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2)
건물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낀 바우 머리돌은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고, 다음 순간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진흙 마귀다!”
하지만 라수 규리하는 들여다보던 지도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아니, 그건 데오늬 달비요.”
곧 명쾌한 동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습니다! 상장군님! 명령을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상장군님!”
우렁찬 고함에 생각의 가닥을 놓쳐 버린 라수 규리하는 결국 지도에서 눈을 들어 데오늬 달비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기겁했다. 바우 머리돌 성주의 표현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라수 규리하는 문가에 서서 진흙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그 기괴한 생명체가 자신이 보낸 전령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전령 노릇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거냐? 아니, 됐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나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상장군님!”
데오늬가 씩씩한 동작으로 달려나가자 바우와 라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지도를 들여다볼 생각이 사라져 버린 라수 규리하는 바우 머리돌에게 말했다.
“그래, 시우쇠 님은 좀 어떻습니까?”
“많이 지쳐 있소.”
“예? 넉 달 가까이 쉬었잖습니까?”
“휴식에 지쳐 있다는 거요. 지금 기세가 어찌나 살벌하고 악랄한지 나도 가까이 가기 어렵군요.”
라수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요. 그렇다면 오늘 대활약을 기대해도 되겠군요.”
바우 머리돌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라수가 말하는 대활약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호가니 군단 쪽에서 당신 예상대로 준비하고 있다면야. 물론 당신 예상은 틀린 적이 없지만.”
“틀림없을 겁니다. 지난 넉 달 동안 우리는 다섯 번 대패했습니다. 저 놈들은 절대로 시우쇠 님이 여기 있다는 생각을 못할 겁니다. 포위를 갖춰 우리를 이곳에 몰아넣은 것만 봐도 확실합니다.”
“다섯 번 대패하면서 몇 명이 죽었소?”
“글쎄요. 1만 5천 명쯤 될 겁니다.”
바우 머리돌은 눈을 붉게 물들였다. 흥분 때문이었다.
“나는 때론 나가들보다 당신이 더 무섭소. 그 1만 5천 명은 당신 자신이 죽인 셈 아니오?”
라수 규리하는 상대방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 직전의 이런 상황에서 완벽히 쓸모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는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우 머리돌은 도깨비였다. 라수 규리하는, 혐오하는 행위였지만 변명을 할 필요를 느꼈다.
“예.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1만 5천 명을 죽였다고 생각하느니 다른 4만 명을 살렸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 전투에서 이긴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이길 겁니다. 상장군.”
바우 상장군은 비딱한 시선으로 라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륜 페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 륜 페이는 사방 수 킬로미터 내에서 이루어지는 물의 움직임을 모두 추적하고 있었다. 조만간 비가 그칠 거라고 예상한 것 또한 륜이었다. 륜이 추적하고 있는 범위를 생각한 바우 상장군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적인 범위였는데, 왜냐하면 륜은 직경 수 킬로미터의 지면과 그 위쪽 수 킬로미터 상공, 그리고 지하 수 킬로미터까지 -언젠가 적들이 지하수를 용출시켜 기병들을 공격한 이후로 륜은 지표면 아래쪽까지도 자신의 감시 범위에 포함시켰다-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륜의 감시 범위는 직경 수 킬로미터의 거대한 구(球)였다.
륜 페이가 말했다.
“곧 떠나셔야겠습니다. 바우 상장군님.”
바우는 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륜 페이는 여전히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바우를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아는 가장 기괴한 자를 찾아보라면 바우는 주저 없이 륜을 꼽았을 것이다. 어쨌든 바우 머리돌은 상대방의 체액까지 포착하여 눈 감고도 상대를 ‘보는’ 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다른 나가들마저 경악하는 능력이었다. 포로로 붙잡힌 적들은 륜의 그런 능력을 절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공포 속에 격렬히 부정한다 해도 륜은 그럴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얼마 있지 않아 하늘이 갤 겁니다. 수호자들은 이미 엔거 평원의 날씨를 바꿔 놓았습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개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전투에 대비해서 힘을 아껴 두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도깨비들을 데리고 떠나십시오.”
“알았소. 공작.”
공작이라는 말에 륜은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물론 륜이 공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위대한 아라짓의 왕령을 따른다면 륜 페이는 존엄한 하텐그라쥬 공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륜의 정체에 대한 바람직한 해답으로 받아들였다. 널리 알려진 사실들을 따른다면, 륜은 하텐그라쥬에서 발생한 공작 계승의 투쟁에서 밀려나 북부로 도망쳐 와서는 때마침 북쪽에 돌아온 왕을 돕고 있는 망명 귀족인 것이다. 나가 사회에 대해 아는 자들이 있었다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설명이었겠지만 보통의 북부인들에게 그것은 친숙함을 불러일으키는 설명이 되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황당하기까지 한 설명을 떠올리며 륜은 자신들에게 허위가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 허위의 정점은 북부인들을 지배하는 왕의 정체일 것이다. 륜은 고개를 들었다. 2층에 있는 사람을, 륜은 시각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능력으로 볼 수는 있었다.
