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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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4)


탁자 위에 뿌려진 한줌 햇살이 꾸준히 나뭇결을 적셨다. 키보 렌의 대수호자 키베인은 탁자 위에 올려둔 자신의 팔뚝까지 번져 오는 햇살을 보며 말했다.

”분명히 네 신은 다시 윷가락을 던지기로 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시모 그라쥬의 번영 또한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키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변화지요. 북부 와 남부가 이런 식으로 만나 서로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는 것은.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지금 일어나려 하고 있는 전쟁 또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전쟁 또한 변화지요.”

라수는 슬픔 속에서 동의했다. 변화가 가져오는 것이 언제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키베인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은 보수주의자와 전통주의자들의 괴로움이 될 만한 시대겠지요. 저는 변화 그 자체에는 찬성합니 다. 결국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일이 오늘의 단순한 확 장에 불과할 뿐이라면 삶은 의미를 잃습니다. 그런 큰 찬성 속에 서 저는 전쟁에도 찬성합니다. 그것은 분명 변화니까요. 하지만 그 찬성은 상대적인 것이며 저는 정체보다는 전쟁이 낫다는 의미 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변화들을 고를 수 있는 능력 을 발휘함으로써 고결함을 가꿀 수 있습니다. 사도. 도대체 여신 의 힘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여신은 힘을 해방시켰습니다. 그 힘을 다시 거둬들이는 것은 앞으로 17년 후입니다.”

키베인은 깜짝 놀랐다.

”17년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17년 동안 수호자들은 여신의 힘을 사용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깁니다! 그건 지난 전쟁과 같은 전쟁을 네 번이라도 치 를 수 있는 기간이군요. 왜 17년 후인 겁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것에 대해 말씀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지 금 말씀드린 것도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키베인은 손가락을 세워 탁자를 딱딱 두드렸다. 햇빛 속에서 그의 손가락을 덮은 비늘들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늘 속에 있는 대수호자의 얼굴은 어두웠다.

”저는 17년 동안 지도그라쥬를 억제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수. 17년은커녕 17개월 후에도 지도그라쥬가 전사의 영광이 아닌 평 화의 따사로움을 니르고 있는다면 그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라수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렇게 다급합니까?”

”그들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곧 여신의 힘 이 자신들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입니다. 나는 차라리 당 신의 말을 그들에게 닐러주고 싶군요. 17년 후라고 니르면 그들의 다급함이 좀 수그러들지도 모르니까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건 안 됩니다. 이 회담장을 나선 후에는 대수호자님께서도 그 사실을 잊어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안할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간신히 되살아나고 있는 북부에는 나가의 또 한 번의 공세를 막아낼 힘이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다시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대수호자님. 평등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안다고 믿습니다만 당신의 말을 듣고 싶군요.”

”평등은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공평하 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증명에 성공하지 못한 자까지 살려 주는 것은 이미 불평등한 일입니다. 대수호자님. 신 아라짓은 자 신을 증명할 것입니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사라질 뿐입니다. 그 들에게 살짝 전달하십시오. 지나가는 니름처럼, 혹은 암시적으로, 그러나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하십시오. 5년 전, 그들 이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라수 규리하가 어떤 일을 했는 지를 상기하라고. 나, 라수 규리하는 키보렌의 심장에 작살검을 겨누었고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신 아라짓의 사도를 바라보던 키베인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전쟁을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이군요.”

”아니요. 나는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가망성이 없는 일이라고 판명될 경우 미련을 갖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나는 작살검을 준비할 겁니다.”

키베인은 좌절이 묻어나는 동작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동 안 그렇게 앉아 있던 키베인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제발 그들이 이성을 가지고 당신을 평가하기 를 바랍니다. 고소리 의장님과의 회담 시간을 더 뺏어서는 안 되 겠지요.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주의하십시 오. 대호왕에 대한 암살 계획이 있는 것 같습니다.”

라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대호왕을 시해할 수는 없습니다. 최후의 아라짓 전사 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방법으로 왕의 심장을 수호했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이고 난폭한 방법 을 동원하면 심장을 적출한 나가 또한 죽일 수 있습니다. 하늘누 리가 시모그라쥬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지도그라쥬에 서 사라진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다. 어쩌면 거칠고 조악한 방법 이 동원될지도 모릅니다. 때론 정교한 계획보다 그런 임기응변 같은 계획이 더 저지하기 힘들지요.”

”감사합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수호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라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났다. 하지만 문쪽으로 걸어가는 대신 대수호자는 잠시 제자리에 선 채 멍하니 라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피로해 보 였다. 라수는 뭐라 위로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 대수호자는 가볍게 말했다.

”우리는 과도기에 있고, 변화라는 것은 너무 끔찍합니다. 변화 가 더 낫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을 모두 포용하기는 어렵군요. 17 년만 버텨보도록 합시다. 그 후에도 변화는 계속되겠지만 우리 세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때까지인 듯하군요.”

”동감입니다. 대수호자님. 17년 후에 대수호자님을 다시 뵙고 싶습니다.”

키베인은 대답없이 미소를 보냈다. 그는 옷차림을 만지작거린 다음 주저없는 걸음으로 회담장을 나갔다.

