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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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4)


<넌 내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없어.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넌 나를 돕길 원했고 그걸로 나는 만족해. 더없이 고맙게 생각해. 넌 내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어. 나를 죽인 건 네가 아냐. 나를 죽인 건 비아스 마케로우야. 넌 책임이 없어. 넌 책임이 없어. 넌 책임이 없어.>

<내 이름을 잘 들어.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나에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비아스는 그저 증오하던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비아스는 내 사명까지도 파괴했어. 하지만 난 비아스에게 내 목숨은 내주었을지언정 내 사명까지 파괴하게 하지는 않겠어. 그러니 너에게 부탁하겠어. 내 사명을 대신 완수해 줘. 내 마지막 부탁이야.>

화리트는 륜이 친구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죄책감에 평생토록 시달리는 것은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륜은 경악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닫을 수는 없었다.

<부탁・・・・・・ 뭐지?>

륜의 죄책감을 완전히 억압했다는 자신이 들자 화리트는 다시 하나의 이름으로 일렀다.

<북쪽으로, 계속 북쪽으로 달려가. 아주 거대한 강을 만날 거야. 무룬 강이지. 거기서 세 명의 불신자를 만나게 돼.>

<불신자라고!>

<그래. 도깨비와 인간, 레콘이야. 너를 안내할 자지. 노래를 불러야 해.>

화리트는 다시 정신을 둘로 나눠 자신이 배운 노래를 륜의 정신 속에 심어 놓으며 일렀다.

<그게 신호야. 그러면 그 불신자들이 너를 데리고 한계선을 넘을 거야. 내 배낭을 가져가. 그 속에 도움 될 물건들이 있어. 하인샤 대사원의 쥬타기 대선사(禪師)를 만나. 그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줄 거야.>

륜은 이 충격적인 이름에 놀라 화리트를 바라보았다. 화리트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알고 있던 그 충실하고 보수적이고 언제나 도덕적인 이름만 하는 수련자 화리트는 사실 음모꾼이야. 내 연기가 괜찮았어?>

<인간에게 무엇을………, 왜?>

<부탁이야. 이건 나가를 위한 일이야. 길게 이를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이르겠어. 넌 한계선 이남엔 적이 없다고 일렀지? 적은 심장탑에 있다고 일렀지? 그때 너는 요스비에 대한 일을 이른 것이겠지만,>

륜의 모든 정신을 들여다본 화리트는 요스비에 대한 사실들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때 너는 진실을 이른 거야. 나가의 적은 심장탑에 있어.>

<나가의 적이…..?>

<그래. 너는 인간들과 힘을 합쳐 나가의 적을 물리쳐야 해. 그건 너만이 할 수 있어.>

<나만이? 어째서?>

화리트는 다시 한번 륜의 신명(神名)을 불렀다.

<왜냐하면 넌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니까.>

륜은 굳은 얼굴로 화리트를 바라보았다. 고통 때문인지 화리트의 눈에선 다시 은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웃고 있었다.

<이건 수호자나 수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랑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네가 수련자가 아니라고 이르지 마.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나는 네가 왜 수련자 지위를 반납했는지 항상 궁금했어. 이젠 알겠군. 요스비 때문이었군.>

륜은 화리트가 요스비에 대해 안다는 사실에 충격받지 않았다.

충격받을 만큼의 판단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를 죽인 건…………, 수호자들이었어.>

<그래. 그래서 더 이상 수련자로 있을 수 없었던 것이군.>

<맞아. 화리트. 맞아. 나는 견딜 수 없었어.>

<알겠어. 하지만 너는 신명을 받은 수련자였어. 넌 발자국 없는 여신의 이름을 알아. 너의 여신은 라르간드지. 라르간드라고 부르면, 넌 여신을 부를 수 있어. 네가 수련자건 아니건 상관없어. 여신이 네게 준 건 이름이지 지위가 아니니까. 이름만이 중요한 거야.>

륜은 다시 충격을 받았다.

<정말이야?>

<그래. 네가 남아서 좀 더 공부를 했다면 알 수 있었을 거야. 넌 여신을 부를 수 있어. 여신이 네게 이름을 줬으니까. 하인샤 대사원에 가서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것과 관련이 있지. 그러니 너에겐 자격이 있어. 게다가…>

화리트는 고통 어린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 친구야. 다른 자격자를 찾을 수 없는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너처럼 자격도 있고 믿을 수도 있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정말 행운아인 것 같군.>

륜의 눈앞에 은빛이 흐렸다. 무심코 화리트의 눈을 닦으려 했던 륜은 그 은빛 눈물이 자신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화리트는 피로한 정신으로 일렀다.

<이제 가.>

<화리트, 일어나야 돼. 넌 나을 수 있어. 사람들을 부르겠어.>

<안 돼.>

화리트는 자신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로 일렀지만, 륜은 사람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이름으로 알아들었다. 아직까지도 륜의 정신은 열려 있었고 그래서 화리트는 륜의 오해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화리트는 그 오해를 해소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피곤했다. 다른 것을 더 원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화리트는 륜이 거부할 수 없는 지배력을 행사했다.

<가!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륜은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달려 나갔다.

홀로 남게 된 화리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등의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추위 같은 것이 사방에서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왔지만 화리트는 그 추위가 포근하다고 생각했다.

화리트는 자신이 륜을 이용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화리트에게 사명의 중요성 같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화리트는 륜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성공 여부를 알지도 못할 것이다.

화리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그것은 죽음의 공포 앞에 위엄을 지킬 수 있는 화리트의 도구였다.

그래서 화리트는 공포 없이 침착하게 자신의 여신을 부를 수 있었다.

세파빌, 나의 여신이여.

화리트는 시야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희게 빛나고 있었으며 동시에 암흑이었다. 다시 은빛 눈물이 동공을 덮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화리트는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리트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빛나면서도 어두운 어른거림을 향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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