바우 머리돌은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다음 물러갔다. 그는 이곳을 나가는 것이 행복한 듯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괄하이드와 병사들이 있는 들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2층짜리 농가의 1층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적절한 위치에 있는 그 건물에 크게 기꺼워했지만 바우만큼은 그 건물을 달가워할 수 없었다. 살해당한 농부 가족들의 시체는 없었지만 벽과 바닥에 핏자국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핏자국을 모두 지운 후에야 바우 머리돌은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승낙했고, 그리고 건물 안에 있는 동안 내내 언짢아했다.
륜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이 집을 왜 남겨 둔 걸까요?”
“무슨 말이시오, 공작?”
“그들은 우리와 싸울 장소로 이곳 엔거 평원을 택했습니다. 계속된 추격으로 우리를 이 땅으로 몰아넣었고, 우리가 이곳의 작물을 이용할 수 없도록 주변의 농토를 모두 불질러 버렸습니다. 나가인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곡물이라지만 식물을 불지른 그 행위는 대단한 결심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이 집은 남겨 둔 걸까요?”
라수는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혹 이 집에 어떤 함정이 있다는…….”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여긴 지대가 높은 편이라 폭우에도 문제가 없고요.”
“그러면 집까지 부술 시간은 없었나 보지요. 하긴 곡물을 태우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작정으로 집을 부순다면 그것은 노동력의 낭비지요.”
륜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반론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적당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륜은 농가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륜은 무심히 말했다.
“코네도 교위와 그의 아들들이 오는군요.”
말을 끝낸 륜은 라수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이 또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라수 규리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냉소적 합리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인간보다는 오히려 나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라수조차도 건물 바깥에 있는 사람을 눈으로 보듯이 말하는 륜의 태도에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라수는 그 이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자제했고 빌파 삼부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완벽히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어서 오게. 이리 가까이.”
삼부자는 륜에게 목례를 하며 탁자 가까이 다가왔다.
세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륜은 코네도 빌파의 오른손을 —혹은 오른손이 있던 자리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그의 오른팔에 매달려 있는 것은 7번 손, 그러니까 흉측한 가시가 돋은 철퇴였다. 그들이 탁자 옆에 멈춰 섰을 때 륜은 코네도의 허리춤에 5번 손과 6번 손도 매달려 있음을 확인했다. 코네도 빌파로서는 완전 무장을 하고 온 셈이었다. 라수 역시 코네도의 무장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던 장난감이 도착했네.”
코네도와 그룸, 그리고 토카리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라수는 탁자 한쪽에 있던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고는 그 안에서 감투 세 개를 꺼내었다. 라수가 감투들을 내려놓자 코네도는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재치 있게 감투를 들어 머리에 얹었다.
코네도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미 몇 번 본 일이기에 그룸과 토카리, 그리고 라수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코네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제가 보입니까?”
륜은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세 남자 보이지 않는 사람까지 따지면 네 남자는 초조하게 륜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륜이 말했다.
“보이지 않습니다.”
네 사람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룸과 토카리는 더 참지 못하고 감투를 썼다. 라수는 세 남자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때 륜이 말했다.
“토카리 부위. 멈추십시오. 그러다가 코네도 교위에게 부딪힙니다. 감투 망가지겠어요.”
륜의 지적이 내포한 뜻을 이해한 라수는 곧 실망을 느꼈다. 그리고 차례로 나타난 토카리와 그룸도 실망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감투를 벗은 코네도 빌파가 탁자에 그것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몸속엔 물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해하던 코네도와 그룹과는 달리 토카리는 당장 륜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역시 다른 나가에겐 안 보이는 겁니까?”
“예. 드디어 성공이군요. 체온까지 감춰 버리다니, 대단합니다.”
라수와 토카리는 안도했다. 그리고 토카리는 형과 아버지를 위해 설명을 했다.
“이건 나가의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지하수까지 간파하시는 능력으로 우리 몸속의 물을 보신 겁니다. 음, 그럼 공작님. 혹 적들이, 물론 공작님만 한 능력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만, 공작님보다 좀 못한 능력으로도 우리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갈로텍 대장군 이외에 저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저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가 출현했다 하더라도 전쟁터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할 겁니다.”
그룸과 코네도도 마침내 희희낙락한 얼굴이 되었다. 코네도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철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오늘 이 놈을 한 번 신나게 써먹을 수 있겠군요.”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신나게 써먹는 건 자제하게. 적들도 우리가 도깨비 감투를 개량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꼭 필요할 때만…………, 이런, 발케네 남자들에게 쓸데없는 주의를 주고 있었군.”
코네도, 그룸, 그리고 토카리는 사나운 미소로 라수의 실수를 용서해 주었다. 발케네 남자인 그들은 당연히 참을성을 가지고 있었다. 도둑의 필요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룸이 계단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저,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려면 두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안 보이는지 알려면 폐하께서 확인해 주시는 것 01…….”
