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4장 – 혈루(血淚)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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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4장 – 혈루(血淚) (8)


마루나래가 가볍게 울었다.

사모는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억시니들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멈춘 채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루나래 또한 그쪽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어깨를 경직시키고 있었다. 사모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저편에서 뜨거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드러지는 뜨거움은 세 개였고 그 크기는 모두 달랐다. 그런데 사모에게 그 세개의 서로 다른 뜨거움은 익숙했다. 사모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기쁨 속에서 또 다른 기쁨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들이 그녀 앞에 도달했고 마루나래는 긴장을 풀었다.

“폐하?”

“케이건!”

숲 속에서 걸어나온 케이건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비형과 나늬, 티나한의 모습이 보였다. 티나한과 비형 또한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폐하의 종복 케이건 드라카가 문후를 여쭙습니다. 그런데 폐하, 이곳은 키보렌입니까?”

사모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당장은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를 채우고 있는 기쁨의 여운은 짙었고, 그래서 사모는 앞으로 걸어갔다. 케이건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모가 두 손을 내밀었을 때 케이건의 무표정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은 곧 사라졌다. 사모는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케이건은 약간 지체하다가 차분하게 손을 내밀어 사모의 손을 마주 쥐었다. 사모는 티나한과 비형과도 차례로 손을 마주잡았다. 비형은 웃으며 말했다.

“폐하. 즐거워 보이시네요? 뭔가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자신의 대답이 그들을 당황시킬 것을 짐작했지만, 사모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조금 전에 친구 한 명이 죽었어.”

그녀의 예상대로 되었다.

그들이 나눌 이야기는 대단히 많았다. 그리고 그곳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기묘한 이야기들을 나누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장소이기도 했다.

별들이 흩뿌려진 열대의 청명한 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살을 에는 추위의 세계를 떠나온 수탐자들에게 낯선 기분을 선사했다. 숲은, 밀림은 조용한 꿈 속에 숨 쉬고 있었다. 도깨비는 일어나 커다란 도깨비불 하나를 만들어 하늘에 던졌다. 그러자 고대의 건물들이 빛 속에 되살아났다. 그곳에서 그림자들이 피어나 까불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고대의 건물을 구성하는 돌들이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들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빠른 시간의 단위를 사용하는, 거의 명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놀란 돌들이 빛과 그림자로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목향에 젖은 바람은 부드러웠고 사위는 고요했다.

북부의 왕 사모 페이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에게 배례했다.

“거룩한 여신이여. 저희들의 부덕함으로 여신을 귀찮게 해드린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기는 웃었다.

“나가의 여인이여. 그대가 걸어야 했던 길은 지나치게 험난했고 그대 어깨에 지워진 짐 또한 너무 무겁다. 불평하지 않는 여인이여. 그대는 누구를 대신하여 사과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일에 대해 사과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희 동포들이 발자국 없는 여신을 능멸했습니다.”

“너희들은 그러기 어려울 거다.”

사모는 옛기억을 떠올렸다.

“시우쇠 님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 분은 보다 거칠게 말씀하셨습니다만.”

“아아, 알고 있어. 세퀴라도라고 불리는 곳에서였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여신이여.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제 동생이 살아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아기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용인의 감각과 여신의 힘, 그리고 고대에도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든 강력한 용이라는 보호자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리고 심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네 동생은 살아 있다.”

사모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기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갈 것이다. 시우쇠가 그곳에 있으니. 티나한?”

티나한은 다시 아기를 업었다. 멜빵을 고치던 티나한은 북부의 왕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그만 흥분해버렸다.

“왕! 왕! 너, 너 그러니까!”

“뭐?”

“그러니까, 제기랄! 야, 케이건! 나 대신 말 좀 해!”

케이건은 친절하게 티나한의 요구를 따랐다.

“보모나 유모에 관련된 농담은 티나한을 화나게 할 겁니다. 폐하.”

사모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티나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 고향에서 나는 아기를 가질 생각이 없는 여자로 알려져 있었지. 그런데 나는 지금 내 아기는 아니지만 아기를 데리고 그곳으로 돌아가는군. 그리고 그 아기는 레콘이며,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이시지. 참 기묘하다고 생각했어.”

