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4)
강물 위를 구르는 빛들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물은 열을 삼키지. 그 나가에게 무룬 강은 거대한 암흑처럼 보일 거요.”
비형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밤의 강물처럼?”
“비슷하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소.”
“어떻게 다르지요?”
“당신과 나는 바람을 볼 수 없소. 하지만 우리 눈에 바람이 검게 보이진 않지. 바람 뒤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가는 물을 잘 보지 못하고, 깊은 물은 그 아래쪽에 있는 것을 가리지요. 그 둘의 차이를 생각해 보시오.”
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마침내 무룬 강에 도달한 것은 그들의 여행이 시작된 지 스무 날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그들은 나가 정찰대와 몇 번 더 마주쳤다. 하지만 케이건은 언제나 나가 정찰대가 그들을 발견하기 전에 그들을 먼저 발견해서 일행을 대피시켰다. 한 번을 제외하면 위험한 사건은 없었다.
그 사건은 티나한이 불침번을 설 때 일어났다. 케이건은 티나한에게 철창을 덩굴로 단단히 감싸두라고 지시했다. 티나한은 그 지시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자 자신의 철창을 감아둔 덩굴을 풀고 오래간만에 창을 잠시 손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레콘다운 처사였다. 하지만 그것이 초저녁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간단히 말해서, 낮 동안 햇빛을 잔뜩 받았던 그 철창은 나가의 눈에는 광선처럼 보일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자연 속에는 7미터나 되는 직선이 별로 없으며 그것이 뜨겁다면 더욱 희귀한 것이 된다.
티나한이 두 사람을 깨웠을 때 나가들은 이미 그들을 시야에 둔 채 달려오고 있었다. 일행은 이미 익숙해진 걸음걸이로 천천히 도망쳤다. 하지만 케이건은 달려오는 발소리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티나한을 돌아보았고 덩굴이 풀려 있는 철창을 보자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포착되었소. 따라잡히겠군.”
비형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그럼 달려야 합니까?”
“도깨비불로 기린을 만드시오.”
“예?”
“기린 말이오. 기린 모양의 도깨비불을 만드시오.”
비형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케이건의 말대로 했다. 비형의 작품을 본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예쁘긴 하지만, 나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만한 것이 아니라 실물대의 기린을 원하오. 비형. 체온 정도의 온도로.”
그제야 케이건의 의도를 이해한 비형은 케이건의 요구를 명쾌하게 충족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숲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난 6미터 크기의 기린은 장관이라 할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실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어쨌든 비형은 박물학의 대가는 아니었고,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도깨비불은 어린애의 낙서처럼 엉성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일행을 덤불 속에 숨으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나가들이 달려왔다. 케이건은 비형의 어깨를 툭 쳤다.
“달리게 하시오.”
비형은 나가들이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조금도 낮추지 않는 케이건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비형은 불꽃의 기린을 달리게 했다.
그리고 비형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나가들은 그 도깨비불을 흘끔 쳐다보고는 그냥 뒤로 돌아 걸어갔다. 인간이나 도깨비의 눈으로 본다면 그 불꽃의 기린은 도저히 실제의 기린과 혼동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가들은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그 도깨비불을 보자 실제의 기린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나가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케이건은 괴로워하는 비형에게 말했다.
“웃고 싶으면 웃어도 상관없소. 못 들으니까.”
비형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티나한은 꽉 움켜쥐고 있던 철창을 느슨하게 쥐며 왜 하필 기린이냐고 질문했다. 케이건은 철창과 비슷할 정도로 긴 직선을 가진 동물은 뱀과 기린 정도인데, 뱀이 더 좋겠지만 뜨겁지 않으니 남는 건 기린뿐이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뜨거운 철창이 말썽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티나한은 두려움에 떨며 케이건의 반응을 기다렸다. 티나한의 예상대로였다. 케이건은 화는커녕 짜증을 내는 기색조차 없이 단조롭게 말했다.
