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2)
하인샤 대사원에 밤이 찾아들었다.
더 이상 죽편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기에 쥬타기 대선사는 불평 섞인 한숨을 내쉬며 등불을 더듬었다. 엄지와 검지로 심지를 붙잡은 대선사는 그것을 빠르게 비볐다. 곧 심지에선 불꽃이 피어올랐다. 방 안이 충분히 밝아지자 대선사는 다시 서안 위에 놓인 죽편을 들여다보았다.
고대의 신비스러운 기술로 처리된 죽편은 까마득한 옛날의 지식을 완벽한 상태로 보존하고 있었다. 실전된 기술을 복원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기에 사제들은 죽편의 놀라운 내구성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제들은 게으른 자들이 아니며, 언젠가 죽편이 망가질 때를 대비하여 많은 필사본들을 만들어둔다. 하지만 지금 대선사가 들여다보고 있는 죽편은 감히 복사할 생각도 떠올릴 수 없는 물건이다. 그렇기에 죽편을 만지는 대선사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문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선사님. 오레놀입니다.”
“들어오거라.”
미닫이 문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오레놀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대덕(大德)의 법계를 가지고 있는 젊은 천재이건만 대선사의 앞에서는 마치 행자라도 된 듯이 행동하는 오레놀을 보며 대선사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레놀의 손에는 커다란 단지 같은 것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본 대선사는 긴장했다. 오레놀은 단지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뱀들이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대선사는 죽편을 조심스럽게 말아놓은 다음 서안을 통째로 옆으로 치웠다. 대선사의 준비가 끝나자 오레놀은 단지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단지에서 검게 번득이는 뱀들이 뒤엉켜 쏟아졌다. 한결같이 맹독을 자랑하는 뱀들은 방바닥을 기며 배를 뒤집고 똬리를 틀었으며, 서로 깨물기까지 했다. 오레놀의 말처럼 뱀들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뱀들이 쥬타기 대선사와 오레놀의 방향으로 움직이려 할 때 대선사가 빠르게 말했다.
“보여다오.”
뱀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스르륵 움직였다. 방바닥과 뱀의 배가 마찰하며 가느다란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차츰 뱀들의 움직임이 어떤 무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계속 움직이고 중복되거나 끊어지기도 했지만,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알고 있는 자에게 그 무늬가 전하는 바는 분명했다. 사어(蛇語)를 읽을 줄 아는 오레놀은 경악한 얼굴로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수련자가 죽었군요!”
“뱀들을 단속하거라.”
맡은 바 소임을 다한 뱀들은 기세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오레놀이 황급히 단지 주둥이를 바닥에 기울이자 뱀들은 단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오레놀은 뚜껑을 닫은 다음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쥬타기 대선사는 고통에 가까운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생각했건만, 적출 공포증 나가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혹 거짓말이 아닐까요? 그쪽에서 겁을 먹었다거나…….”
“애초에 이 일을 제안한 것이 세리스마였다. 함부로 의심할 수는 없지. 그리고 너무 황당한 일이다 보니 오히려 그럴듯하게 느껴지는군.”
“그렇다면 어찌해야 됩니까? 1년을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쥬타기 대선사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염주를 집어 들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께 바치는 기도문이 섬세하게 새겨진 염주는 그 구슬을 한 번 헤아릴 때마다 신께 기도를 한 번 올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염주를 헤아리던 대선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군. 구출대는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사지로 들어간 그들에게 연락을 보낼 방법이 없구나.”
“과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케이건 드라카 님이 함께 가지 않습니까?”
“글쎄다. 그 수련자가 다른 곳도 아닌 심장탑 안에서 죽을 줄 누가 상상했겠느냐? 나가들에게 불사를 부여하는 심장탑이 그의 무덤이 되다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나는 케이건까지도 잃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구나. 게다가 상황이 바뀌었다.”
“상황이 바뀌다니오?”
“정찰이 강화될 테지. 그 수련자를 살해한 나가가 키보렌으로 도망쳤다고 하지 않느냐.”
오레놀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쥬타기 대선사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람들은 바라기의 두 칼날은 나가와 두억시니의 손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한다고들 말하지. 그런 종류의 말들은 언제나 사실을 말한다기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겠구나. 영웅왕의 검이 나가들로부터 그 주인을 보호하길.”
“도깨비도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대선사님. 흔히들 나가 잡는 건 도깨비라고 하잖습니까. 도깨비가 요술쟁이니만큼 그들은 안전할 겁니다.”
