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5장 – 셋은 부족하다 (1)
바라기의 실종이 정확히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는 알기 어렵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물건을 찾으려 했을 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흔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라기의 실종에 관련된 상황을 거의 정확하게 아는 셈이다. 바라기의 실종이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추풍왕 2년의 일이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나 문헌학자들은 그 이전 시기의 사료들에서 이미 ‘거대한 슬픔’이나 ‘돌이킬 수 없는 손실’, ‘우리 모두가 아는 저 끔찍한 손해’ 등의 은유적인 표현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추풍왕 2년의 저 유명한 고발은 고발이 아니라 이미 공공연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이전 시기의 왕들에게, 바라기는 그렇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도로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지는 경우가 더 많은 극연왕은 역대 최장 기간의 집권 기간을 통해 열성적으로 도로를 건설했으며, 아라짓 전사들은 어쨌든 훌륭한 건축가는 아니다. 따라서 극연왕의 기나긴 집권 기간 동안 아라짓 전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바라기가 등장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그 뒤를 이은 독서왕의 경우 극연왕이 건설한 도로를 고서적 수집에 이용할 수 있게 된 자신의 행운에 즐거워하며 집권 기간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그리고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고서는 거론하기 힘든 저 탐미왕의 경우도 전쟁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극연왕이 전쟁을 장악한 상태에서 자신의 사업을 벌였던 것에 반해 독서왕과 탐미왕은 자신의 사업에 바빠 전쟁을 무시해 버렸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대확장 전쟁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추풍왕 이전의 백오십여 년만큼 전쟁과 무관했던 시절도 드물다. 바라기는 바로 그런 시기에 사라진 것이다. 독서왕과 탐미왕이 방치해둔 나가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던 추풍왕에게 그것은 실로 커다란 재난이었다.
-라수의 「왕국의 몰락
셋은 부족하다
자욱한 안개가 숲의 발치를 더듬는다. 번지고 흩어지지만 엷어지지 않는 흰 얼룩.
기이하리만큼 짙은 안개에 즈라더는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차가운 양날 도끼에 묻어나는 이슬은 즈라더를 더욱 기분 나쁘게 했다. 즈라더는 배낭에서 노획물인 옷을 꺼내어 도끼를 닦았다. 그리고 다 쓴 옷가지는 그냥 버렸다.
어떤 병사는 근사한 단추를 잔뜩 모았다. 옷에 모조리 바느질해서 붙여놓아 그 꼴이 광대 같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단추가 떨어진 동료가 있으면 별 생각 없이 뜯어서 건네주곤 했으니까. 또 어떤 병사는 륜이 서판이라고 말해 주기 전까지는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무판을 모으기도 했다. 그 자는 그것을 도마로 쓰거나 겹쳐쌓아 베개로 쓰거나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그저 그 나뭇결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북부군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즈라더 또한 나가들의 도시에서 뭔가를 모아들였고, 그가 주로 모아들인 것은 수건이나 걸레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옷가지들이었다. 즈라더 역시 그것을 도끼 닦는 데 사용하긴 했지만, 그런 용도로 모은 것이라면 질긴 것 대신 예쁘게 보이는 것을 모아들인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번쩍거리는 도낏날에 자신의 근사한 수염볏이 잘 비치는지 관찰하던 즈라더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짤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즈라더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즈라더는 고개를 돌려 세미쿼 장군을 바라보았다. 세미쿼 장군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개를 직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왼손에 쥐어진 가위는 마치 불규칙한 맥박처럼 짤깍거렸다. 날을 얼마나 세웠는지 가윗날이 부딪힐 때마다 서컹컹하며 가슴을 에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의 손가락쯤은 어렵잖게 잘라낼 듯하다. 즈라더가 그 짓 좀 그만두라고 말하기 전,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여 말했다.
“가위질은 포목점에서나 해라.”
세미쿼는 무핀토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너무 조용해서 그런다. 지독하게 조용한데.”
무핀토는 불쾌한 신음을 흘리며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유혹하는 듯도 하고 배격하는 듯도 한 기이한 안개다. 무핀토 장군은 몸을 떨었다. 세미쿼 장군이 다시 말했다.
“그 녀석도 이 고요를 견디기 어려웠던 걸 거야.”
