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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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10)


륜은 서서히 다른 일행에게 익숙해졌다. 그것이 ‘서서히’ 이루어진 까닭은 륜이 조심성 많고 주의 깊은 성격이어서가 아니다. 그와 다른 일행들의 의사 전달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륜은 자신이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까진 생각하진 않았지만 상황에 어울리는 농담 한두 마디 정도는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 믿음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륜은 언제나 니름으로 농담을 건넸고, 주위의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했다. 그가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언제나 가장 재미있는 순간이 지나간 후였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비형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작용했다. 비형은 언제나 농담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형은 도깨비다운 슬기로움을 발휘하여 말이 아닌 표정이나 동작으로 륜을 웃게 만드는 재주를 습득했다.

륜은 도깨비와 레콘에 대해 매일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사실을 즐겼다. 하지만 마지막 일행인 인간에 대해서는 언제나 모호한 기분밖에 느낄 수 없었다. 케이건의 해박함은 비형과 티나한에게는 유쾌한 놀라움으로 다가왔지만 륜에게는 불만거리로 다가왔다. 일찍이 티나한과 비형을 당황하게 했던 ‘케이건의 친절’은 륜에겐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티나한이 닷새 동안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그리고 그때마다 처음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똑같은 대답을 차분히 들려주는 케이건을 보았을 때 륜은 마침내 분노를 터뜨렸다.

륜은 요스비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케이건을 윽박질렀다. 륜은 자신이 요스비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거절했다. 그것은 비형과 티나한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것 같은 케이건이 그렇게 완강하게 대답을 거절하는 모습은 비형에게는 신비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것이 부끄럽기 때문일까?”

비형은 어떤 추측을 떠올렸다. 혹 케이건은 증오의 대상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있는 것일까? ‘나가들이 원하지 않기에’ 케이건은 ‘나가들을 토막 내어 삶아 먹는다.’ 그리고 요스비라는 나가는 ‘케이건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왼팔을 잘라 먹였다.’고 했다. 비형이 알고 있는 사실들만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적의 일원에게서 구원받은 생명’이라는 케케묵은 이야깃거리를 구성하고 있다. 비형은 그것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생각했다. ‘그렇구나. 자기가 미워해야 하는 자가 오히려 자기를 구해 줬다는 것에 당황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그 요스비라는 나가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것 이외엔 해답이 없잖아?’ 비형은 자신의 추리를 직설적인 도깨비 화법으로 케이건에게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형은 거의 모든 종류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비형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케이건은 멍하니 그를 마주 보았다.

“제 이야기가 틀렸습니까?”

“아니…… 글쎄. 출발합시다.”

그리고 케이건은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일행을 걷게 했다. 티나한마저 투덜거릴 정도의 살인적인 행진이었지만 비형은 케이건이 분노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틀째 되던 날,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된 비형에게 다가온 케이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겠소. 비형. 그건 아닌 것 같군.”

비형은 한참 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단지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음부터 말입니다. 제 질문이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걸어야 적합한 대답을 떠올릴 수 있는 종류일 경우, 그냥 그 질문을 잊어주십시오. 알겠습니까?”

“알겠소.”

“……정말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랬소.”

마침내 륜은 포기했다. 케이건은 실수로라도 요스비에 대해 거론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륜은 케이건에게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비형이나 티나한이 얼간이 같은 질문을 조심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신을 위해 열성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그가 싫어하는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케이건은 언제나 다른 세 사람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만약 케이건이 없다면 다른 세 사람은 큰 낭패를 겪을 것이다.

그것은 북쪽으로의 귀환 열닷새째에 일어난 사건으로 분명해졌다. 그날 아침 눈을 뜬 일행은 비가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주먹을 휘둘러 동굴을 만들었다. 비형은 그렇게 표현했고 륜은 굳이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티나한이 종유석과 석순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동굴을 만들어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강맹한 주먹이—혹은, 필사적인 주먹이—휘둘러진 자리엔 파석과 잡석들이 벽과 기초를 이루었고 티나한이 밀어버린 다섯 개의 바위들은(그중 하나는 최소 7톤은 넘어 보였다.) 서로 맞물려 지붕이 되었다. 대피소를 만드는 방식 치고는 언어도단이랄 만큼 초인적이었기에 나머지 일행들은 경외감도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 믿기 어려운 대역사 끝에 티나한은 레콘 다섯 명이라도 숨어서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동굴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레콘은 하나뿐이었고 그에 필적할 만한 크기의 일행은 나늬뿐이었기에 동굴은 꽤 널찍했다. 그리고 티나한은 그 동굴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세상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심히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저는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난다는 말이 일종의 비유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담백하기 짝이 없는 사실 증언이었군요?”