오레놀은 풀이 죽은 대선사를 위로하기 위해 밝게 말했다. 하지만 대선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도깨비가 페시론 섬에서처럼 불놀이라도 시작했다간 키보렌의 나가 정찰대원을 다 끌어들이게 될 거다. 케이건이 신경 써야 되는 건 나가뿐만이 아닐걸.”
케이건은 비형이나 티나한이 나가 정찰대에 대해 걱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걱정하고 있었다. 이유를 묻는 두 사람에게 케이건은 ‘눈은 앞만 보고 귀는 사방을 듣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한밤의 암흑 속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것은 나가다. 다른 세 종족은 나가가 코끝까지 접근해도 볼 수 없지만 나가는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다른 세 종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키보렌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는데, 빽빽한 나무들이 시야를 수 미터까지 줄여버리기 때문에 나가의 눈으로도 다른 종족들을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무들은 소리를 감추지는 않으며, 그래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케이건은 나가 정찰대가 100미터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재빨리 다른 두 일행을 깨웠다. 놀랍게도 케이건은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시오! 나가들이 다가오고 있소.”
기겁한 두 사람은 헐레벌떡 일어났다. 케이건은 다시 소리 높이 외쳤다.
“천천히 움직이시오! 흥분해서 체온을 높일 필요는 없소.”
잠이 덜 깬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허둥댄 다음에야 겨우 케이건이 그런 내용의 주의를 줬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케이건이 굳이 소리를 낮추려 들지 않는 이유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티나한에겐 아직 케이건 같은 여유가 없었다.
“젠장! 어디서 다가오고 있나?”
“뭐라고 했소? 속삭이지 마시오. 잘 안 들리니까.”
“어디서 다가오냐고 물었어.”
티나한은 겨우 소리를 높였지만 그 목소리는 보통 말하는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위가 캄캄했기에 케이건은 티나한의 손을 잡아 직접 방향을 가르쳐준 다음 말했다.
“나를 따라오시오. 비형, 당신 딱정벌레를 챙겨요.”
그리고 케이건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마음이 조급했던 티나한은 케이건의 뒤를 급히 따라가다가 하마터면 케이건을 밀어 넘어뜨릴 뻔했다. 화를 낼 법도 하지만, 케이건은 진력 내는 기색도 없이 다시 그 특유의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천천히 걸으시오, 티나한.”
티나한은 수염볏을 빨갛게 부풀린 채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비형과 딱정벌레 나늬가 그 뒤를 따랐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티나한과 비형, 나늬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케이건은, 비형의 표현을 따르자면 달팽이와의 불꽃 튀는 접전이 예상되는 속도로 움직였다. 나가 정찰대가 지척까지 이른 상태에서 걷는 것치고는 느려도 너무 느렸다. 티나한과 비형은 애가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 밤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숲이라는 것 등을 고려하면 체온이 상승할 가능성이 평소보다 훨씬 높으며, 따라서 이 이상 빠르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그 느린 속도를 고집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케이건은 주변의 나무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케이건이 처음 나무를 걷어찼을 때 티나한은 소스라치게 놀라 속삭였다.
“조심해!”
티나한은 그것이 케이건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건은 조금 후 다시 나무를 걷어찼다. 경악 때문에 세 배로 부푼 티나한은 케이건의 어깨를 움켜쥐곤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빌어먹을, 뭐 하는 짓이야!”
“뭐라 하셨소? 속삭이지 마시오. 잘 안 들리니까.”
“무슨 정신 나간 짓거리냐고 물었다!”
“우리 주위에 있을 야행성 동물들을 위협해서 사방으로 도망치게 하고 있소. 그 뜨거운 생물들은 나가들의 눈을 현혹할 수 있으니까. 이제 어깨 좀 놔주겠소?”
케이건은 밀림에 들어오기 전 몇 번씩이나 들려주었던 설명을 언성조차 높이지 않은 채 차분하게 반복했다. 그제야 그런 설명을 들었다는 것을 떠올린 티나한은 벼슬을 붉히며 케이건의 어깨를 놓았다. 다시 걸음을 떼게 된 케이건은 일행의 후미를 따르는 비형에게 내키면 노래를 불러도 좋다고 제안했지만 비형은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케이건은 혼자서 나무를 걷어차고 박수를 치며 소동을 일으켰고, 티나한과 비형, 나늬는 남은 수명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선 다른 일행들이 기절할 지경이 되었을 때 케이건은 그 소란스럽고 느리다 느린 도피행을 중단시켰다. 일출이 가까워졌는지 주위의 사물이 훨씬 잘 보였고, 그래서 티나한과 비형은 자신들이 높은 벼랑 아래쪽에 멈춰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티나한의 깃털은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고 비형은 호흡 곤란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벼랑을 올려다보며 단조롭게 말했다.
