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3)
용이 처음 도달한 곳은 6,800년 전의 라호친이었다.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쓸쓸한 풍경을 둘러보던 용은 그것이 쓸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 았다. 눈은 선혈처럼 붉은 빛이었고 거대한 설원은 보랏빛의 퇴 적이었다. 색채 외에 다른 것들도 혼돈되어 있었다. 설원에서 기 대하기 힘든 향기들이 용의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썰물이 빠 진 모래밭에서 풍겨나오는 내음, 막 껍질을 벗긴 나무에서 흘러 나오는 방향 등이 풍경을 무시하며 사방을 적셨다. 그러나 용은 크게 괘념치 않은 채 자신을 불러낸 자를 찾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스화리탈은 다섯 가닥의 꼬리를 설원에 뿌려둔 채 주위를 휙 휙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무정물들뿐이었다. 설원은 완만한 구릉 들로 뒤덮인 채 한없이 멀어지고 있었고 하늘은 무거워 보였다. 아스화리탈은 잠시 주의력을 잃었다. 그런 방심 상태에 빠져 있었기에 용은 자신의 배 부분에서 갑자기 걸어나온 사람의 모습 에 기겁했다.
아스화리탈은 세 장의 날개를 모두 펼쳤다. 번개가 튀어오르며 순식간에 아스화리탈의 날개들은 수백 미터의 벼락 줄기로 바뀌 었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의 배에서 나온 사람은 태평하게 걸어갔 다. 아스화리탈은 의아한 기분으로 자신의 앞쪽으로 걸어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득, 아스화리탈은 그 사람이 자신을 ‘관 통해야만 그런 자세로 걸어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용은 긴목 을 구부려 그 사람의 얼굴을 옆에서 바라보았다.
주위의 풍경처럼 남자의 모습 또한 기괴했다. 아스화리탈은 그 런 색깔의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인간으로 보였지만 그 얼굴은 초록빛이었다. 덥수룩한 남색 수염이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어 용모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두터운 옷은 조악하다 할 정도였지만 그 아래에는 땅딸막하지만 강인 한 몸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발에는 커다란 눈신을 신어 눈밭에 발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고 내딛는 규칙적인 걸음 은 남자가 눈신과 설원에 익숙함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용 의 존재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걸어갔다. 용은 시험삼 아 앞발로 남자의 어깨를 건드렸다.
아스화리탈의 발은 남자의 어깨를 지나쳤다. 어르신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용은 그 사실에 대해 숙고했다. 그때 규칙적으 로 걸어가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남자는 의아한 듯 주위를 둘 러보았다. 그의 입이 열렸고, 매우 탁하지만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퀴도부리타?”
순간 아스화리탈은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남자는 주위 에 무관심한 기질 때문에 부족민들에게 하늘치라는 이름을 얻었 다. 그의 부족은 ‘하늘치’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태평하게도 용 근을 먹지 않고 용으로 키워버린 그 무심함에는 당혹을 금치 못 했다. 이 시절에도 용근은 잡초처럼 흔하지는 않았지만 6,800년 후처럼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하늘치의 부족은 모두 용 근을 먹음으로써 완전 동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완전 동화는 라호친의 살인적인 환경에서 부족을 보호하는 지혜였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한없이 예민했고 그 때문에 서로에 대한 어떤 종류 의 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통해 부 족은 군생체를 이루고 있었고 바로 그 군생체의 힘으로 발톱과 이빨을 곤두세운 채 달려드는 라호친의 소름끼치는 환경에 대항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용근을 내버려두어 용으로 만들었고 그 용에게 퀴도부리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족민들은 그런 사태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족민들은 의혹 과 불안 속에서 하늘치와 그의 용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부족민 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성벽, 그리고 그가 용근을 먹지 않아서 부족민들에 대해 무심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늘치는 용근을 먹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크게 싸운 퀴도부리타가 어딘가로 도망쳤고 그래서 하늘치는 넌더리를 내며 그 어린 용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용근 을 먹었더라면 용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일 것 이다.
하늘치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스화리탈은 그 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치 는 문득 자신이 설원 한가운데 서서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내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스화리탈은 그에게 퀴도부리타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 쳐주고 싶었다. 아스화리탈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다시 부름이 들려왔다.
’미안. 아직 익숙하지가 않군. 네가 들었던 것은 메아리야. 6,800년 전의 과거에 부딪쳐서 돌아온 반향이지. 자, 다시 날아 라.’
아스화리탈은 날개를 폈다. 다시 날아오르기 전 아스화리탈은 ‘하늘치’를 흘끔 바라보았다. 6,800년 후 남자의 이름은 퀴도부리 타에 관련된 흥미로운 헛소문을 만들어낼 것이다. 아스화리탈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