비형은 대피소 가운데 불을 일으키며 낄낄거렸다. 대피소의 입구 가까이에 앉아 있던 케이건은 쏟아지는 비를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륜은 티나한과 비슷한 정도의 깊이에서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륜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등을 기대고 있는 바위가 자연에 의해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린 레콘이 반 시간 만에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쏟아지는 빗물 때문에 기온은 나가가 얼어붙을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케이건이 대피소를 만드는 티나한에게 그런 미친 짓을 계속한다면 내버려두고 가겠다고 경고했으면서도 그러지 않고 머물게 된 것은 륜 때문이었다. 평균적인 건강을 가진 인간이라면 가볍게 비를 맞으며 걸어 다닐 만한 날씨였지만, 강물 속에서도 몸이 얼어붙는 나가에겐 다리를 떼기도 어려운 ‘혹한’이었다.

케이건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 없이 내쉰 것이지만 그의 입김이 빗속으로 하얗게 퍼져가는 것을 보며 륜은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케이건. 저는 소드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먹으면…….”

“17분 동안만 작용하지. 하루를 걸으려면 수십 개를 먹어야 될 텐데, 그럼 네가 죽고 말아. 관두게. 좀 쉬어두는 것도 좋겠지.”

말을 마친 케이건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먹을 것을 좀 찾아보겠소. 날씨가 이 모양이라서 자신은 없지만 시간 났을 때 좀 잡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비형이 고개를 들었다.

“아, 저도 같이 갈까요?”

“아니오. 당신은 여기서 다른 분들을 지키도록 하시오. 나가 정찰대는 이런 날씨에 돌아다니지 않지만 다른 짐승이나 위험한 것들이 비를 피하러 뛰어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불을 쬐고 있던 륜이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저, 죄송한데요. 케이건.”

“알고 있네. 살아 있는 것을 잡아오겠어.”

“어려운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륜은 케이건이 들쥐 한 마리라도 잡아다 준다면 정말 기쁠 거라고 생각했다. 사냥꾼들이 아닌 자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들 중에는 숲에 사냥꾼들이 집어 가길 기다리는 대형 사냥감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환상 또한 포함된다. 그러나 사냥에 대해 좀 아는 인간들은 평생 동안 두 자릿수 이상의 사슴을 잡는다면 타고난 사냥꾼이라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나가 또한 타고난 사냥꾼이며, 따라서 사냥꾼 일을 별로 해보지 않은 륜도 그런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행들은 반나절 후 한 마리의 살아 있는 고라니와 세 마리의 토끼와 두 마리의 화식조, 바나나 두 다발과 각종 식용 식물 등을 들고 돌아온 케이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혼자서 고라니를 생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화식조는 사냥꾼을 죽일 수도 있는 맹금이다. 하지만 일행들은 세 마리의 토끼에 가장 큰 불가사의를 느꼈다. 비 오는 날에는 토끼를 잡을 수 없다. 비형과 티나한과 륜은 토끼굴 안에 틀어박혀 있었을 토끼들을 케이건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잡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엄청난 음식물 앞에서, 문제는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비형이 밖으로 나갔다. 반 시간가량 빗속에서 어정거리다가 돌아온 비형은 사냥감들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그리고 고라니가 사라진 것과 륜의 배가 엄청나게 커져 있는 것을 보며 마냥 신기해했다. 륜은 숨이 가쁜 듯 씩씩거렸지만 행복해하는 듯했다. 바나나 잎에 싸인 고기를 땅에 파묻으며 티나한은 의문을 표시했다. (물론 그 전에 비형에게 물기를 깔끔하게 닦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렇게…….”

피라고 말할 뻔했던 티나한은 간신히 말을 바꿨다.

“그걸 보기 싫어하는 너희들인데, 그럼 너희 동네에서는 고기를 누가 손질하지?”