“곤란하군.”
티나한과 비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벼랑을 올려다보다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곧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티나한은 더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뭐가 곤란하게 된 거냐? 들킨 거야?”
“아니오.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소. 하지만 내가 방향을 잘못 잡았소. 그 나가들은 이 벼랑으로 오고 있었던 모양이오. 그들과 벼랑 사이에 우연히 우리가 있었던 모양이오.”
“벼랑으로 온다고? 왜?”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요.”
그리고 케이건은 뒤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서두릅시다. 가까이 왔소.”
비형과 티나한도 여러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티나한은 잔뜩 긴장하여 철창을 움켜쥐었지만 케이건은 서두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천천히 걸어가던 케이건은 벼랑 아래쪽의 우묵한 곳을 발견하자 그 아래에 주저앉았다.
“앉으시오. 나가들은 아까 거기서 왼쪽으로 갈 거요.”
비형은 뒤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질문했다.
“왼쪽으로? 왜지요?”
“그쪽으로 해야 벼랑 위로 올라갈 수 있겠더군. 그리고 그쪽이 동쪽이고. 그들은 그 벼랑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을 거요. 여기 있으면 벼랑 위에선 보이지 않을 거요. 앉읍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앉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초조한 듯 케이건과 숲, 그리고 벼랑 위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케이건은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숲이 한층 환해졌을 때 티나한이 그들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벼랑에 몸을 바짝 붙이더니 숨이 멎는 표정으로 벼랑 위를 쳐다보았다. 비형은 티나한을 따라 벼랑 위를 쳐다보았고, 역시 벼랑에 찰싹 달라붙었다. 비형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속삭였다.
“저게 나가군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티나한은 부리를 열 여유가 없었고 케이건은 굳이 확인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벼랑 위에는 여섯 명의 나가들이 동쪽 하늘을 보며 서 있었다. 비형과 티나한은 생전 처음으로 나가를 보게 되었다. 키는 도깨비나 레콘보다는 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작았다. 비늘이 뒤덮인 몸은 이국적인 옷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변온 동물인 나가들에게 체온을 보존하는 옷의 의미는 필요 없었기에 나가의 의복은 티나한과 비형에게 퍽 기이하고 복잡하게 보였다. 다른 종족들의 옷은 아무리 화려하다 하더라도 몇 가지 기본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쨌든 인간과 도깨비와 레콘은 상의와 하의를 입을 뿐이지 좌의나 우의, 혹은 전의나 후의라고 불러야 할 만한 옷은 알지 못한다. 벼랑 위에 서 있는 여섯 명의 나가를 보며, 도깨비와 레콘은 여섯 명의 사람이 아니라 심오하고 복잡한 의미를 애써 표현한 여섯 개의 상징물을 보는 기분을 느꼈다.
나가들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직선으로 5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려움 속에서 비형과 티나한은 케이건이 왜 그들을 서쪽으로 데려왔는지 깨달았다. 동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가들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기만 해도 그들을 발견할 수 있을 테지만 나가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동쪽만 바라보았다.
비형과 티나한이 홀린 듯 나가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케이건이 느닷없이 말했다.
“햇빛을 받는 거요.”
비형과 티나한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하지만 벼랑 위의 나가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케이건은 일어나 그들과 함께 나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햇빛을 받아 체온을 높이려는 거요.”
비형은 작은 탄성을 질렀다. 햇빛을 받으려면 당연히 벼랑 위처럼 노출된 곳이 좋을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케이건을 돌아본 비형은 케이건의 표정에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비형이 익숙한 얼굴, 즉 동료들의 어떤 멍청한 행동이나 말에도 짜증을 내거나 자제력을 잃지 않은 채 차분하게 설명해주곤 하던 케이건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가들의 등 뒤에 숨어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그 얼굴을 표현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육식 동물의 얼굴이었다.
비형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살코기를 먹는 야수였다.
천천히 세어서 열까지 세었을 무렵, 케이건은 살기 등등한 안광을 거둔 다음 조용히 몸을 돌렸다. 비형과 티나한은 주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불안 때문에 그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가들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볼 뿐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다.
케이건은 그날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