포에 빠져들었다는 바보 같은 니름을 하던데………….>

‘갈로텍, 뱀 부리미를 뒤돌아서게 하게.’

<네?>

갈로텍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뱀 부리미는 등을 돌렸다. 그는 자기 일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리스마가 보내어 오는 사어는 갈로텍만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갈로텍. 그 자의 니름은 과장이 아니야. 오라기가 자네에게 그런 인상을 심어 주었다면, 그건 오라기가 자네를 놀린 거야. 자네는 전선에 있어서 알지 못했겠군. 지금 후방에서 키베인은 꽤 이상한 위치에 올라서고 있어.’

대답할 수 없기에 갈로텍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리스마의 사어가 계속되었다.

‘자네에게 키베인은 지도그라쥬와 맺은 타협의 증거이고 다루기 불편한 수호 장군 한 명에 지나지 않겠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라. 여신이 봉인된 지금 키베인은 여신의 빈 자리에 들어갔어. 지도그라쥬가 그런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확인해 볼 필요가 없겠지.’

갈로텍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엔 니름이었다. 물론 뒤돌아서 있는 뱀 부리미는 그 욕설을 전달하지 않았다. 갈로텍을 화나게 하는 사어는 계속되었다.

‘수호자들은 그렇게 여기고 있어. 잊지 말게. 여자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여신은 유일하게 수호자들의 것이었어. 그 여신이 사라진 지금 수호자들은 여신의 대용물이 필요했어. 자네와 다른 수호 장군들은 군사들이라도 다룰 수 있지만, 후방의 수호자들에겐 그런 것도 없어. 그래서 그들은 대수호자를 원하고 있어. 한편 일반인들의 생각은 한층 더 가관이야. 대수호자가 종군했다는 사실이 일반인들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아나? 일반인들은 키베인을 여신의 구출자로 여기고 있어. 불신자들이 납치해 간 여신을 구출해 낼 구원의 사도인 거지.’

갈로텍은 더 이상 욕설도 니를 수 없었다. 그는 비늘을 사정없이 부딪치며 뱀들을 응시했다.

‘자네 기분을 알아. 그래. 직접 군단을 지휘하여 불신자들과 싸우는 것은 자네와 수호 장군들이야. 하지만 이곳의 바보들은 키베인이 그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마귀들에게 붙잡힌 여신을 구출하는 영웅이 된 셈이지. 고전미가 넘친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인상을 좀 바꿔 보려고 해도, 내가 직접 군단의 위대함을 니를 수는 없어. 군단은 모두 하텐그라쥬 출신의 수호 장군들이 장악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갈로텍. 키베인을 꼭 구출해야 해. 무능력한 대수호자가 하텐그라쥬의 위대한 수호 장군들의 손에 구출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거야. 무슨 니름인지 알겠지?’

<뒤로 돌아서서 전해라. 알겠습니다.>

뱀 부리미는 갈로텍의 니름을 전했다. 세리스마는 작별을 고한 다음 대화를 끝냈다. 갈로텍은 수레에 들어섰을 때보다 훨씬 험악해진 기분으로 수레를 나섰다.

안타깝게도, 바깥 상황은 기분 전환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기온이 더 떨어져 있었다. 보라크 군단장과 수호 장군들이 애쓰고 있음은 분명했지만 그들에겐 역부족이었다. 갈로텍은 왈칵 화를 내며 기온을 상승시켰다. 쩔쩔매고 있던 보라크는 반가운 얼굴로 갈로텍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갈로텍의 굳은 얼굴에 곧 고개를 떨구었다. 갈로텍은 그들을 무시하며 걸어갔다.

시구리아트 관문 요새의 철문이 보였다.

갈로텍에겐 낯설지 않았다. 그곳에서 무참하게 날개를 꺾여야 했던 이백오십여 년 전의 거장이 그의 일부였기에 갈로텍은 난생 처음 보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익숙함, 그리고 정체 모를 증오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내 분노가 느껴지지, 갈로텍?”

갈로텍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퀘도는 초조하게 말했다.

“너는 누이를 포기했었나? 그러지 않았어. 나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어. 그래서 은편 열 닢을 내고 저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그러면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바보 같은 믿음이었지. 그것은 결국 저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런 주제에 ‘나는 패하지 않았다. 통과했다.’는 식의 망상을 한 거야. 빌어먹을! 나는 저놈들을 굴복시켜야 해. 그리고 내 은편 열 닢을 되찾아야 해! 그건 너무 싸게 팔아 버린 내 자존심이야!”

“나는 피가 차가운 동물입니다. 주퀘도.”

“그렇다면 그걸 데워! 이곳의 날씨를 바꿔 버린 것처럼 네 피를 끓게 해!”

“우리는 통행료를 지불하고 저곳을 지날 겁니다.”

“갈로텍!”

“내려가서 화리트를 만나 보세요.”

“뭐라고?”