세미쿼가 말하는 ‘그 녀석’이 누군지 아는 무핀토는 욕짓거리를 늘어놓았다. 험한 말을 늘어놓던 무핀토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닿는 곳에 키타타 자보로 장군이 차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보로 장군은 방패를 팔에 끼운 채 동상마냥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안개를 바라보는 북부군들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자보로 장군만큼 특이한 자는 없었다. 거의 모든 북부군은 안개의 모습에서 불길함과, 그리고 인정하지는 않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부동 자세로 서서 안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키타타 자보로에게선 그런 감정의 흔적을 읽을 수 없다. 도도한 분노와 정숙한 증오. 혈족의 마지막 생존자의 모습은 안개 속에 서 있는 바위 기둥 같다. 그 당당한 모습 앞에선 젖빛 안개 너머로 보이는 시모그라쥬의 장려한 석조 건물들조차 왜곡되기 쉬운 환상처럼 보인다.
침묵의 도시로 향하는 길의 마지막에 버티어 선 시모그라쥬는 키보렌의 모든 힘으로 북부군을 저지할 태세였다. 모여든 군단은 다섯. 하지만 수호 장군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북부군의 원수부에서, 라수는 그 숫자에 대한 보고를 받고 우울증에 빠지려는 자신을 느꼈다.
“쉰네 명?””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 장군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그 정도입니다.”
“수준이 어떻습니까? 시우쇠 님과 공작님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숫자입니까. 그건?”
“이 안개만 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들은 습기를 닥치는 대로 모아왔습니다. 이 습기를 실제로 운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힘은 엄청날 겁니다. 왜 도시 안에 틀어박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심장탑을 파괴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심장탑을 최우선 방어 거점으로 정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저쪽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인데…….”
라수는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곁에 있던 괄하이드 규리하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라면 최우선 방어 거점을 하텐그라쥬로 정했을 거다. 발자국 없는 여신이 계신 곳이 그곳이니까. 발자국 없는 여신이 풀려나면 수호 장군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는 거잖아. 시모그라쥬를 우회하자.”
라수는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뒤에서 공격당할 수 있어. 뱀단지 때문에 저 녀석들의 작전 수행에는 시간차가 없지.”
“그렇다면 뱀부리미를 잡는 것은 어떠냐? 군단병들은 모두 수호 장군들을 보호하고 있을 거다. 빌파 삼부자를 침입시켜 뱀부리미들을 잡는다면 적들의 의사 교환을 방해할 수 있을 거다.”
“다섯 개 군단이면 최소한 뱀부리미가 다섯은 있을 테지. 쉽지 않아. 그런데 내가 정말 신경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어.”
“그게 뭐지?”
“저 친구들은 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거지? 수호 장군들이 쉰네 명이라면 비를 오게 하는 것 정도는 방어력의 손실 없이 시도할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만 시도해도 아군의 레콘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는 있어. 아무리 겁을 먹고 있다 해도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해.”
“심장탑 근처를 떠나기가 싫은 건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륜의 지적에 라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뭘 말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
륜은 입을 다물었다. 라수는 부유하는 안개를 노려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괄하이드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 녀석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수.”
라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마음대로 해. 형이 대장군이잖아.”
괄하이드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륜에게 눈길을 한 번 보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의미였기에 륜은 걸어가는 괄하이드의 뒤를 따라갔다.
안개를 가로지르며 괄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륜은 걷는 사람이 셋임을 깨달았다. 어느새 베미온이 그의 곁에 따라붙어 함께 걷고 있었다. 베미온은 안개 때문에 기절할 것 같은 상태였다. 륜은 약간의 힘을 가해 그들의 주위에서 안개가 물러나도록 했다. 괄하이드는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나보다 훨씬 예민하실 테니 라수의 심리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지요.”
의지가 목소리로 바뀌기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륜은 당황하지 않고 괄하이드의 말에 대답했다.
“나가를 사람으로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대장군이 설명을 원한다는 것을 아는 륜은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열을 보지도 못하고 니르지도 못하지만, 이기기 위해 상장군은 나가처럼 생각하고 나가처럼 행동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나가를 이해하는 것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잘 알게 되면 증오하기 어려워지니까요. 그래서 나가인 저와 동료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가를 알려면 역시 저를 관찰해야 하지요. 그것이 상장군의 갈등입니다.”
