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9)
오레놀은 먼저 똑똑한 교위들과 장수들에게 상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잠시 후 그들 중 대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자들이 나 타났고 그들은 하늘치의 등까지 이르는 거대한 계단을 보게 되었 다. 물론 그들이 본 계단의 모습이 똑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들은 하늘치의 등으로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오레놀은 그 자들에 게 다른 자들을 가르치도록 지시했다. 그럼으로써 하늘치의 등에 오르는 방법을 전달하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모든 북부군이 하나의 계단에서 병목 효과를 일으키는 일 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신만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따라 서 북부군은 날아오르는 새떼와 같은 모습으로 하늘치의 등 위로 걸어 올라갔다. 따라서 그들을 지체시킨 것은 정체가 아니라 다 른 문제 때문이었다. 북부군의 시간을 소모시키는 것은 도통 소 망할 줄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망을 무가치한 공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에 지나치게 익숙한 자들이었고, 그래 서 하늘치의 등에 이르는 계단을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함 께 계단을 올라가며 그들을 이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한 사 람은 하나의 계단만 밟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자 신의 계단을 만들어내어야 했다. 어느샌가 북부군의 퇴각은 소망 할 수 있는 능력의 시험이 되고 있었다.
가장 끈질긴 교위와 가장 입이 험악한 부위들이 소망할 줄 모 르는 자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보며 오레놀은 잠시 숨을 돌릴 시 간을 얻었다. 그러자 그 곁에 서서 모든 북부군이 각자의 계단을 따라 하늘로 걸어올라가는 장대한 모습을 바라보던 하이드가 말했다.
”그런데 이제 올라가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왕께서 부탁하신 일을 하시려면.”
”예. 이제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높은 계단을 밟 아 올라가는 것은 힘이 너무 들 것 같군요. 저는 조금 전 즈라더 라는 분께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함께 올라가시겠습니까?”
”아니요. 라수를 데려가십시오. 그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저 는 병사들을 다 올려보내고 마지막에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레콘 즈라더는 자신의 도끼를 등에 맨 다음 오레놀과 라수 규 리하를 양쪽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이 올라 갈 계단을 그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즈라더가 보게 된 계단은 한 단의 높이가 20미터 가까운 거대한 것이었다. 다른 종족에게는 도무지 계단으로 보이지 않을 거대한 물건을 만 들어낸 즈라더는 씩 웃은 다음 위로 뛰어올랐다. 허공을 밟고 올 라가던 인간 병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즈라더는 단숨에 하늘치 의 등 위에 올랐다. 라수 규리하는 먼저 올라와 있던 병사들이 손으로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자신들이 있는 곳에 경외감을 느끼 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라수 규리하는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하늘치의 등 위는 사 람들의 역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절대로 다가설 수 없는 비경으 로 인식되어온 장소였다. 그리고 풀 한 포기도 나무 한 그루도 없는, 그리고 살아 있는 평야의 모습은 그런 비경의 느낌을 충분 히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키보렌에 들어온 이 후로는 몸단장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다 높은 계단을 올라오느라 지쳐버린 병사들이 주저앉아 두런 거리고 있었다. 라수는 그것이 마침내 품에 안게 된 꿈의 여인에 게서 현실의 악취를 맡는 것 같은 불쾌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수는 곧 그런 생각을 떨쳐내었다. 땅바닥에 앉아 있는 병사들은 단순히 지친 병사들이 아니라 승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었던, 아니 그런 일을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행군을 끝까지 따라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하늘치 또 한 사람들의 단순한 부주의에 의해 그 신비를 훼손당할 가냘픈 존재도 아니었다. 라수는 반드시 그러리라 확신하며 오레놀을 바 라보았다. 오레놀은 즈라더에게 말하고 있었다.
”올라오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즈라더 피곤하지 않 다면 내려가서 계단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저희들처럼 데려 와줄 수 있겠습니까? 다른 레콘들과 함께 말입니다.”
”알았어.”
즈라더는 곧장 몸을 돌려 뛰어 내려갔다. 그때 저편에서 병사 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 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스님! 올라오셨군요. 그런데 우리 대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아, 롭스, 티나한은 다른 수탐자들과 함께 하텐그라쥬로 들 어갔습니다.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지금 그 분은 심장탑에 계실 겁니다.”
”음. 그러면 모두들 태운 다음에 심장탑으로 다가가도록 하겠 습니다. 아래에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제 곧 다 올라올 겁니다. 하지만 심장탑으로 다가가는 것은 좀 걱정되는군요. 지금 거기서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롭스는 피식 웃었다.
”스님. 이곳에서는 물론 발 아래의 광경이 잘 안 보이긴 합니 다만, 심장탑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심장탑은 우리들이 있는 높 이보다 몇 십 미터쯤 낮을 뿐이니까요. 이곳에서는 그쪽이 아주 잘 보입니다.”
