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13)
사모는 자신의 목이 찢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눈을 감지 는 않았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뜬 채 케이건을 바라볼 생각이었 다. 하지만 시야를 가리는 은루 때문에 그녀가 볼 수 있었던 것 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사모가 들었던 것은 끔찍한 소음뿐이었다. 사모는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비볐다. 시야가 회복되자 사모는 케이건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알게 된’ 것이지 본 것이 아니었다. 사모는 케이건과 싸우고 있는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우쇠나 아기, 그리고 맞 서 싸우고 있는 케이건조차도 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기는 티나한의 등 뒤에서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계단에서 뛰쳐나가는 나가를 본 순간 아기는 그와 사모를 구하 기 위해 그들을 급속하게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사모는 움직이 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든 한 걸음만 움직였다면 그녀는 안전 하게 아기에게로 끌려왔을 테지만 사모는 바라기의 공격에 자신 을 내맡기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은 주어졌으되 방향이 주어 지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아기가 행한 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계단에서 뛰쳐나간 나가, 즉 카루뿐이었다. 그런데 카루는 아기 의 의도대로 계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카루는 아기의 힘을 받 으며 방향은 자신이 결정했다. 그리고 카루는 번갯불 같은 속도 로 움직이며 케이건을 공격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계단에서 뛰쳐 나갔을 때 그가 삼킨 소드락 덕분이었다.
카루는 ‘볼’ 수 있었다. 지독하게 왜곡되어 백일몽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카루는 케 이건과 사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드락의 급가속 상태에서 항진된 신체 능력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기적은 극 히 제한적이었다. 카루의 공격은 번번히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 다.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주위 에 호전적인 사이커가 춤추고 있다는 사실은 케이건을 자극하기 에 충분했다. 케이건은 노호하며 바라기를 휘둘렀다. 카루가 아기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면 케이건 또한 카루를 볼 수 없었겠지 만, 카루는 아기의 의도를 무시하며 움직이고 있었고 그래서 케 이건은 흐릿한 환상 같은 모습의 카루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 또한 엉뚱한 허공을 갈랐다. 카루의 속도는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빗나가는 공격을 교환했다.
카루가 자신의 의도를 무시하며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기는 카루를 움직이는 짓을 그만두려 했다. 카루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기는 그럴 수 없었다. 케이 건과 카루는 이미 싸움에 빠져들었고 만약 아기가 카루에게 가하 고 있는 빠르기를 제거한다면 카루는 당장 목이 떨어지고 말 것 이다. 아기는 어쩔 수 없이 카루에게 계속 힘을 가했다. 그 결과 로 벼락의 경주 같은 싸움이 펼쳐졌다. 스바치가 몸을 벌떡 일으 키며 외쳤다.
”저를 냉동 장치로 보내주십시오!”
그 소리에 놀란 케이건이 계단을 돌아보았다. 아기는 퍼뜩 스 바치를 돌아보았다. 스바치 또한 소드락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기는 외쳤다.
”안 돼! 못 본다!”
스바치는 입에 넣었던 소드락을 재빨리 뱉어내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가, 곧 헛손질을 하고 있는 카루를 보았다. 스바치는 이해했다는 듯이 빠르게 고개를 움직였다. 아 기는 조금 전 카루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주의 깊게 스바치를 움 직였다.
스바치는 눈깜짝할 사이에 냉동 장치 앞으로 이동했다. 시야가 순식간에 바뀌는 바람에 스바치는 잠깐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냉동 장치가 들어온 순간 스바치는 이해했다. 그는 황급히 냉동 장치의 왼쪽으로 움직였 다. 그때 그의 등에 업혀 있던 보트린이 닐렀다.
<스바치! 조심하십시오!>
스바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엄청난 힘을 지닌 손아귀 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케이건이 타오르는 눈으로 스바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오 른손은 바라기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무수한 나가의 생을 종결시 킨 그 공포의 검이 곧 스바치의 두개골을 향해 내려쳐질 판국이 었다.
”죽어라!”
”그만둬!”
허공에서 카루의 비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케이건의 왼발 조금 옆의 바닥이 폭발하듯이 부서졌다. 허공에서 다시 카루의 분개한 비명이 들려왔다. 케이건은 으르릉거리며 스바치의 몸을 확 밀어 젖히고 그 자리를 피했다. 곧 그가 서 있던 바닥이 보이지도 않 는 사이커에 의해 찢어졌다. 스바치는 짧은 순간 안도감과 해방 감을 느꼈다. 그의 발 아래에 더 이상 바닥이 없다는 사실을 깨 달을 때까지.
