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5)
륜은 거의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내리밟기 직전, 륜은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것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륜은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눈앞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꽃잎의 숫자를 세고 그 모양과 색깔을 관찰한 륜은 자신의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륜은 경이로움 속에서 눈앞에 피어 있는 용화(龍花)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것이 피어난 것인지 륜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용은 종자 상태로 몇 년, 심지어 몇십 년이나 몇백 년 동안 기다리다가 주위에 위험이 없다고 생각될 때만 용화로 피어난다. 하지만 지금 륜의 눈앞에 피어 있는 용화는 그런 상식을 완전히 뒤엎은 장소에서 피어나 있었다. 무룬 강의 강물이 지척인 이곳은 물을 먹기 위해 찾아드는 동물들의 시야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설령 동물들이 용화를 뜯어 먹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찰대원들의 눈까지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의아해하던 륜은 잠시 후 용화 근처의 땅에 뭔가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관찰하던 륜은 곧 사태를 깨닫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몇십 년, 어쩌면 몇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용화의 발아 과정이 순식간에 재구성되었다.
오래전, 어떤 용이 포자를 뿌렸다. 그 포자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 하나가 무룬 강을 따라 흘러오다가 이곳에 멈췄다. 하지만 이곳은 용에겐 다시없이 적대적인 환경이었고 따라서 그 포자는 발아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동안 한계선 남쪽에선 나가들에 의해 용화들이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용화가 피기 힘든 한계선 북부에 가까스로 피어났던 몇 안 되는 용화들도 용근(龍根)을 탐낸 사람들에 의해 모조리 사라졌다. 하지만 바로 이곳, 나가들의 땅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곳에 포자 하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용에게 가장 위험한 땅이었기에 그 씨는 발아되지 않았고, 그래서 섣불리 발아했던 다른 씨들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도 없는 기다림 후, 그 씨 위에 어떤 나가가 고통 속에서 구토했다. 나가가 가까이 있는 이상 일반적인 경우라면 용의 포자는 절대로 발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의 토사물 속에는 특별한 것이 섞여 있었다. 바로 소드락이었다.
소드락은 씨에 영향을 끼쳤고 마침내 그 씨는 발아했다. 륜이 잠들어 있는 몇 시간 동안, 용은 발아한 다음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벌써 꽃까지 피워 버린 것이다. 륜은 자신이 이 용화를 피어나게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자신이 꺾어야 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용은 너무 위험하다. 나가의 최대 적수라 할 수 있는 도깨비들은 피에 대한 공포 때문에 투쟁을 싫어한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피를 볼 일이 거의 없는 씨름이라는 점은 유념할 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용은 그런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도깨비보다 더 거대한 불꽃을 일으킨다. 다른 나무들에겐 최악의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무들의 적은 나가의 적이다.
륜은 탐탁잖은 기분 속에서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륜은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자신도 명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면서 륜은 황급히 땅을 파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근이 드러났다. 그것은 이미 용의 모습을 그럭저럭 갖추고 있었다. 민들레의 뿌리처럼 길게 내려간 꼬리 위로 몸통은 접혀진 날개로 감싸여 있었다. 줄기와 연결된 머리 부분에는 이미 가시 같은 뿔과 눈까지 형성되어 있었다. 눈꺼풀은 꽉 닫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용근의 흙을 털어내며 륜은 무의식중에 닐렀다.
<나가들은 너를 죽이려 하겠지. 나처럼.>
자신의 니름을 들은 후에야 륜은 자신과 용의 공통점을 깨달았다. 심장을 가진 나가와 불을 뿜는 용, 둘 다 나가의 땅에선 생존이 용납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륜은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용의 줄기를 뜯어내었다.
륜은 강가로 다가갔다.
륜은 겉옷을 찢어낸 다음 그것을 물에 적셨다. 그리고 륜은 이끼를 모아 젖은 천 조각 위에 깔고 그 위에 용근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 다음, 배낭 속에서 소드락 하나를 꺼내어 가루로 만든 다음 용근 위에 뿌렸다. 천 조각을 다시 감싼 륜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묶으며 닐렀다.