오레놀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심장탑 쪽을 바라보았다. 라수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깜짝 놀랐다. 오레놀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저게 뭡니까?”
부러진 심장탑 상공에서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 은 일견 구멍처럼 보였다. 허공에 뚫린 경계 없고 형체 없는 구 멍이었다. 경계를 뚜렷이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것의 크기는 무지 무지했다. 그리고 그 구멍 내부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불 길과 번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무엇이 흐릿하게 번득였다. 오 레놀은 그 구멍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는 심장탑이 있었고 그곳에는 이 먼곳에서도 뚜렷이 알아볼 수 있는 시우쇠가 두 팔 을 하늘로 들어올린 채 서 있었다. 롭스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음. 스님. 저는 스님이 올라와서 설명해 주길 바랐습니다. 저 는 그 기둥 읽는 일에 도통 소질이 없어서요.”
라수가 말했다.
”저 모습은 악타그라쥬에서 시우쇠 님이 가짜 태양을 만들어낼 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군요. 하지만 저건 도무지 불덩이라고 생 각되지는 않는데요.”
오레놀이 바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기둥을 읽어야겠습니다. 라수. 당신도 좀 도와주십시오.”
라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어갈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라수 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레놀이 당황한 얼 굴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레놀은 곧 자신의 머리를 탁쳤다.
”어디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기둥을 가져오면 되니까요. 당 신의 앞쪽에 다섯 개의 기둥이…… 아니, 꼭 기둥일 필요도 없군 요. 그냥 벽이어도 상관없겠습니다. 당신이 읽을 수 있는 글이 새겨진 구조물이 나타나길 원하십시오. 일단은 당신이 잘 아는 책의 내용으로 시작해 보지요.”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생각대로, 하늘치 등 위에서 만나게 될 신비는 충분히 풍요로운 것이었다.
”익숙해질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만, 지금 가장 부 족한 것도 시간이겠지요. 알겠습니다.”
라수는 적당한 크기의 벽을 시험삼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훌륭한 부조로 장식된 벽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벽에는 음각으 로 정교하게 글이 새겨져 있었다.
라수는 그 글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고, 읽어본 다음 자신이 제 대로 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가장 소름끼치는 작품으로 자평하는 『왕국의 몰락』서 문이 황공하리만큼 훌륭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라수는 그 훌 륭한 글씨가 혹 자신의 허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조심스럽게 오레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오레놀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공하셨습니까?”
라수는 오레놀이 자신의 벽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레놀은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시간이 없으니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처음에 는 단어를 몇 개씩 바꿔보십시오. 구조물도 만들었으니 단어를 바꾸는 것쯤은 간단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만 꼭 그렇지 는 않습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글의 일부가 바뀌면 그것을 오류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라수는 자신의 글을 사용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바꾸는 것은 어렵겠지만 자신의 글을 바꾸는 것은 간단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레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전체 문장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은 행 간의 의미들을 보다 뚜렷하게 하고 그 의미들을 이용하여 전체 논리를 체계화하십시오. 예. 아마도 책을 정독하는 것과 비슷하 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이 있 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터득한 것은 이 방법뿐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을 그대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이용 하여 자신의 머릿속에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 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당신이 만들어낸 구조물은 그 머릿속의 책을 현실로 시각화시켜줍니다. 그러다가 당신이 예상치 못한 문 장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신 의 직관력이 찾아낸 문장이거나 결론일 겁니다. 그렇잖으면 문장 들 자체가 스스로 이끌어낸 결론일 수도 있지요. 그런 문장들을 이용하여 다시 전체의 일을 반복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완벽하게 체계화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던 라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는 것을 알게 되고는 황급히 말했다.
”그걸로 끝입니까?”
”끝입니다. 간단한 일처럼 들리겠지만 그 효과에는 놀라실 겁 니다. 익숙해지면, 당면 과제에 부합하는, 혹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되는 글이나 문장을 새겨놓고 해보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하늘치는 도대체 뭡니까? 스님은 이미 그것을 알게 된 것 같으니 설명해 주시면 좋겠군요.”
오레놀은 다급한 심사를 드러내며 빠르게 말했다.
”이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버린 우리의 장형(長兄)이 우리들 을 위해 남겨둔 유산입니다. 우리는 이제야 그들에 대해 알게 되 었기에 그들을 다섯 번째 종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만, 사실 그들은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오레놀은 곧 허공을 응시했다. 라수는 대덕이 자신의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라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왕국의 몰락을 다 시 바라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 라수는 자신이 완전히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글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의 글을 바꾸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라수는 오기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 의 논리를 스스로 공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