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15)
한계에 달한 근육이 몸속에서 뒤틀리는 듯하고 그 자신이 휘두르는 사이커의 검 끝이 세 개로 보일 지경이었지만, 륜은 이를 악물며 다시 도약했다. 그리고 팔이 빠져라 사이커를 내찔렀다.
한 번 더 팔을 휘둘렀다간 정말 팔이 어깨에서 빠져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너무도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두억시니들의 숫자는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드락의 효과는 이미 감퇴하고 있었고 륜은 한 번 더 소드락을 삼킬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나는 요스비처럼 죽지 않아! 나는 화리트처럼 죽지 않겠어! 내 심장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어!>
륜은 눈앞의 두억시니를 요스비처럼, 화리트처럼 죽였다. 매섭게 날아간 사이커가 두억시니의 심장을 터뜨릴 때마다 륜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죽음으로 이루어진 뱀이 다시 살아나며 달려들었다. 티나한은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철창을 휘둘렀다. 맹렬한 동작의 갈피마다 티나한의 몸에서 깃털이 떨어져 허공에 나부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막 벼려진 철창을 힘 있게 움켜쥔 그날 이후 처음으로 티나한은 철창이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철창엔 피와 담즙과 살점들이 두텁게 달라붙었고 그 위에 깃털이 엉겨 붙어 있지만, 그 무게가 무거울 리는 없다.
유해의 뱀이 다시 다가왔다. 철창을 내찌르려던 티나한은 그 동작을 완료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혹했다. 붙일 단위도 별로 없을 찰나의 시간이지만 어쨌든 분명히 늦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티나한은 무의식적으로 계명성을 내질렀다.
유해의 뱀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훌륭한 임기응변이었지만 티나한은 임기응변을 시도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에 격노했다. 티나한은 발을 쾅쾅 구르며 철창을 틀어쥐었다.
“와! 이리 와 덤벼라, 이 살지도 죽지도 않은 녀석아! 열흘이라도 싸워주마! 또 재생하냐? 죽은 것들을 뭉쳐서 살아나는 거냐! 제기랄, 무슨 말이야, 이게? 이 말도 안 되는 자식아, 덤벼라!”
“레콘?”
티나한은 하마터면 철창을 놓칠 뻔했다.
“마, 말도 하네? 목소리 진짜 좋군. 그런다고 용서해 줄 줄 아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레콘. 누구와 말다툼을 하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티나한은 고개를 들어 유해의 폭포가 쏟아져 나오던 맞은편 벽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구멍은 마치 뱀이 쏟아져 나오는 뱀굴처럼 보였다. 그 구멍 입구에, 유해로 이루어진 뱀의 동체를 밟고 서 있는 한 나가 여인이 있었다.
“암살자!”
티나한의 외침과 함께 유해의 뱀은 허공에서 몸을 꼬아 자신의 동체를 돌아보았다. 수족과 내장과 뼈다귀로 이루어진 그 머리 양쪽에 박혀 있는 두 개의 머리가 마치 눈처럼 사모 페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단순한 시체 더미를 밟고 있는 줄 알았던 사모는 그 모습에 크게 놀랐다.
<여신이여, 도대체 이게 무슨……!>
“치루루루루!”
괴성과 함께 유해의 뱀의 몸에서 수족들이 마치 털처럼 곤두섰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뱀의 몸 전체에서 손가락을 잔뜩 편 손이나 발가락을 경련시키는 다리가 일어선 것이다.
사모 페이의 뒤쪽에 있던 카루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사모 페이는 비늘을 곤두세우며 쉬크톨을 날렵하게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뱀의 동체에 꽂아 넣었다.
유해의 뱀은 피라미드가 진동하는 괴성을 토해 내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뽑아들며 외쳤다.
<진짜 살아 있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던 유해의 뱀은 자신이 쏟아지던 구멍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 거대한 동체가 구멍을 막아버리자 티나한은 더 이상 사모 페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친 다음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일어나! 비형, 나늬!”
티나한은 비형과 나늬를 지나쳐 륜이 고군분투하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티나한이 괴성을 지르며 철창을 세 번 내찌르자 륜이 지난 십여 분 동안 가까스로 확장시킨 거리가 간단히 두 배로 연장되었다. 놀랄 만한 돌격력이었다.
륜은 티나한이 지금껏 유해의 뱀을 제압하지 못한 이유가 돌격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륜은 티나한에게 유해의 뱀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티나한은 두억시니들을 꿰뚫느라 대답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륜 자신이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소드락의 효과는 완전히 사라졌다.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고 몸 곳곳이 고문당하듯 아팠다. 사이커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륜은 거칠게 헐떡였다.
그때 뒤에서 다가온 비형이 륜을 부축했다. 륜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비형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웃지 않았다. 덩치 큰 도깨비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하지만 묘하게 평온한 얼굴로 그저 동료를 일으켜 세웠다.
“륜. 갈까요?”
“아, 네.”