대수호자가 밖으로 나간 다음 라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말 하기도 싫을 만큼 기운이 빠진 상태였고 고소리 의장과의 회담을 내일로 미루는 대안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별 대단한 회담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소리 의장은 개량형 도 깨비 감투가 시모그라쥬 내에서 사용되지 않기를 원했고 라수는 거기에 얼마든지 동의할 작정이었다. 도깨비 감투가 최고의 첩자 를 위한 도구이리라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라수는 좀 서툴더 라도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첩자를 더 높이 칠 것이며, 그 런 맥락에서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도깨비 감투 착용자는 라 수에게는 별로 매력적인 첩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온통 니름으로 이루어지는 나가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도깨비 감투를 썼건 쓰지 않았건 불가능하다. 라수는 고소리 의장에게 얼마든지 동의해 줄 작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라수만 아는 생각일 뿐이며, 회담은 아 마도 건네주어도 무방한 대가를 이용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 내는 라수의 정치적 기술이 펼쳐지는 향연장이 될 것이다. 라수 는 벌써부터 진절머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결국 회담은 세 시간 후에 끝났다. 라는 막심한 피로를 느꼈 지만 얻기로 작정했던 것을 거의 다 얻었기에 만족감을 느꼈다. 라수의 피로감은 얼굴에 드러날 정도였고, 그래서 세미쿼와 무핀 토는 라수가 시모그라쥬 대사관에 머물지 않고 곧장 하늘누리로 돌아갈 작정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투덜거림을 자제했다. 세 사람은 일몰이 내리는 시모그라쥬의 외곽으로 빠져나가 정박 중인 하늘누리로 향했다.

시모그라쥬 교외에는 거대한 하늘치가 조용히 떠 있었다. 그것 은 신아라짓의 이동수도(移動首都)였으며 도깨비들의 온갖 기발 한 발명품이 더해진 공중 요새이기도 한 하늘누리였다. 하늘치의 등 위에서는 상상력만으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은 상상한 자 본인에게만 유효하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노포를 상상하더라도 그 노포가 발사한 화살은 적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 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들이 만들어내어 하늘치 등 위에 부착한 물건들은 비록 그 작동 원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 며 그 외형만 보고는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유감없이 효과를 발휘했다. 라수 규리하처럼 움 직이는 계단을 상상할 능력이 없는 세미쿼와 무핀토는, 그래서 승강기에 오르며 그것을 만든 도깨비들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그 들은 라수처럼 근사한 풍광을 보며 올라갈 수는 없었다.

하늘치 유적을 사용하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라수는 상상력의 일부만으로도 간단히 자동 계단을 만들어낼 수 있었 다. 그는 자신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계단에 몸을 실은 채 발 아래로 서서히 낮아지는 시모그라쥬와 도시를 둘러싼 숲과 늪지 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땅에서는 일몰이 완료되었지만 하늘로 올라감에 따라 라수는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햇빛 속에서 어두운 땅을 내려다보는 것은 라수에게 묘한 슬픔을 느끼 게 했다. 키베인의 고발은, 라수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의 확인 에 불과했다.

환상벽과 나눈 대화에 의해 라수는 이미 지도그라쥬의 동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전쟁 재발 시점까지 명확하게 예측 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라수는 그것이 머지 않았으리라 생각하 고 있었다. 키베인이 내어놓은 17개월이라는 말은 그를 좀 놀라 게 했지만 그 놀람도 예상치 못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미 1년 전 부터 라수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 북부 곳곳의 비밀 장소에 하늘 누리의 보급소를 건설하고 있었고 또한 티나한의 하늘치 유적 발 굴단은 라수의 요청에 따라 두 번째, 세 번째 하늘누리가 될 수 있는 후보 하늘치를 고르고 다녔다. 시모그라쥬에 도착하기 직전 라수는 티나한으로부터 괜찮은 하늘치를 발견했음을 보고받았다. 그가 그토록 키베인을 피했던 것은 키베인에게 행동할 기회를 주 기 위해서였다. 라는 한계선 이남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 아라 짓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유력자가 생각하는 협조자가 아닌 행동 하는 협조자로 바뀌길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은 라수를 슬프게 했다. 라수는 자신을 추 슬렀다.

’17년만 버티자. 그때까지도 살아 있다면, 웃으며 하인샤 대사원에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말자. 견디기 힘든 일들이 많 이 있겠지만, 앞으로 17년만 버티면 된다.’

그리고 하늘치의 등 위에 도달한 라수는 첫 번째 고난이 기다 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라수의 질문을 받고 대호왕의 위치를 보고한 병사는 라수의 얼굴이 확 바뀌는 모습에 겁을 먹었다. 라 수는 자신을 억누르려 애쓰면서 다시 확인했다.

”폐하께서 어디로 가셨다고?”

”그리미가 뇌룡공을 보고 싶다고 졸라서……………, 직접 마루나래에 태우고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도님.”

라수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천경유수(天京留守)에 게 달려갔다. 천경유수는 하늘누리를 안전 속도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라는 라수의 명령에 당황했다. 정도 이상의 속도를 내더라 도 하늘치에게는 별 무리가 없지만 그 위에 건설된 각종 구조물 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현명한 사람이었던 천경 유수는 하늘누리를 안전 속도로 움직이는 대신 딱정벌레들을 출 동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라수는 자신이 그 생각을 떠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그 제안을 수락했다.

하늘누리로부터 서른 마리의 딱정벌레가 도깨비와 아라짓 전 사들을 싣고 날아올랐다. 그들의 목표는 하텐그라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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