그룸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륜을 제외한 세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라수 규리하는 말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코네도를 바라보았고 코네도는 라수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첫째 아들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룹은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붙잡았다. 그런 그의 정수리를 향해 코네도의 불호령이 쏟아졌다.
“이 멍청한 녀석아, 폐하께서 어떻게 확인하시냐!”
그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아니죠! 절대로 확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럼 조금 전의 그건 무슨 소리냐?”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미치지 말게. 그룸 부위.”
그룸 빌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라수는 저 용맹하지만 주의력은 좀 부족한 사내를 전선에서 떼어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잠시 해 보았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거두고 간단한 주의만 주기로 했다.
“그리고 코네도 교위와 토카리 부위는 그룸 부위가 또 미치지 않도록 애정으로 보살피게.”
그룸은 아버지와 동생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농가의 바닥을 노려보아야 했다.
라수 규리하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자네들은 출발하도록 하게. 알고 있겠지만 모두 충분한 거리를 두고 흩어져야 해. 우리들도 자네들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빌파 삼부자는 물론이라고 대답한 다음 떠났다. 라수는 륜을 돌아보았다.
“공작님. 폐하께서 사열을 하셔야 하는데, 제가 갈까요?”
“제가 가겠습니다.”
륜은 계단을 올라 2층에 도달했다. 왼쪽 방으로 다가간 륜은 방문을 두드렸다. 반복된 연습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그리고 완전히 무의미한 동작이었다.
<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 안에서도 익숙한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인가?”
“륜 페이입니다.”
“들어오시오. 공작.”
방 안은 휑뎅그렁했다. 간소한 침대 하나와 옷장이 전부였다. 사모 페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고 손에는 가면을 든 채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륜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가면을 내려다보며 닐렀다.
<준비가 끝난 거야?>
<그렇습니다. 라수 상장군이 어떻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넉 달 동안 1만 5천 명을 죽이며 오늘을 준비해 온 사람이니까.>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는 천장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닐렀다.
<그동안 적들은 얼마나 죽었지?>
<200명쯤 될 겁니다.>
사모는 침묵했다.
<우리 병사들이 사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기적 같구나.>
<대장군과 장수들의 노력이 컸습니다.>
사모는 또 침묵했다가 닐렀다.
<자러 나온 귀하츠, 기억나니?>
<악몽을 꾸던 청년 말씀이십니까?>
<요즘 내가 그렇구나.>
<네?>
<요즘 계속해서 꿈 때문에 잠을 설치곤 해. 며칠에 한 번씩은 꼭 꾸는 것 같은데, 형태는 매번 조금씩 달라. 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아.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내 병사들 앞에 서게 돼. 사열, 연설, 추모, 포상……. 이유는 매번 달라. 어쨌든 나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지.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그게 누군지 모르겠어.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조차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야. 아니,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그 자는 내게 다가와 내 가면을 벗겨 버리지. 그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매번 막지 못해. 그리고 내 얼굴이 장병들 앞에 드러나게 되는 거지.>
사모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다음이 정말 궁금해. 꼭 그 지점에서 깨어나거든.>
<가면의 부담감 때문에 그런 꿈을 꾸시는 것이겠지요.>
<륜. 침대에 누워 봐.>
<네?>
<여기, 침대에 누워 봐.>
륜은 어리둥절해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사모는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 옆으로 비켜 섰다. 륜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한 동작으로 침대에 누웠다.
륜은 탄성을 질렀다.
천장에 글이 적혀 있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만 보이도록 서까래들의 특별한 위치에 먹을 발라서 이루어진 글이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닐렀다.
<그래. 저자들은 이 집을 비워 두면 우리가 들어오리라는 것, 그리고 이 방에 내가 묵을 거라는 것을 짐작했지. 그냥 서신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위협적이고 충격적인 방법이잖아?>
륜은 사모의 니름에 동감하며 글을 읽었다. 기상천외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항복을 권하는 간단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이 예사롭지 않았다. 륜은 일어나 침대 옆에 섰다.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면 자치 지역을 내 주겠다는 건가요? 라수 상장군이 보면 좋아하겠군요. 우리가 저런 조건을 받아들일 만큼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것일 테니까.>
<불신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50년쯤 후에 한 번에 몰살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 주의를 끄는 것은, 저것이 나가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자가 생각해 낼 법한 제안이라는 거야. 역시 그들에게 협력하는 불신자가 있는 걸까? 그렇잖으면, 나가들은 이제 불신자들에 대해 익숙해진 걸까?>
사모는 잠시 멈췄다가 닐렀다.
<그들이 불신자들에게 익숙해진 거라면, 이제 불신자들도 나가에 대해 익숙해져 있을까?>
<・・・・・・그래도 나가가 자신의 왕이라는 것을 알면 경악할 겁니다.>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겠지.>
륜은 씁쓸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모호한 방향을 향해 웃은 다음 가면을 썼다.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