륜을 막아섰을 때 철벽 같았던 두억시니의 무리는 티나한 앞에선 싸리 울타리만도 못했다. 범람하는 홍수가 들판을 쓸어버리는 기세로 티나한은 두억시니의 무리를 헤쳐 놓았다.
그 덕분에 륜과 비형, 그리고 나늬는 난자당한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진 길, 유해의 길을 걸어야 했다. 비형에게 부축받으며 걷던 륜은 비형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도깨비는 슬픈 표정으로 자신의 발에 도깨비불을 붙였다. 그 불은 비형이나 륜에겐 아무 해도 입히지 않았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유해의 길을 불태웠다.
처음 얼마 동안 티나한이 느꼈던 것은 보다 멀리까지 도망쳐야 된다는 단순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거친 호흡이 균일해지고 뛰는 행동 자체에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지는 시점이 다가왔을 때 티나한은 그 자연스러운 달리기에 거북함을 느꼈다. 티나한은 왜 거북함을 느꼈는지 생각해 보았고, 그 답은 자명했다. 티나한은 길을 알지 못했다.
“이런 젠장.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계속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륜 또한 당혹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작정 도망치고 있었다. 길을 찾아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때 조용히 걷고 있던 비형이 말했다.
“바닥에 재미있는 것이 있군요. 이게 뭘까요?”
비형은 바닥에서 큼직한 돌멩이를 들어 올렸다. 티나한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비형을 바라보았다.
“돌이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야?”
“봐요. 반질반질하지요? 마모가 심하게 되어 있는 돌이에요. 여기엔 이런 돌이 있을 수 없죠. 이건 바깥에 있던 돌 같은데요?”
“게다가 따스하군요.”
티나한과 비형은 륜을 돌아보았다. 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돌멩이를 바라보다가 저 앞쪽의 통로를 가리켰다.
“저 앞에도 비슷한 게 있군요. 이건 햇빛에 달궈졌던 돌입니다. 아직은 보이는 걸로 봐서 밖에서 여기로 옮겨진 지 몇 시간 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티나한과 비형은 륜이 떠올린 것과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암흑 속에서 뜨거운 돌을 볼 수 있는 것은 륜과 같은 종족뿐이다. 티나한이 아랫부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네 누나가 떨어뜨려 놓은 것이군. 똑똑한데.”
“언제 여기까지 따라오신 걸까요.”
“음? 아까 듣지 못했어? 아차, 넌 듣지 못했겠군. 소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겠군.”
“무슨 말입니까?”
티나한은 유해의 뱀이 있던 방향을 가리키려 했다. 하지만 한참을 달린 후라 그곳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아무 방향이나 대충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네 누나를 봤다.”
“네? 보셨다고요?”
“그래. 유해의 폭포가 쏟아지던 구멍에서 나타났다. 네 누나가 뱀의 주의를 끌어준 덕분에 난 몸을 빼낼 수 있었어.”
륜은 경악했다. 얼굴을 떨며 티나한을 바라보던 륜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티나한은 당황하며 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륜은 거칠게 몸부림쳤다.
“놔요! 누님을 도우러 가야 합니다! 그 괴물에게 남겨두고 오다니요!”
“이봐, 진정해! 도우러 가다니, 그래서 죽겠다는 거야? 네 누나의 칼에 맞아 죽을 거야?”
륜은 흠칫하며 티나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티나한은 큼직한 손으로 륜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잖아?”
“하지만…… 하지만………….”
“네 누나는 괜찮을 거다. 이 안에 있는 우리를 찾아낸 정도이니 틀림없이 몸을 빼낼 수도 있을 거야. 지금 급한 건 우리라고. 저 돌, 조금 후면 완전히 식어서 보이지 않게 되겠지?”
륜은 말문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한은 부리를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그럼 빨리 나가야 해. 저 돌마저 식어버리면 우리는 나갈 수 없어.”
“하지만 누님이…….”
륜은 계속 주저하며 뒤로 돌아가려 했다. 티나한은 이 답답한 나가를 강제로 끌고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뜨거운 돌멩이를 따라가기 위해선 륜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비형이 나직이 질문했다.
“륜. 돌아갈 길을 아나요?”
륜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비형을 쳐다보았다. 티나한은 조금 전 자신들이 있던 방향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륜은 당연히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륜은 고개를 떨구었다. 티나한은 벼슬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륜. 미안하지만 서둘러줘. 돌이 식잖아.”
티나한이 재촉하고도 한참 후에야 륜은 겨우 한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티나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고 비형과 나늬도 조용히 발걸음을 뗐다.
세 사람과 딱정벌레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닥은 차갑고 길은 어두웠다. 간혹 먼 곳에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바닥을 타고 전해져 오는 그 진동은 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륜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고 티나한은 그때마다 륜을 재촉했다. 그러면 륜은 다시 마지못한 듯이 걸음을 뗐다. 묘하게도 지난 몇 시간 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두억시니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은 어둠에 덮이는,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 밝은 동쪽 하늘 아래로 걸어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