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21)
도시 외곽에 도달했을 때 키베인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하 텐그라쥬 수비군을 괴롭히고 있던 문제는 이제 대나무 군단의 병 사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거의 포기한 채 주저앉아 있던 하텐그 라쥬 수비군들 또한 다가오는 회오리에 놀라 다시 달리고 있었기 에 그 지점에서는 끔찍할 정도의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자들이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달렸기 때문에 서로 부딪히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화를 내다가 다시 공포에 휩싸여 달렸지 만,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의 머리를 들이받는 꼴 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희극의 광경이라 보기에는 너무 끔찍한 그 광경에 키베인은 비늘을 세웠다.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그 를 향해 닐렀다.
<대수호자님 아니십니까?>
키베인은 데오늬를 내려놓고는 니름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 다. 수호 장군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그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키베인이 다가가려 하자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더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어디가 어 딘지 모르게 되실 겁니다.>
키베인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수호 장군은 안도하며 닐 렀다.
<저는 수호 장군 인실롭입니다. 하텐그라쥬 수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도저히 제 책무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맴돌이입니다. 밤의 숲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입니다. 그런 일 이 왜 백주대낮에 일어나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화신들 중 누군가가 우리들을 이곳에 묶어놓기 위해 벌인 일 같습니다. 어쨌든 몇 발자국만 더 달려오시면 똑같은 처지가 되실 겁니다. 아, 대장군님!>
말에 탄 갈로텍이 키베인의 옆에 도달했다. 갈로텍은 달려오면 서 인실롭의 니름을 들은 듯 설명을 요구하지 않은 채 맴돌이 현 상이 일어나는 지대를 살폈다. 하지만 그 또한 그런 괴이한 사태 를 설명하거나 호전시킬 방법 같은 것은 떠올릴 수 없었다. 갈로텍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회오리를 돌아보고는 비늘을 부딪쳤다.
니름을 듣지 못하는 데오늬는 놀란 표정으로 나가들이 벌이고 있 는 기괴한 소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누군가가 격한 충격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을 알지 못했다.
케이건은 무릎을 꿇었다. 턱이 덜덜 떨렸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케이건은 저 편에 있는 광선들 사이로 보이는 한 여자를 보며 미칠 것 같은 격분과 고통, 애정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케이건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여인은 평범한 인간 여인이었다. 아마도 북부군에 속한 병사인 듯했지만 무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투 구 대신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황당하게도 화관이었다. 케이건 은 그 화관을 이루고 있는 꽃을 알고 있었다. 원추리였다.
케이건은 신음을 흘렸다.
”여름…….”
불과 몇 십 미터 앞쪽의, 분명히 시야에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여인은 그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케이건은 그 사실에 사무치는 억울함을 느끼며 그리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케이건은 그리미가 누구를 닮았는지, 그리고 냉동 장치에서 떨어진 신체의 얼굴이 왜 낯익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종족의 차이는 뚜렸했지만 그 얼굴에는 과거 그의 아내였던 여인의 얼굴이 그대로 담겨 있 었다.
그리미는 빙긋 웃었다.
”나늬들이 특별한 거야 전통이지만 이번 나늬는 정말 특이해.”
”이번…… 나늬?”
”그래. 저 나늬의 이름은 데오늬 달비야. 그리고 저 나늬는 미 모가 아니라 달리기로 모든 종족들을 따라오게 만들어. 정말 인 상적인 특징이야.”
케이건은 그리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 는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네가 어떻게 그녀를 닮은 거지?”
”나? 나는 보늬야. 보늬와 나늬가 닮은 거야 당연하지. 자매잖 아. 그리고 내가 보늬인 것도 이상할 것이 없지. 보늬는 모든 종 족에게 다 태어나니까. 우리 어머니도 보늬였어. 유료 도로당의 당주는 이름도 보늬였다지? 하지만 나늬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나 지. 그리고 데오늬 달비는 이 시간의 나늬야.”
그리미는 마침내 케이건이 두려워하며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 내었다. 케이건은 떨리는 눈으로 그리미를 바라보았다. 그리미는 빙긋 웃었다.
”그래.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나눠지.”
케이건은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는 혼 란과 두려움 속에서 그리미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은 계 속 그에게 되돌아왔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케이건이 그것 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케이건은 알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태 어나는 한 사람, 나늬였다.
그때 데오늬가 갑자기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케이건은 전율하는 두 팔을 앞으로 힘껏 내밀었다. 그리미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데오늬 달비가 갑자기 달리는 것을 본 키베인은 비늘이 서게 놀랐다. 그런데 조금 후 키베인은 더욱 놀랐다. 데오늬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나가들 사이를 똑바로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나가들을 혼란으로 몰아가는 현상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영 향도 끼치지 않는 듯했다. 키베인이 그 상황을 해석하려 했을 때 갈로텍은 이미 그 상황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모두들 저 인간을 따라가라! 공격하지 마! 따라가라! 그녀는 맴돌지 않는다! 심장탑으로 가! 모두들 심장탑으로 가!>
나가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데오늬를 따라갔다. 심장탑에 도달해서 하늘치의 등 위에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던 데오늬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부딪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누 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데오늬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어떤 인간 남자가 그녀를 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오늬 는 그 눈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눈은 그녀를 잘 안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 었다. 하지만 그 눈은 한없이 슬프기도 했다. 데오늬는 그 슬픔 을 걷어내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데오늬는 그 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기이한 확신을 느꼈다.