<내가 널 피어나게 했어. 그러니 내가 널 지켜주겠어. 아스화리탈.>
륜의 손이 움찔하며 멎었다. 하지만 륜은 곧 벌떡 일어나서 천 조각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아스화리탈. 너를 아스화리탈이라고 부르겠다.>
용근을 챙겨 든 륜은 강변을 따라 무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구출대는 무룬 강을 따라 열흘 정도를 걸었다. 그 거대한 강을 따라 걷는 여행이 길어질수록 티나한의 성격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비록 티나한이 존경할 만한 자제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ㅡ그것도 7미터짜리 철창을 들고ㅡ 있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는 것은 다른 동행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티나한이 도통 잠들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비형은 그 이유를 물었고 티나한은 더듬거리며 대답을 거부했다. 그런 사태가 이틀 동안 계속되자 케이건은 단검을 꺼내 든 다음 말없이 덩굴을 베기 시작했다. 덩굴을 엮어 튼튼한 밧줄을 만든 케이건은 그것을 티나한에게 건네었다.
그 광경은 비형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오? 고통을 덜기 위해 자살하라는 건가요?”
“……아니오. 발목을 나무에 묶은 다음 자라는 거요.”
티나한은 마침내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비형은 티나한이 자다가 강물에 빠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야영지가 보통 강물에서 수십 미터씩 떨어진 곳임을 놓고 볼 때 비형은 레콘들의 공수증(恐症)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비형은 어느 날 밤 티나한이 자고 있는 동안 그 밧줄을 풀어 보았다.
비형은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비형은 분기탱천한 티나한의 손에 하마터면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케이건이 노랫소리를 들은 것은 비형이 티나한을 향해 ‘더 가까이 오면 침 뱉을지도 몰라요.’ 라는 둥의 헛소리를 외치고 있을 때였다.
남겨진 수명을 헤는 일도 두렵고
썩어 들어가는 수족을 추스리는 짓도 포기한 지 오래.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목 아래에 걸터앉아
빛나던 이들을 생각한다.
케이건은 고개를 돌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비형을 향해 풍부한 해부학적 지식이 담긴 폭언을 퍼부어 대느라 바빴던 티나한은 그 손짓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케이건은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티나한이 겨우 부리를 닫자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보다 뚜렷하게 들렸다.
사랑하는 나의 왕이여, 내 주인이여.
질투 많은 운명조차 일컫지 못할 영광을 주신 분이여.
어버이께서 주신 내 육은 이곳에서 썩어 들어가나
왕께서 일깨워 주신 내 영은 영광 속에서 영원하리라.
륜은 스스로 노래를 부르며 동시에 그 노래를 감상했다. 화리트가 그의 머릿속에 심어 둔 노래는 기억의 형태였고 따라서 륜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으로 그 노래를 듣는 셈이었다. 륜은 그 단순한 선율이 이상하도록 힘에 차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가 느낄 수 있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륜은 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빙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열대의 키보렌에서 나고 자란 그가 빙하의 무서움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밖에 할 수 없듯이, 왕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온 륜은 자신이 부르는 연군가(戀君歌)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래가 바치는 찬양의 대상은 곧 다른 이에게 옮겨갔다. 륜은 자신이 부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아름다운 나의 벗이여. 내 형제여.
살았을 적 언제나 내 곁에, 죽은 후엔 영원히 내 속에 남은 이여.
다시 돌아온 봄이건만, 꽃잎 맞으며 그대와 같이 걸을 수 없으니
봄은 왔으되 결코 봄이 아니구나.
케이건은 눈앞의 세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단단한 나무의 감각이 그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고, 케이건은 가까스로 현실 감각을 잃지 않았다. 비형은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래입니다! 그 나가겠지요?”
“그런 것 같소.”
“그런데 건너편이잖아요. 어떻게 우리의 가수에게 연락하죠? 고함을 지를까요?”
“나가니까 못 들을 거요. 노래를 부르기는 하지만……………, 우리가 건너가도록 합시다.”
티나한은 그 말에 대경실색해서 강물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나한 당신은 여기 있으시오. 나와 비형이 딱정벌레를 타고 건너가서 그 나가를 데려오겠소.”