베미온은 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륜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베미온은 그저 그 음색을 좋아했다. 괄하이드가 말했다.
“나는 공작만큼 예민하진 못하지만 라수와는 한 가족인지라 그의 과거를 잘 아오. 라수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해 왔소. 동료 이상으로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지. 다가갈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부드러워진다오. 가족 중에 나를 그나마 가까이 하는 것도 그 때문이오.”
괄하이드의 말을 듣던 륜은 무의식 중에 말했다.
“먹힐까봐 두려운가 보죠.”
말을 끝낸 륜은 곧 괄하이드의 당황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괄하이드를 향해 륜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 말 아닙니다.”
“알겠소. 언짢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를 잘 알면 증오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용인은 물론 누구보다도 상대를 잘 안다. 괄하이드는 탄복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우였군. 나보다 훨씬 라수를 잘 이해하시겠군.”
“아니오. 예민함과 이해력은, 물론 상호보완적인 것들입니다만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당신을 압니다만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괄하이드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말이오? 북부군에서 나처럼 단순한 자를 찾아보기도 힘들텐데.”
<그 단순함이 저를 때론 놀라게 합니다.>
“저는 당신이 대호왕의 영광과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즐겁게 포기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생명이 귀중한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맞소. 생명은 귀중하오.”
“그 믿음이 어떻게 기쁜 살인과 즐거운 자살의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괄하이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륜을 불편하게 했다. 괄하이드는 시선을 옮겨 자신의 손에 들린 대도를 바라보았다.
“케이건 드라카가 내 대도를 가리켜 과부와 고아를 생산해 내는 것에 탁월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오. 내게서 내 지위와 내 처지를 제거하고 단순히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만 센다면, 나는 상종할 수 없는 살인마일 거요. 하지만, 공작. 살인이 기뻤던 적은 없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세 사람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베미온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시 하이드가 말했다.
“내가 생각이 부족했군. 당신은 죄책감을 느끼는 거요?”
“죽어가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느낍니다.”
륜의 목소리에 배어든 스산함은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소름끼칠 만큼 관능적인 것으로 바꿨다. 산에게 부동심을 가르칠 수 있다는 노장군도 잠깐 동안 덥수룩한 수염이 올올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렇겠군.생각했어야 하는 문제인데. 공작. 죽어가는 자의 슬픔과 분노와 고통을 모두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짐작할 수 없구려.”
문득 괄하이드는 륜 페이가 아직 소년임을 떠올렸다. 륜은 청년이 되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럴 기회가 오자마자 륜은 키보렌을 떠났고, 완전히 낯선 땅 북부에서 그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부에서 시작된 륜의 두 번째 성장기는 유혈로 얼룩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잔학한 경험들이 사람들을 상처 입히면서 동시에 선물하곤 하는 단단한 껍질을, 륜은 받지 못했다. 용인이기 때문이다. 상처 입기 쉬운 여린 살을 노출시키고 있는 어린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은 북부군 최고의 병기이며, 동족들을 학살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괄하이드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장군이 자신의 놀람을 표현하기 전, 륜이 앞서 말했다.
“예상치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으려 결심하고 온 것이니까요.”
“그것?”
“나가들이 대호왕 대신 뇌룡공을 증오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단말마가 클수록, 저는 누님에게 돌아갈 것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제 손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가벼워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장군의 평정심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할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지 아는구려?”
“압니다. 제가 왜 필요한지도.”
괄하이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숲속의 공터에 도달했다. 공터 저편의 나무에는 한 남자가 밧줄에 묶여 있었고 세 명의 병사들이 앉아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병사들은 괄하이드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모습은 특이했다. 지저분한 옷이야 북부군들 거의 대부분의 모습과 마찬가지였지만 귀골로 태어난 잘생긴 얼굴은 덮수룩한 머리카락 가운데서도 묘하게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는 대장군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괄하이드는 병사들의 이름을 물었다. 병사들이 이름을 대자 괄하이드는 대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그대들이 입회인이다.”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괄하이드는 그들에게 복장을 단정하게 하도록 명령한 다음 남자에게 걸어갔다.
