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4)
병력 배치 따위는 더 이상 그로스의 고민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로스의 다급한 지시에 따라 평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수호 장군들이 각자의 신명을 닐렀다. 그리고 그들은 다가오는 시우쇠를 향해 수력을 집중시켰다.
사흘 동안의 비로 충분히 적셔져 있던 평원에서 물이 형체 없는 유령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파도가 되었다.
광대한 평원 전체에서 물이 파도치듯 일어나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우묵한 곳마다 괴어 있던 물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거대해지던 파도는 마침내 수십 미터의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그 거대한 파도는 한 지점을 향해 거세게 돌진했고 그곳에는 시우쇠가 있었다. 시우쇠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육상의 파도를 보며 으르릉거렸다.
부글거리는 물거품을 머리에 인 파도가 산더미 같은 기세로 시우쇠를 강타했다.
수증기가 폭발하며 용솟음쳤다.
화염의 화신과 육상의 파도가 격돌한 곳에서부터 불어 나온 열풍이 헐벗은 평원을 치달렸다. 지독히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고개를 돌려 외면했던 그로스는 잠시 후에야 충돌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그때까지도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수증기 뒤편에서 가공할 열이 번득였다. 그리고 수증기가 회오리치며 솟구쳤다. 비늘을 곤두세운 채 열을 바라보던 그로스는 정신적 비명을 질렀다.
수백 미터의 거리가 있었지만, 그리고 시우쇠에겐 눈동자 따위도 없었지만, 그로스는 시우쇠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음을 깨달았다. 시우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에서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불길은 수증기를 불살라 먹고 주위의 흙탕물을 끓어오르게 했다. 영이 빠져나갈 것 같은 공포 속에서 그로스가 굳어 있는 동안 시우쇠는 천천히 무릎을 폈다.
똑바로 일어난 시우쇠는 이전보다 두 배나 큰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로스는 후퇴해야 한다는 절박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병력 배치는 방금 시작되고 있었고 따라서 당장은 빼돌릴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무지막지한 혼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비아스가 군단장의 정신을 혼통 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니름을 보내어 왔다.
<후퇴해야 합니다!>
<뭐라고?>
<후퇴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았습니다. 이곳에 시우쇠가 있다면 싸움은 불필요합니다!>
조금 전 그런 결정에 기울어 있었지만, 그로스는 부관의 참견에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멀었나! 이런 상태에서 후퇴를 명령하면 시우쇠는 혼란에 빠진 아군을 깡그리 불태울 것이다. 아킨스로우 협곡을 기억해라. 돌격해야 해!>
비아스는 욕설을 니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로스는 그런 비아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듯 경멸에 찬 눈으로 부관을 노려본 다음 강력하게 닐렀다.
<돌격하라! 돌격! 접근하면 시우쇠는 불을 쓸 수 없다!>
나가들은 그로스의 니름을 이해했다. 그로스의 지적처럼 북부군과 밀착하는 것만이 시우쇠가 무작정 불을 일으키는 것을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가들은 살기 위해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당황 때문에 그로스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갑작스러운 개전(開戰) 때문에 나가들은 소드락 복용 시점을 놓친 채 돌격하고 말았다.
북부군의 병사들 뒤편에서 맑고 거대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장수들은 각자의 무기를 높이 들어 올려 신호를 보내었다. 보병들은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거센 돌격을 개시한 나가들과 달리 북부군의 보병들은 천천히 걸음을 뗐다. 각자 고르고 고른 첫 번째 작살검을 오른손에 쥔 병사들은 교위들의 명령에 따라 열을 맞추어 저벅저벅 걸었다.
땅의 감촉은 기묘했다. 사흘 동안 젖어 있던 땅은 갑자기 물기를 뺏겨 기묘한 모습으로 메말라 있었고 병사들의 발아래에서 퍼석거리며 부서졌다. 기분 나쁜 땅이었다. 하지만 교위들은 주의 깊게 그들을 인도했다.
보병들의 진군 속도는 조금씩 달랐다. 중앙부의 속도가 다른 부분들보다 상대적으로 느렸다. 마침내 3만 5천 명에 달하는 북부군 보병들은 양익이 앞쪽으로 돌출한 쐐기 모양을 형성했다. 쐐기의 오목한 부분 앞쪽에서 시우쇠는 무시무시하게 불타며 달리고 있었다. 시우쇠에게 닿으려면 아직 먼 시점에서 나가 보병들은 자신의 옷이 불타는 것을 깨닫고 공포에 질려 버렸다. 그런 나가들을 향해 시우쇠는 담백하기 그지없는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나가들의 뒤편에 있던 수호 장군들은 이미 물을 끌어모은 후였다. 불과 100미터라는, 도저히 비나 눈이 형성될 수 없는 높이에서 물이 응결되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본 시우쇠는 난폭하게 으르릉거리며 몸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일으켰다. 그 순간 수십 명의 수호 장군들이 일으킨 진눈깨비가 시우쇠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졌다.
시우쇠와 수호 장군들의 진눈깨비가 격돌하는 지점에서 굉음과 수증기가 뿜어졌다.
나가들은 그 충돌 지점에 뛰어들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돌진하던 나가 보병대의 선두는 가위가 천을 가르는 형상으로 좌우로 갈라졌다. 그런 식으로 시우쇠를 우회한 나가들은 그 뒤편의 북부군을 향해 돌격을 계속했다.
격분한 나가들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북부군의 진군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땅이 사정없이 울렸다. 코끼리들의 포효가 허공을 갈랐다. 나가들에겐 없는 심장이 북부군 병사들의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확대된 동공, 그러나 발걸음은 여전히 자제력 속에 단속된다. 다가오는, 다가오는, 다가오는, 너무 가깝다. 지나치게 가깝다. 이대로 죽는가? 저 사이커가 내 목을 노리며 날아오고 있는데 이런 바보 같은 병정놀이를 계속해야 하나? 보병들은 그들의 지휘관들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지 않았나 격렬하게 의심해 보았다. 그 순간 양익을 지휘하고 있던 세미쿼 장군과 무핀토 장군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찢어 발겨!”
작살검과 사이커가 살을 탐내며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