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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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11)


냉동 장치의 문을 다시 닫은 케이건은 시우쇠를 쳐다보았다. 시우쇠는 노기충천한 모습이었지만 시각이 왜곡되어 있기에 그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문득 시우쇠를 그대로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화염의 화신이 죽을 것 같지는 않았 다. 혹 죽는다 하더라도 이곳에는 시우쇠가 전령할 도깨비가 하 나 있었다. 케이건은 비형을 찾아보았다.

비형은 나늬와 함께 아래로 내려서려 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단조롭게 손짓했다. ‘내려오지 마시오.’ 비형은 거부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케이건은 잠깐 고민하다가 바라기를 천천히 들어올 려 자신의 왼팔 위에 얹었다. 그 뜻은 명백했다. 나늬가 크게 후 퇴했다. 비형을 쫓아버린 케이건은 이제 티나한이 남았음을 상기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닥을 본 케이건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순진했다. 케이건은 오른발을 한 번 굴러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을 찰박거리게 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케이건은 티나한이 절대로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 신했다.

그를 방해할 자는 없었다. 케이건은 천천히 가장자리로 걸어갔 다. 하텐그라쥬의 전경을 죽 둘러본 케이건은 한 지점을 선택했 다. 그는 바라기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동작에는 물감을 잔뜩 묻힌 붓을 들어올리는 거장의 손길 같은 충만함이 있었다.

‘나가는, 모두 죽을 것이다.’

파괴적인 붓질을 하려던 케이건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의 눈에 심장탑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일군의 무리가 들어왔 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렸 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거기에는 나가가 있었다. 케이건은 난 폭한 동작으로 다시 바라기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끝내 바라기를 휘두르지는 못했다.

케이건은 아래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사모의 귀에 들리도록 바람에 그것을 실어 보냈다.

”돌아가십시오. 폐하.”

마루나래의 등 위에 있던 사모는 깜짝 놀라서 위를 쳐다보았 다. 사모는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는 케이건을 보고는 또다시 놀랐다. 케이건은 보통 말하는 정도의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 런 목소리가 들릴 거리가 아니었다. 사모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 속에서 대답했다.

”케이건 드라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사모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의 대답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또렷하 게 들려왔다.

”저는 나가를 죽일 겁니다. 폐하께서는 돌아가십시오.”

사모는 더 이상 고민할 여유 없이 다급하게 말했다.

”허락하지 않는다.”

”너까짓 나가가 감히 나에게 허락하느니 마느니 한단 말이냐!”

케이건은 폭발적인 괴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하늘을 울리게 하 는 대갈이었다. 갈바마리와 금군들은 켁켁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마루나래는 털을 꼿꼿하게 세운 채 으르릉거렸다. 사모는 그 음 성에 놀랐다. 그것은 그녀가 아는 케이건의 목소리였지만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녀가 대답을 못 하고 있을 때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제발 이곳을 떠나주십시오.”

사모는 케이건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하 지만 케이건의 일부는 분명히 아라짓 전사로서 사모를 왕으로 여 기고 있었다. 사모는 그 사실에 매달리기로 했다.

”케이건 드라카. 짐의 아라짓 전사여. 너의 왕이 하는 말을 들 어라. 짐에게 설명하라.”

”설명이라고요?”

”설명하라. 너는 내가 적으로 규정한 자와 싸우고 내가 친구로 규정한 자를 보호해야 하지 않느냐? 네가 어찌하여 내 명령도 없 이 적을 규정하는 것인지 설명하라.”

케이건은 입술을 떨었다. 그의 왕이 요구하고 있었다. 케이건 은 왼손을 아래로 뻗었다.

사모는 마루나래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래를 내려 다본 사모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몸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루나래는 등 뒤의 무게가 갑자기 사라지자 어리둥절하여 위를 쳐다보다가 기겁하여 펄쩍 뛰어올랐다. 놀라운 도약력에 의해 마 루나래는 사모와 같은 높이까지 이르렀지만, 대호에게는 안전하 게 사모의 몸을 붙잡을 손이 없었다. 성급하게 발을 뻗으려던 마 루나래는 그 동작이 사모를 파괴하고 말 것임을 깨닫고는 다시 발을 잡아당겼다. 땅에 내려선 마루나래는 무서운 포효를 뿜어올 렸다. 그동안에도 사모의 몸은 계속 떠올랐다. 갈바마리가 갑자 기 비명처럼 외쳤다.

”계단을!”

”올라간다!”

갈바마리는 심장탑 안으로 뛰어들었다. 입을 열어 말할 수는 없었기에 마루나래는 포효로써 갈바마리를 축복한 다음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그들 뒤로 다른 두억시니들이 달렸다.


사모는 곧 불안감을 버리기로 했다. 케이건이 그녀를 죽일 작정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원했다면 조금 전 하텐그 라쥬를 상대로 저지른 폭력을 그녀에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했 을 것이다. 그래서 사모는 추락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사모는 케이건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려 애썼다. 케이건은 그녀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받아내었다. 나늬에 탄 비형이 한 번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모는 비 형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날개 소리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모는 비형에게 미소를 지어 준 다음 다시 케이건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녀의 발이 심장탑 51층에 내려서게 되었을 때도 사모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다시 등 뒤에 걸었다. 그리고 사모 앞에 무 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를 내려다볼 수는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의 힘으로 자신을 끌어올린 거냐고 묻고 싶었 지만 사모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눈 앞에 있는 자를 자신의 전사인 한 인간으로만 취급하기로 결심했다.

”알았다. 설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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