“칼리도의 성주,북부군 상장군 지코마 펠독스, 고개를 들어라.”
지코마 상장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괄하이드는 잠깐 기다렸다가 내버려둔 채 말했다.
“자네의 범죄에 대해 처벌을 내리기 전,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기회를 주겠다. 할 말 있으면 해보게. 하텐그라쥬 공작께서 자네의 진의를 보증하고 허위를 가려낼 걸세.”
륜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괄하이드가 그것을 별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명의 병사들은 더없이 공정한 판결이 내려질 거라 확신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지코마는 고개를 숙인 채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은 명령 불복종을 저질렀습니다.”
“상장군. 정확하게 말하게. 그 녀석이 누구지?”
“그 하전사…… 이름이 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전사 고윌텐 유크라우다.”
“그 하전사 고윌텐 유크라우는 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또다시 안개를 향해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했을 때고윌텐 유크라우는 이미 네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른 후였다. 상식을 무시하는 명령 아닌가? 게다가 그 명령 불복종이라는 것에 대해 자네가 내린 처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자네는 목이 잠겨서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애원하는 고윌텐에게 목이 트이게 해주겠다고 말하고는 그의 목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리고 자네를 말리려는 부하들도 가차없이 벴다. 그것은 도저히 상식을 가진 명령권자의 행동으로 볼 수 없다.”
지코마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괄하이드는 참을성 있게 다렸다. 한참 후, 지코마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명령 불복종입니다.”
“명령 불복종은 우선 명령이 명령답다는 전제가 있은 연후에나 따져볼 수 있는 문제다. 지코마 펠독스. 자네의 명령은 도저히 명령이라 볼 수 없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나는 자네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겠다. 그리고 그 처벌로 사형을 언도한다.”
지코마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괄하이드는 자신의 대도를 끌어올려 그 덮개를 풀었다. 륜은 병사들의 얼굴에 분명한 동요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괄하이드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상장군을 풀어 저기 있는 나무 등걸에 엎드리게 하라.”
병사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가 역할을 나누었다. 한 사람이 작살검을 뽑아 지코마 상장군을 겨누고 있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이 그의 결박을 풀었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상장군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병사들은 상장군의 두 팔을 허리 뒤로 묶은 다음 제대로 걷지 못하는 그를 들어올리다시피 하여 나무 등걸로 데려갔다. 지코마는 곧 나무 등걸에 턱을 댄 채 엎드리게 되었다.
두 명의 병사들이 그의 등을 눌렀다. 뭔가 짧은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고 병사 한 명이 하이드를 돌아보았다. 괄하이드는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남아 있던 한 명의 병사가 팔뚝에 감아둔 끈을 풀어내었다. 그는 지코마의 긴 머리를 쓸어모아 끈으로 묶었다. 동작이 익숙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륜은 사형의 경험이 있는 자는 괄하이드뿐임을 알 수 있었다. 노장군은 대도를 늘어뜨린 채 병사들의 일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지코마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주십시오’ 부분은 심하게 갈라져 알아듣기 어려웠다. 괄하이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던 지코마는 실망하며 말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키보렌에 들어온 이후 계속 그랬습니다. 이 저주 받은 밀림은 북부인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머리카락을 묶은 병사가 괄하이드를 바라보았다. 괄하이드는 억압적인 눈짓을 보내었다. 병사는 지코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단검으로 나무 등걸에 고정시켰다. 지코마의 목이 드러나며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병사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단검의 칼자루를 내려쳤다. 쾅쾅 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지코마의 몸이 분명한 울림을 보였다. 지코마가 다시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미친 자는 벌하지 않습니다!”
칼리도의 강대한 지배자였던 남자가 스스로에게 금치산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괄하이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미치지 않았네. 지코마. 만일 그렇다면 하텐그라쥬 공작께서 말해 주셨을 걸세.”
지코마는 머리카락이 우두둑 빠져나가는 것을 감수하며 고개를 돌렸다. 등을 누르던 병사들이 황급히 힘을 가했다. 지코마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고는 괄하이드를 향해 외쳤다.
“어차피 우리는 하텐그라쥬에서 다 죽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죽게 해주십시오!”
괄하이드의 흰 눈썹이 찌푸려졌다. 지코마는 절규했다.