스바치는 심장탑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보트린을 업고 있었기에 스바치의 무게 중심은 뒤쪽에 있었다. 몸이 완전히 뒤집어지기 직전, 스바치는 사이커를 들어올렸다. ‘성급하면 안 돼.’ 아래로 추락하는 그 짧은 순간 스바치는 나가 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극도의 냉정 속에서 세심하게 사이커를 겨냥했다. ‘성급하면 안 돼.’ 시야에서 냉동 장치가 사라지기 직전, 스바치는 자신의 발을 겨냥하듯이 그것을 집어던졌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은 하늘과 하텐그라쥬의 뒤집힌 모습이었다. 스바치는 사이커가 제발 제대로 날아갔기를 바라며 그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그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제발, 카린돌을 구해 주세요!>
그 순간 스바치는 자신의 발쪽에서 놀라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 는 뒤집힌 딱정벌레를 보았다. 스바치는 눈을 부릅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스바치는 하텐그라의 하늘에서 도깨비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다행히 보트 린이 그를 도와주었다.
<수탐자입니다!>
스바치는 허우적거리며 손을 내뻗었다. 희망에 찬 그의 부릅뜬 눈에 도깨비의 얼굴이 크 게 들어왔다. 다음 순간 스바치는 극한 좌절감을 느꼈다. 마지막 구원이라고 믿었다가 느낀 좌절이었기에 그 좌절은 더욱 컸다. 도깨비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공포의 의미는 자명 했다. 도깨비는 스바치의 등에 업힌 보트린의 피투성이 몸을 보 고 있었다.
카루는 스바치가 떨어지는 것, 그리고 그의 손에서 뭔가가 날 아와 냉동 장치에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시야는 여전히 왜곡되어 있었고 그래서 카루는 스바치가 냉동 장치를 파괴했는 지 알지 못했다. 카루는 분개하며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 때 카루는 케이건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왜 이야기를 못한다고 생각했지? 카루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 주하며 사모에게 닐렀다.
<페이! 도망가십시오!>
눈물을 닦아내던 사모는 케이건과 싸우는 상대가 자신을 향해 니르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카루? 너인가?>
<그렇습니다! 도망치십시오!>
사모는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안 돼! 나는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 나는…….>
”케이건 드라카.”
케이건은 사모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바라보던 충 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적을 발견한 아라짓 전사의 격 노와 사냥감을 향한 키탈저 사냥꾼의 집중력으로 그녀를 노려보 았다. 그는 사모를 향해 덤비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헛손 질이긴 하지만 카루의 공격이 그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케이 건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죽일 테다!”
”케이건 드라카. 내가 너의 눈물을 마시도록 허락해 줘.”
케이건은 갑자기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 다. 사모는 은루에 젖은 볼에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부탁이야. 나는 나가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 시에 나는 너의 왕이잖아? 내가 너의 눈물을 다 마시고 죽으면, 나가를 용서해 주지 않겠어?”
어디로든 달려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아래로 추락하는 방향으 로 움직이게 되는 자신의 처지에 격분하고 있던 시우쇠는 사모의 말에 놀랐다. 시우쇠는 사모를 돌아보며 화염의 신음을 흘렸다.
”네가 신의 눈물을 마시겠다고?”
티나한의 등뒤에서 아기 또한 부리를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은루를 훔치며 웃었다.
”륜은 말했어.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을 너에게 보여주라고.”
”내가 준 것?”
케이건이 멈춰섰다. 카루는 그를 공격하려다가 잠시 기다리기 로 했다. 그는 주의깊게 케이건의 주위를 달리며 사태를 관찰했 다. 그리고 그제야 카루는 자신의 몸을 점령한 고통을 인지했다. 그의 옷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몸 곳곳의 비늘이 시커멓게 타버 렸다. 아기의 힘에 의해 움직이면서도 자기의 의도대로 방향을 바꿔버린 카루는 급격한 마찰에 의해 험한 꼴을 당한 상태였다. 카루는 고통을 억누르려 애쓰며 사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네가 준 것. 다른 신들도 그들의 선민 종족에게 무엇인 가를 준다고 하던데.”
케이건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자신을 죽이는 신은 도깨비들에게 불을 주었다. 도깨비들은 그들의 신만큼이나 불을 자유로이 쓸 수 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은 레콘에게 무기를 준다. 성년이 된 레콘은 최후의 대장간 에서 자신의 무기를 받는다. 발자국 없는 여신은 수호자들의 신 명, 즉 이름을 주었다.”
”그런 것이군. 알았어. 그렇다면 너, 아니, 어디에도 없는 신 이여. 당신 또한 당신의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겁니다.”