“산 채로 태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대답하는 비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티나한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그래서 우린 사냥이나 도축을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아요.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고……. 킴에게서 곡물 재배를 배우지 않았다면 도깨비들은 배가 고파서 즈믄누리를 세우진 못했을 거라 말하는 사람도 많죠. 그래서 즈믄누리의 건설은 킴이 도깨비에게 온 이후의 일일 거라는 거죠. 그럴듯한 이야기죠?”

도깨비들에게 곡물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전설 속의 인간의 이름이 킴이었기에, 도깨비는 모든 인간을 킴이라고 부른다. 자칫 혼란스럽기 쉽지만 그 속엔 원래 그런 경의가 담겨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저 단순한 대명사처럼 되어버렸지만.

케이건과 티나한, 비형은 주로 식물들을 먹은 다음 고기는 훈연시키기로 했다. 여건이 좋지는 못했지만 도깨비의 기술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훈연시킬 수 있었다. 륜은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매료되었다. 어쩔 수 없이 여행이 중단된 이상, 케이건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기간 동안 여행이 재개되었을 때를 대비한 보급품을 준비해 두기로 결정했다. 티나한과 비형에게 훈연을 맡긴 다음 케이건은 다시 사냥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먼젓번 사냥에서 깜빡했던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케이건이 덩굴로 어깨에 연결해서 끌고 온 거대한 통나무는 일행을 또다시 어이없게 만들었고 나늬를 행복하게 했다.

비는 나흘 동안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나흘 후 대피소는 웬만한 사냥꾼의 움막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주거지로 바뀌어 있었다. 케이건은 매일 산더미 같은 음식물을 채집해 왔고, 나머지 일행은 그 엄청난 노동량에도 놀랐지만 바라기 한 자루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에 대해서는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별말을 하지 않았고 비형과 티나한은 불쌍하게도 횡설수설로 서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모여라!’ 하고 외치면 사방에서 달려온 사냥감들이 케이건 앞에 픽 쓰러지는 겁니다. 어때요?”

“잠깐. 내 생각엔 ‘오너라!’ 하고 외쳤을 것 같다. 아니면 ‘이리 오시게!’ 했을까?”

“오! ‘이리 오시게!’가 마음에 드는데요. 위풍당당해요. 어느 쪽이죠, 케이건?”

“내일 그렇게 해 보고 결과를 알려주겠소. 비형.”

도깨비불에 손을 쬐던 케이건이 단조롭게 대답했다.

티나한이 만든 대피소는 안락했다. 빗물이 새어들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였지만 어쨌든 티나한은 튼튼한 벽과 천장을 만들어내었고 그 공간은 비형의 도깨비불에 의해 덥혀졌다. 그러나 케이건은 언제나 가장 쌀쌀한 입구 근처의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그 자리를 고집하는 케이건의 모습은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대피소로 다가오는 위험을 제일 먼저 감지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일 엄청난 노동을 하면서도 케이건은 밤에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불침번을 섰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티나한의 관심을 빗물에서 돌려놓기 위해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나 옛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덧쌓이는 빗소리 속에서, 티나한과 비형, 그리고 륜은 케이건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통해 하늘치를 사랑했던 낭만적인(하지만 영리하다고는 말하기 힘든) 용 퀴도부리타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와 키탈저 사냥꾼들이 3대에 걸쳐 도전하여 가까스로 쓰러뜨린 대호(大虎) 별비에 대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이야깃거리를 선택하는 것에 특별한 기준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세 사람은 똑같은 목소리를 통해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인간들이었던 아라짓 전사들의 어둡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는 모두 겁탈했소.”

륜은 약간 놀랐지만 비형과 티나한은 대단히 당황했다.

“어, 그거 앞뒤가 바뀐 것 아닙니까?”

“아니오. 좀 기괴하게 느껴지리라는 것 짐작되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소. 아라짓 전사들은 왕의 허락 없이는 자식을 만들 수 없었소. 그래서 그렇게 한 거요. 상대가 남자라면 자식이 태어날 일은 없으니까.”

세 사람은 신음을 흘렸다.

어쨌든 케이건은 그런 식으로 다른 동행들에게 식량과 안전, 그리고 여흥까지 제공했다. 알지 못하는 새 그들은 케이건이 없는 상황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을 사랑이거나 신뢰, 혹은 의존 심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전부이거나.

닷새째 저녁, 밤이 깊을 때까지도 케이건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세 사람이 끔찍한 기분에 빠져버린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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