티나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형은 딱정벌레를 불렀다. 나늬가 비형 앞으로 걸어오자 비형은 재빨리 올라탔다. 하지만 케이건은 여전히 강변에 선 채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홀린 듯한 시선을 보며 비형은 당황하여 외쳤다.
“뭐해요, 케이건?”
“아.”
케이건은 누구에게 끌려오듯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딱정벌레 위에 올라앉았다. 비형이 등딱지를 두드려 신호를 보내자 나늬는 겉날개를 펼치더니 폭발하는 기세로 날아올랐다. 삽시간에 숲이 발아래로 쑥 내려갔다. 비형은 다시 신호를 보내어 강물 위로 날아가게 한 다음 등 뒤의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뭔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웅얼거리는 날개 소리 때문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비형은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고 케이건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강물을 내려다보며, 케이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대사원에서 저 나가에게 가르쳐 준 노래가 하필 저것이라니. 물론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신호가 되어 주었고 그래서 케이건은 진정할 수 있었다. 그때 비형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려 보자. 비형은 입 모양을 크게 강조하며 말하고 있었다.
‘보입니다!’
케이건은 허리를 옆으로 기울여 비형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나가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비형은 딱정벌레를 그쪽으로 몰아갔다.
나가의 모습이 더 커졌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지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가는 딱정벌레 쪽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건이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요스비?”
저 아래쪽에서 걷고 있는 나가는 요스비가 틀림없었다. 그 걸음걸이는 요스비의 걸음걸이였고 그 손동작은 요스비의 손동작이었다. 무엇보다도 허리에 차고 있는 사이커가 확실한 증거였다. 케이건은 비명처럼 외쳤다.
“요스비!”
날갯짓 소리 때문에 케이건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케이건은 비형을 다그치듯 그 어깨를 흔들었지만 비형은 섣불리 내려서지 못했다. 강변엔 강물 속으로 뿌리를 뻗은 나무들이 가득했고 따라서 딱정벌레를 착륙시킬 만한 곳이 없었다. 비형은 어쩔 수 없이 딱정벌레를 선회시키며 착륙할 만한 장소를 골랐다. 그의 사정을 짐작한 케이건은 입술을 깨물며 초조함을 달랬다. 그의 눈은 나가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때 비형이 다시 케이건의 어깨를 쳤다. 비형은 놀란 눈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방향을 본 케이건은 또 다른 나가 한 명이 걸어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자 나가였다. 그리고 커다란 검을 뽑아 든 채 노래를 부르던 나가의 등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밀고 수풀을 헤치는 모습이 퍽이나 대단한 소리가 날 것 같았지만 앞쪽에 있는 나가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듯 지금까지와 똑같이 걷고 있었다.
케이건은 황급히 외쳤다.
“내려갑시다!”
“뭐라고요?”
“내려가자고! 요스비가 위험하오!”
케이건의 입 모양을 읽은 비형은 요스비가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아래는 여전히 울창한 밀림이었다. 케이건도 그것을 깨달은 듯 다시 손짓을 하며 외쳤다.
“겉날개를 펴고 활공하시오! 뛰어내리겠소!”
비형은 감탄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보았다. 그런 것도 알고 있냐고 묻는 얼굴이었지만 케이건은 다급한 시선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비형은 황급히 딱정벌레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나늬는 위로 힘껏 날아올랐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 도달하자 속날개를 접어 넣었다.
굉음이 사라졌다.
딱정벌레는 단단한 겉날개만 편 채 허공을 스르륵 미끄러졌다. 속날개가 움직이고 있을 때 그 탑승자는 옆으로 뛰거나 하지는 못한다. 속날개의 무시무시한 움직임에 휘말려 큰 사고를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날개만 펴고 날아가는 지금은 옆으로 뛸 수 있는 요건이 갖춰졌다. 비형과 나늬는 필사의 기술을 다해 나가들을 향해 활공했다.
칼을 뽑아 든 채 걸어오던 여자 나가는 이미 앞쪽의 나가에 지척까지 이르렀다. 갑자기 앞쪽에 있던 남자 나가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니름을 들은 것일까? 남자는 놀란 기색으로 여자를 바라보았고 여자는 칼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순간, 케이건이 우레 같은 노성을 지르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멈춰! 삼켜 버리겠다!”
비형은 저 말이 저토록 실감 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