“덩굴을 풀고 싶다면 그 창이 충분히 식은 한밤중이 좋을 거요. 티나한.”
“……주의하지.”
그 이후로 비형과 티나한은 실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물론 실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그들의 얼간이짓에 분노해야 할 케이건이 도통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불쌍한 도깨비와 레콘을 끔찍한 기분에 젖어들게 하기 충분했다. 케이건은 출발하기 전 그가 하지 말라고 했던 짓을 모조리 저지르는 두 사람을 보면서도 조용한 어조로 다시 주의를 줄 뿐이었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폭언이나 비난보다 더 끔찍했다.
그리고 비형은 풀기 어려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케이건이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경우이거나, 아니면 보기 드문 관대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 비형은 전자의 경우로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케이건이 무관심하다면 그의 행동들에서는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 특징들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언제나 나머지 일행에 대해 깊이 고려한 것이 분명한 행동만을 취하고 있었다.
야생 바나나 군락을 발견했을 때가 그런 경우였다. 비형과 티나한이 먹을 것이 생겼으니 식사를 하며 쉬자고 주장할 때 케이건은 딱정벌레 나늬를 흘깃 돌아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나나 나무는 갉아먹기 어렵소. 바나나를 딴 다음 더 이동합시다. 저 딱정벌레가 먹을 만한 것이 있는 곳에서 쉬도록 하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비형은 케이건이 언제나 그들 전부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를 채택할 경우 비형은 나가에 대한 케이건의 증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왜 나가에게는 관대하지 못한 걸까?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그것을 증오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가 자신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나가를 잘 알고 있을 케이건이 왜 나가를 그렇게 증오하는 것일까? 비형은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그들은 무룬 강에 도달했다. 케이건은 강물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티나한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토록 거대한 강을 바라보는 레콘의 반응으로는 모범적이라 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케이건은 티나한을 내버려둔 채 비형을 돌아보았다.
“암흑이라도 저런 거대한 암흑을 못 보고 지나칠 리는 없겠지. 이제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서 노래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이면 될 거요.”
“알겠습니다. 내려갈까요?”
“그 전에 부탁이 있소.”
“예? 말씀만 하십시오! 무슨 부탁이죠?”
“앞으론 노래 좀 자제해 주시오. 그자의 노래를 들어야 하니깐.”
비형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시간 후, 비형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케이건의 시선에 허둥거려야 했다.
“아차, 노래 부르지 말랬지요?”
열대의 강물 위로 하야로비들이 무리 지어 날았다.
강물 위로 뻗어간 기둥들과 늘어진 덩굴들 때문에 어디서부터 땅이고 어디서부터 강인지 알아보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강 가운데 만들어진 사주에는 하마들이 몸을 기댄 채 게으르게 졸고 있었고 물빛 맑은 곳에선 가끔 물고기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강은 그 넓이에 어울리는 거대한 깊이로써 햇빛을 하염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도도하게 머리를 쳐들고 강을 가로지르는 뱀은 햇빛을 받아 녹주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빛났고, 느닷없이 나타나 악어를 잡아채어 사라지는 왕독수리의 모습은 압도적일 정도의 장관이었다.
특히 비형은 왕독수리의 모습에 대단한 감명을 받은 듯했다. 보다 추운 북부에는 그토록 큰 새가 없기에 비형은 그것이 새가 아니라 용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봤어요? 용이에요! 이럴 수가! 용 맞죠?”
케이건은 그것이 왕독수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용은 멸종한 지 오래되었다고도 말했지만 비형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음. 저게 왕독수리란 말이군요. 하지만 용의 멸종이 확실한 것은 아니잖아요? 흔히들 씨는 강하다고들 하죠. 게다가 이렇게 나무가 많은 곳이니 용도 살아남았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나가들이 드라카를 싫어하오.”
케이건은 비형과 티나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드라카는 키탈저 사냥어로 용을 말하오.”
“당신도 드라카잖아요. 그럼 당신 이름은 거기서 온 겁니까? 어, 혹시 그럼 케이건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케이건은 흑사자요. 역시 키탈저 사냥어.”