그 남자가 갑자기 옆을 돌아보았다. 데오늬 또한 그렇게 했다. 그들의 곁으로 나가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나가 병사들은 그들을 한번씩 돌아보았지만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갈로텍이 공격하 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로 케이건과 데오늬의 곁을 지나쳐 심장탑으로 달려갔다.
케이건이 보고 있던 것은 데오늬가 보고 있던 것과 달랐다. 케이건은 광선의 세계가 희미해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의 눈에는 광선들과 하텐그라쥬의 모습이 서로 뒤섞여보였다. 그 가 운데서 그리미 마케로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미 마케로 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떠나야겠군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린다면, 저는 그리미 마케로우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하지만 조금 전 보셨던 것은 그녀의 모습과 언동이 맞습 니다. 그녀는 대단한 천재지요. 저는 그녀를 보는 것이 즐겁습니 다. 그녀는 저의 존재를 깨닫고는 제게 자신의 모습을 하고서 당 신을 찾아가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도 미래에서 왔다는 거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잘 아는 사 람입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
그리미 마케로우, 아니 그녀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자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광선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주위를 빠 르게 둘러보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뚜렷한 형태와 정상 적인 질감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안겨 있는 여인의 느낌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건은 데오늬를 찾 았다.
데오늬는 케이건의 품에서 빠져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데오늬는 다시 다가올 것처럼 발을 꿈틀했지만, 다음 순간 냉막한 예의로 그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가로저은 데오늬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데오늬 달비입니다. 누구십니까?”
케이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꽉 움켜쥔 그의 두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원추리 화관을 쓴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여름이 었다.
케이건은 그녀를 안아야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케이건의 눈에 다가오는 회오리의 모습이 들 어왔다. 케이건은 처참한 여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입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가라.”
”네?”
케이건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가라. 회오리가 오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키베인이 퍼뜩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 보았다. 회오리는 이미 도시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키베인은 잠시 케이건의 눈치를 살폈지만 케이건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키베인은 데오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데오늬는 한 번 휘청하다가 키베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이건을 돌아 보았다.
케이건은 키베인과 데오늬가 한없이 멀어질 때까지 꼼짝도 하 지 않은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가없는 슬픔이 그의 가슴을 미어 지게 했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늬를 주었다.’
”그 쌍신검, 나가 살육자의 검이지?”
케이건은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대로 한가운 데 말에 탄 나가가 서 있었다. 나가는 한량없는 증오로 비늘을 부딪치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그 분노에 공명하 여 함께 분노했을 테지만, 케이건은 말없이 나가를 바라보았다. 나가가 말했다.
”나는 갈로텍이다. 세페린의 오라비지.”
갈로텍은 그 사실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듯이 말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케이건 의 반응을 기다리던 갈로텍은 케이건이 세페린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쳐버릴 것 같은 분노가 그를 휘감았다. 갈로텍은 말 에서 내려섰다. 그의 내면에서 주퀘도가 입을 제어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갈로텍은 입을 내어주지 않았다. 갈로텍은 입을 내어줄 수 없었다. 그는 격분하여 외쳤다.
”머리를 재생시킨 나가를 기억하나!”
”기억해. 네가 그녀의 오라비라는 거냐?”
”그렇다! 내가 세페린을 부활시켰다. 그런데 네놈은 내 누이를 두 번 죽였어!”
갈로텍은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케이건을 똑 바로 겨냥했다.
”너를 찾아 이 전쟁을 일으켰다. 북부의 저 비늘 서는 땅을 방 랑하며 오로지 너만을 찾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곳 하텐그라쥬 에서 너를 만나는군.”
케이건은 천천히 세페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다시 나타난 그녀는 두억시니만도 못한 존재였다. 케이건은 갈로텍을 바라보 았다. 저 나가가 그녀를 재생시켰다고? 자신의 누이를 복수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괴물로 만들었다고?
케이건은 부드럽게 말했다.
”어쩐지 우리는 서로 닮은 것 같군.”
갈로텍은 케이건의 말에 기가 막혔다. 그는 격분하여 닐렀다.
<그 검을 뽑아!>
너무도 분노한 갈로텍은 그만 말 대신 니름을 사용했다. 그 순 간 주퀘도는 입을 빼앗았다. 갈로텍의 입에서 절망에 찬 외침이 튀어나왔다.
”멍청아, 카린돌이 오고 있다!”
다음 순간 갈로텍은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