”나의 인간 같은 것은 없다.”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나는 왕으로서 내 전사 케이건 드라카에게 말해 주 겠다. 케이건 드라카. 어디에도 없는 신이 그의 인간에게 준 것 은 왕이다.”
”왕이라고?”
케이건의 고개가 갸웃했다. 사모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 너는 인간들의 눈물을 마시게끔 왕을 선물했다. 그리 고 최후의 아라짓 전사이자 아라짓의 마지막 왕족인 네가 지명한 나는 너의 적법한 왕이다. 나는 너의 눈물을 마시겠다. 그리고 나가에 대한 너의 증오와 함께 죽겠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 다. 너는 아직도 나가를 사랑하고 싶었던 거다.”
”모욕적일 정도의 헛소리군.”
”그렇지 않아. 오레놀 대덕은 신들이 변화를 재생산할 거라고 말했지. 지금까지는 변화가 없었어. 우리는 아직도 대확장 전쟁 당시의 말을 사용하고, 대확장 전쟁 당시의 생활 방식 그대로 살 고 있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그렇다면 너 또한 그 옛날의 너 그대로일 거야. 다르다는 것을 기쁨과 감사의 대상으로 여길 줄 아는 너. 나가를 사랑하고 싶었던 너. 네 속 가장 깊은 곳의 너는 그대로일 거야. 너는 요스비를 사랑했다.”
케이건이 숨막힌 사람처럼 말했다.
”요스비.”
”그래. 너는 요스비를 사랑했어. 그걸 부정하지는 않을 거야.”
케이건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에서 의심과 불안이 흘러나왔다. 사모는 말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준비했어.”
”준비했다고!”
거의 비명이었다.
”그래. 너는 나를 준비했어. 너는 위기에 처한 북부를 위해 나 를 왕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시 나가를 사랑하기 위 해서 나를 준비한 거야. 왜 나가일까? 북부의 왕으로 나가라니? 나가일 수밖에 없지. 나가가 아닌 다른 자는 불가능해. 너는 나 를 희생하여 네 눈물을 지우고 다시 나가들을 사랑해야 하니까.”
”내가…………, 내 눈물을 마실 왕을………, 준비했다는 것이군.”
”바뀐 것은 없어. 너는 나가를 사랑해.”
사모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조건 없는 수용의 자세 였다. 거기에는 자신의 죽음조차 수용하는 당당함이 있었다.
”나를 준비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겠어. 이제 내가 네 눈물을 마시고 죽겠어.”
티나한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륜을 위해 죽으려 했던 사모는 이제 모든 나가들을 위해 죽으려 하고 있었 다. 그녀는 진정코 왕이었다.
카루에게는 사모의 말이 기이하게 들렸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 기 때문에 소리가 그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알 수 있었고, 카루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케이건을 겨냥했다. 하지만 그 순간 사모의 말이 그를 주춤 하게 했다.
”그 대신, 나가들을 살려줘. 그들을 사랑해 줘.”
카루는 충격 속에서 비늘을 세웠다. 타버린 비늘들이 그를 고 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카루는 사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 든 나가가 살아나게 된다고? 카루는 격심한 번민을 느꼈다. 계속 되는 사모의 말은 그의 번민을 더욱 부채질했다.
”나가라는 나무에 삭풍을 불게 하지 마. 이 영원한 여름의 땅 키보렌에 겨울의 폭풍을 가져오지 마. 내가 단풍이 되겠어. 내가 낙엽이 되겠어. 케이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티나한은 눈앞이 부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거칠게 볏을 흔들 었다. 그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것인가? 이것은 모든 나가들을 살 려내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대가인가? 티나한은 판단할 수 없 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모 의 죽음은 평생을 따라다닐 아픔이 될 거라는 무서운 예감. 티나 한은 그것이 싫었다.
지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카루 또한 같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가들의 생존이라는 거대한 요구 앞에서도 카루는 그것을 허용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위해 번민했다. 그는 그런 이유를 정말 찾아내고 싶었다. 카루는 다시 사모를 바라보 았다. 그때 카루는 사모의 근처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왜곡된 시각을 저주하며 카루는 그것을 똑바로 보기 위 해 애썼다.
티나한이 폭풍처럼 외쳤다.
”안—돼}—!”
사모는 놀라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철창을 움켜쥔 채 계단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격통이 사모의 가슴을 관통했다. 사모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려 애쓰며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가슴 가운데서 피에 젖은 사이커의 칼날이 음습 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사모는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고개 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 한 나가가 서 있었다. 은빛에 물든 그녀 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모는 그 이름을 닐렀다.
<비아스 마케로우.>
티나한이 계명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