“제 처벌을 그때까지 연기해 주십시오! 죽은 상장군보다는 산 상장군이 더 쓸모 있지 않습니까? 나가 한 놈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죽여야 된다면, 그곳에서 폐하를 위해 싸우다 죽게 해주십시오!”
단검을 고정시킨 병사가 뒤로 물러났다. 괄하이드는 대도를 움켜쥐고 위로 서서히 들어올렸다. 지코마의 등을 누르고 있던 병사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륜이 자신도 모르게 통제력을 잃은 덕분에 안개가 다시 넘실거리며 몰려왔다.
그때 지코마가 륜을 바라보며 외쳤다.
“뇌룡공! 거기서 그렇게 보고 있을 거요? 나는 당신들 때문에 여기에 왔소!”
륜의 몸에서 비늘이 곤두섰다. 그때 륜은 괄하이드가 대도를 내려칠 것을 깨달았다. 륜이 자신도 모르게 베미온의 눈을 가린 순간 괄하이드가 대도를 휘둘렀다.
병사들의 뺨에 선혈이 흩뿌려졌다.
괄하이드가 나무 등걸까지 파고든 대도를 잡아당기자 지코마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었다. 조금 전까지 고함을 지르고 애원하던 머리는, 이제 돌멩이만큼도 그럴 능력이 없는 무정물이 되어 데굴 굴렀다. 머리카락이 고정되어 있어 지코마의 머리는 한두 번 흔들리다가 나무 등걸 허리에 기이한 모습으로 멈췄다. 머리카락을 묶었던 병사가 뺨에 튄 피를 닦아내며 질문했다.
“매장할까요?”
“적전 대치 상태다. 그럴 여유가 없군. 돌과 나뭇가지로 대충 덮도록 해라. 햇빛과 이슬, 바람에 그를 맡긴다.”
병사들은 묵묵히 지코마의 머리를 옮겨 그 몸에 맞추어놓았다. 그리고 작살검을 뽑아 나뭇잎이 무성한 가지들을 후려쳤다. 륜은 베미온을 돌아서게 한 다음 그 자신도 몸을 돌렸다. 괄하이드는 대도에 묻은 피를 닦아낸 다음 그것을 나무에 기대어 놓고는 지코마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작살검이 나뭇가지를 때리는 소리가 음산했다.
륜은 대장군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추도사 같은 것에 소질이 없다. 그리고 지코마 펠독스라는 남자의 가장 친한 친구도 아니다.”
병사들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괄하이드를 바라보았다. 괄하이드는 엄숙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칼리도의 위대한 성주였으며 그 지혜로움으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지코마 펠독스라는 남자의 가장 작은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함께 보낸 4년의 세월의 무게 때문에, 그리고 내 손으로 그의 목숨을 끊었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감히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한다.”
스멀거리는 안개 때문인지 의외로 피비린내는 적었다. 륜은 베미온을 잠시 돌아보았다. 베미온은 륜이 돌려세워 둔 채로 얌전히 서 있었다.
“지코마 펠독스는 전우들 곁에서 위대한 스승이자 지혜로운 조언자였으며, 적 앞에서는 토염(吐炎)하는 용과도 같았다. 그가 내게 준 것의 일부분도 돌려주지 못한 내 무관심과 사려 없음으로 인하여, 지코마는 가혹한 긴장 속에 홀로 버려졌다. 그런 긴장은 가장 강대한 영웅조차 무릎 꿇게 하는 바, 결국 그는 혼란에 빠졌다.”
괄하이드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병사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후회한다. 내 모든 것으로 후회한다. 애초에 그를 돕지 못했기에 그의 목을 잘라야 했던 것을 후회한다. 무서운 적과 끝없는 전투는 내 무관심의 핑계가 될 수 없다. 그는 그런 무관심 속에 버려져도 무방한 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 베미온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전투와 전투의 사이에서, 승리와 승리의 갈피에서, 나는 그를 잃고 말았다.”