“화리트를 만나 보라고 했습니다. 카린돌 마케로우의 행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화리트를 만나 보면 설명을 해 줄 겁니다. 대책을 강구하세요.”

주퀘도의 표정을 보거나 하는 것은 영원토록 불가능하겠지만 갈로텍은 그의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주퀘도는 격노에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네가 나를 버리려는 것이군. 나 없이도 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거냐?”

“주퀘도 내 약속은 아직 유효합니다. 나는 저 요새를 당신에게 줄 겁니다. 그러니……”

문득 갈로텍은 말을 멈췄다. 죽음의 거장은 이미 의식의 바닥으로 가라앉은 후였다. 갈로텍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보라크 군단장을 불렀다. 군단의 금고를 개방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갈로텍은 대금을 꺼내어 들었다. 그의 대금 연주를 좋아하는 주퀘도를 위한 것이다.

그런 것을 가리켜 자신을 달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나무 군단이 지불해야 하는 통행료는 엄청났다. 2만의 병력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군량에 대해서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만을 먹는 나가의 군량은 모두 산 동물들이었다. 유료 도로당은 염소 한 마리까지 꼼꼼히 계산하여 통행료를 책정했고 그 때문에 대나무 군단의 금고가 거의 바닥날 정도였다. 하지만 갈로텍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나가들 모두 통행료의 지불에 대해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북부에서 돈을 지불하고 뭔가를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금붙이나 금편 등은 전투에서 얻은 것이며 하텐그라쥬로 보낼 전리품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갈로텍은 유료 도로당이 그 돈을 어디에 쓸 건지 의아하게 여겼다. 그 즈음 북부에서는 경제 구조라 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나가의 준동 이후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은 생존 활동이었고, 같은 무게의 식량과 금 중에서 식량에 손이 먼저 가는 것이 당연한 시국이었다. 하지만 유료 도로당은 정중하게 통행료를 받았다.

거의 반나절이 소모된 후에야 대나무 군단의 모든 병력이 관문 요새를 통과할 수 있었다.

대나무 군단의 마지막 병사들이 관문을 통과하고 나서 한 시간 후, 요새 내의 한 방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곧장 당주의 방으로 걸어갔다. 당주의 방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별 제지 없이 그 사람을 통과시켰다. 방 안에서는 보좌관이 엄숙한 표정으로 일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보좌관에게 말했다.

“고마워.”

보좌관은 웃음기 없는 냉랭한 얼굴을 들어 상대방의 가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하실 것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도로와 요새의 숙식 시설을 이용하시기 위해 저희들에게 통행료를 지불하셨습니다.”

사모 페이는 가면 뒤에서 웃었다.

“그래. 통행료를 지불했기에 그 숙식 시설에 앉아 발밑으로 추적자들이 지나가게 하는 것도 가능하고.”

“저희들이 제공하는 용역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여행자의 자유겠지요.”

그때 바깥에서 경비병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북부군 교위 바르사 돌이 왔습니다.”

“들여 보내게.”

바르사는 수염을 꼿꼿이 세운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해소되지 못한 긴장은 수염 외의 다른 모든 곳에서도 나타나 있었다. 대호왕을 본 바르사는 목례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반나절이었습니다. 폐하.”

“수고 많았어.”

바르사는 새삼 감탄한 표정으로 그의 여왕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혜안이십니다. 저들은 우리를 찾아 헤매겠지요. 도깨비불을 보며 따라갈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추적해 봐도 우리를 붙잡지는 못하겠지요. 우리는 저들의 뒤쪽에 있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대나무 군단의 뒤를 따라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즈믄누리로 향하면 되겠군요.”

“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돌 교위.”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짐은 남쪽으로 가서 북부군을 데려올 생각이다.”

“폐하!”

“마루나래는 짐을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금군 또한, 마루나래와 금군은 사모 페이를 따르는 것이지 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니까.”

항의하려던 바르사는 문득 대호왕이 단지 마루나래와 금군의 충성 대상을 재확인하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그 말에 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안에 커진 눈으로 교위는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북부군은 이기든 지든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북부군의 최고 선임자다. 자의에 따라 왕을 선출하고 왕통을 잇도록.”

“폐하!”

사모는 대명사를 바꿔 말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동생을 찾아 한계선을 넘어 이곳까지 왔어. 상황의 요구에 따라 왕이 되긴 했지만, 그 전에 나는 내 동생의 곁에 있어야 해. 나는 결코 그들이 죽어 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이해합니다만 그러실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즈믄누리로 가셔야………….”

“나는 물론이고, 그대들 또한 즈믄누리로 가지 않을 거야.”

“예?”

“즈믄누리로 가는 것보다는 이곳에 남는 편이 좋을 거야. 이곳에서 나의 귀환을 기다려라.”

“이곳이라니요?”

사모는 대답 대신 보좌관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유료 도로당이 제공하는 용역이 그들을 숨겨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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