티나한은 부리를 조금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 아기는 아니지만, 티나한. 왕의 용감한 전사여. 그 아기를 잘 보살펴.”

티나한은 밝게 웃으며 그러겠노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티나한은 비형이 소리 죽여 웃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문득 긴장하게 된 티나한은 곧 사모가 조금 전 보모 노릇을 잘 하라고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자기조절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기 직전, 사모는 쾌활한 동작으로 마루나래에 뛰어올랐다.

“가자!”

소메로 마케로우는 자신의 방에 앉아 자신을 괴롭히는 파국의 느낌을 분석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체념하는 기분 속에서 비아스의 대담함이나 카린돌의 명석함이 자신에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고 있었고 그 평가에 고마워하는 그녀였지만, 그 순간 소메로는 덕 이외에 다른 것도 좀 가졌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회당이 건설된 이래로 가장 화려한 방법으로 입장한 비아스가 그 무례함에 대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찬사를 받았을 때, 마케로우 가문의 일원이고 비아스의 언니인 소메로는 당연히 동생의 성공에 기뻐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를 엄습한 것은 파국의 예감이었다. 소메로는 자신이 어떤 몹쓸 질투심에서 그런 무도한 감정을 품게 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았지만 그렇게 여기기엔 파국의 예감이 지나치게 강했다. 그랬기에 소메로는, 거의 성과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한 번 제반 상황들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그녀가 또다시 다 포기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을 때 남자들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소메로는 ‘방문자라면 방을 내주고 쉬도록 해주라.’고 명령했지만 그 남자들은 소메로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쥬어의 의용병이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소메로는 의아했다. 하지만 또다시 사고 활동에 얽매이는 것이 두려웠기에 소메로는 일어나 응접실로 갔다.

응접실에서는 두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나려는 남자들에게 손짓을 하여 도로 앉게 한 소메로는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니름없이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하지만 동시에 얼굴을 마주치고 싶다는 듯한 이상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소메로는 차분하게 닐렀다.

〈이상한 일이군. 쥬어가 왜 나에게 따로 사람들을 보낸 거지? 나는 이미 쥬어에게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가 없다는 사실을 설명했어. 혹 마케로우 가문에 대해 다른 것을 원한다면, 왜 비아스에게 니르지 않고 나를 찾아온 거지?>

두 남자는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중 한 명이 닐렀다.

<마케로우. 저희들이 쥬어의 의용군에 속해 있긴 합니다만, 쥬어의 명령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자의로 마케로우 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자의로? 설명해 보거라.>

<먼저 옛기억을 더듬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이 저택을 스쳐지나간 모든 남자들을 기억하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4년 전, 화리트가 죽고 카린돌 마케로우께서 실종되셨을 때 이 집에 있었던 두 남자를 기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소메로는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기억나! 너희들, 그때 우리 집에 있었어! 이름이?>

<저는 카루입니다. 그리고 여기 제 동료는 스바치라고 합니다.>

소메로는 두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옛기억들이 되살아나며 그녀는 괴로웠던 과거를 바라보게 되었다. 모든 것은 그날 일어났다.

전선에 나가지 않은 소메로에게 전쟁의 공포는 피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소메로에게 피부로 다가오는 고통은 충분했다. 가주가 실종되었고 두 명의 동생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의 동생은 전선으로 떠났다. 갑자기 가문을 떠맡게 된 소메로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원했지만 가주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가주의 책임감을 두 배로 느껴야 했다. 가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실종되었던 동생 중 한 명은 지척에 있는 심장탑에 냉동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전선으로 떠났던 동생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회를 뒤집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마케로우 가문’이라는 소박한 것에 대해서는 신경쓸 수도, 신경쓰지도 않았기에 그 가문은 일종의 퇴물, 쓰레기, 구차한 짐 같은 것이 되어 소메로에게 맡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메로는 여전히 그것의 주인이 아니었다.

<너희들이 이 가문에 온 이후로 그 모든 일이 일어났지. 그래, 왜 돌아온 거지?>

<죄송합니다만 육성으로 말해도 되겠습니까?>

소메로는 약간 불쾌함을 느꼈지만 선선히 대답했다.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나가 사회를 덮쳐오고 있는 파국에 대해 의논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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