륜은 깜짝 놀라 베미온을 돌아보았다. 베미온은 여전히 지코마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괄하이드가 주춤하는 사이, 베미온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육친의 마음보다 적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했고 친우에게 줄 것보다 적에게 줄 것을 고민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행동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보다 적들이 내 공격에 대해 보여줄 반응이 더 궁금했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위대한 전사라 말할 때, 그들은 내가 적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구원자라는 찬란한 이름을 선물할 때, 나는 복수심에 찬약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상실했다. 나 또한 약자였기 때문이다.”
괄하이드와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베미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서 있던 륜은 베미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묘했다. 먼 과거를 바라보는 눈길이었고 즐거웠던 날을 회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약자로 남지 않겠다. 내가 가진 순간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강자가 되리라. 나는 잃지 않아야 했던 것을 찾을 것이다. 내 잃어버린 극을 되찾을 것이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 그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나는 세상의 모든 곳을 잇겠다. 그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내가 그를 찾아 달려갈 수 있도록. 이곳, 판사이의 탑, 왕의 방에 남겨두는 이 말은 내 과거에 대한 유언장이다. 이것은 어리석음 때문에 오라비를 잃어야 했던 누이동생의 마지막 말이다.”
고대에 북부를 지배했던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륜 페이였지만 그 놀라운 예민함 때문에 륜은 괄하이드의, 그리고 세 병사들의 정신에서 흘러나오는 극연왕이라는 이름을 깨달았다. 말을 끝낸 베미온은 환한 얼굴로 륜을 바라보았다.
“제 말이 맞죠? 외울 수 있다고 했잖아요.”
륜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원한다면 륜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가장 정확하게 들려줄 수 있다.
그래서 륜은 잠시 베미온의 어린 시절 스승이 되었다.
“그건 분명히 아라짓 어로 적혀 있을 텐데. 네가 그걸 어떻게 읽었느냐?”
“그 탑에 요즘 글로 된 해석본도 있다는 것은 모르셨죠?”
“그러냐? 하지만 그건 왕들의 비밀 기록이다. 마립간도 아닌 네가 감히 그 탑에 들어간 것, 그리고 왕들의 비밀 기록을 내게 들려준 것으로 벌을 받아야겠구나.”
베미온은 웃으며 도망쳤다. 안개가 그를 휘감아 감추는 것을 보며 륜은 짧은 순간 상실감 같은 것을 느꼈다. 추도사를 마무리한 괄하이드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공작. 그것은 뭐였소?”
“대장군의 추도사에 의해 유발된 퇴행이었습니다. 조금 전의 그것은 어린 시절의 베미온 굴도하였습니다. 마립간이었던 큰아버지의 열쇠를 훔쳐낸 베미온은 여섯 탑 중 하나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왕들의 망령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만 그런 것은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읽을 수 있는 글이 있는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곳이 왕의 방이었습니다. 왕들의 기록을 현대어로 바꿔 적은 이는………….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권능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읽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치밀어서 그렇게 한 듯합니다.”
괄하이드는 질리는 기분을 느꼈다.
“공작의 능력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로 무량하군. 베미온의 말을 듣자마자 그걸 다 ‘느낀’ 거요?”
“그리고 대화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라비를 잃은 누이가 극연왕입니까?”
“그렇소. 내 개인적인 감상을 말한다면 케나린 규리하의 좋은 전범이 되었을 여인이오. 그런데 그 분께서 잃어버린 오라비를 찾기 위해 그 많은 도로를 놓았다는 것은…… 글쎄. 아무래도 공공의 복리와 개인적 이유를 합친 것으로 생각해야 할 듯하오.”
“그 오라버니는 왜 사라진 겁니까? 예. 기회가 되면 라수 상장군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륜이 자신의 대답을 듣지 않고 들었다는 것을 괄하이드가 이해했을 때, 륜은 이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괄하이드를 돌아보던 륜의 눈길이 잠깐 흔들렸다. 괄하이드는 그가 지코마의 시체를 덮고 있는 나뭇가지 더미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괄하이드는 용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륜 페이가 시체를 덮고 있는 잘린 나뭇가지에서 인간과 다른 감정을 느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소름끼치는 시체의 모습이 감춰졌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무를 사랑하는 나가라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륜은 말했다.
“베미온 마립간을 데려오겠습니다. 아직까지 퇴행 중인 것 같습니다.”
“알겠소.”
륜은 안개 속으로 떠나갔다. 괄하이드는 입회한 병사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다음 라수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