“흑사자와 용……. 흑사자와 용……. 알았다! 나가들에 의해 멸종당한 것들이군요!”
케이건은 대답하지 못했다. 티나한이 큰 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키탈저 사냥꾼식이야!”
비형은 놀란 표정으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허벅지를 내리치고는 케이건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생각났어! 전에 들어봤어. 키탈저 사냥꾼들 방식이야. 그 자들은 원수를 죽이고 그 간을 꺼내어 씹어 먹었다고 했어. 맞지?”
케이건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들이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케이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당연한 거잖습니까? 당신 이름이 나가에 의해 멸종당한 두 생물이고, 그리고 그걸 나가에 의해 멸망한 자들의 언어로 표현했고, 그러면서 나가에 의해 멸망한 자들의 방식으로 나가를 대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들을…… 사냥해서 삶아 먹는다고 했죠. 도대체 나가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거의 경건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는 겁니까?”
티나한 또한 비형의 질문에 호기심을 느끼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케이건의 오른손이 허리쯤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흥분한 비형은 케이건의 그 손동작을 깨닫지 못했지만 티나한은 케이건의 손과 발, 그리고 허리의 각도를 쓱 훑어본 다음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케이건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의 몸은 등 뒤의 바라기를 뽑아 비형을 베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티나한은 긴장하며 철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티나한이 우려했던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케이건은 비형을 외면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가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우리 일과 아무 관련이 없소.”
“그래도 대답해 줄 수는 있잖아요?”
“대답하지 않겠소.”
비형은 언짢은 얼굴로 티나한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흐음. 케이건 당신은 한 번 선언한 말은 번복할 줄을 모르니 더 물어봐도 소용없겠군요. 더 이상 묻지 않지요.”
비형은 어느덧 케이건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게 좀 궁금하군요. 나가들이 용을 멸종시킨 이유야 짐작이 가지만, 흑사자는 왜 멸종시킨 거죠? 그건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케이건은 약간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대단히 희미한 기색이었지만.
“흑사자의 모피는 스스로 열을 내오. 벗겨진 가죽 상태에서도.”
“열을 낸다고요? 모피가?”
“그렇소. 그것과 나가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시오.”
비형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나가가 북쪽으로 올라올 수 있군요! 그 모피만 있으면. 그런 건가요?”
“그렇소. 대확장 전쟁 말기, 나가들은 한계선을 넘어 보려는 여러 시도 중 하나로 흑사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서 그 모피를 벗겼소. 미욱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 군대 하나를 무장시키기 위해 흑사자 수천 마리를 죽이는 식이었으니 멸종하지 않을 수 없었소. 더군다나 흑사자는 새끼를 많이 낳는 동물이 아니오.”
“멸종하게 될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나요?”
“그 수목 애호가들은 동물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이란 것이 없소. 후손을 만드는 능력에서 동물과 식물은 서로 비교할 수가 없지. 그들은 그 생각을 못 했던 거요.”
“아쉽군요. 신기할 것 같은데, 멸종한 것이 확실합니까?”
“흑사자의 경우엔 확실하오.”
비형은 반색했다.
“네? 그럼 용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군요?”
“당신 말대로, 씨는 강하니까. 키보렌은 너무 넓소. 하지만 이미 말했듯 바로 이 땅의 주인이 용을 싫어하니 가능성은 희박하오.”
그리고 케이건은 몇 가지 더 부정적인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비형이 살아남은 용을 찾겠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용의 생존을 믿는 자는 비형만은 아니었다. 하인샤 대사원에서 벌인 온갖 이상한 일들 중엔 막대한 상금을 걸고 용을 수배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용은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 일로써 용이 멸종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대사원의 사제들은 여전히 용이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비형의 말대로 씨는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이 나가들의 땅 어딘가에서 용의 씨가 싹을 틔웠을 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무의 수호자인 나가들이 그런 잡초를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