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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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5)


하텐그라쥬의 야경을 바라보던 비아스 마케로우는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얇은 나무판이 들려 있었다. 서판이라는 퍽이나 소박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나무판은, 그러나 나가에겐 최상급의 기록용 물건이다. 굳이 나무판 뒤에 있는 제조자의 낙인을 보지 않더라도 이것이 가장 성대한 나무 장례식을 치른 다음 최고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아스는 서판을 생전 처음 받아 보았다. 그리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사실은 분명 그녀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어느 가문에서 보낸 건지 알 수 없는 그 서신을 받았을 때 비아스는 그 내용보다는 그것이 서판에 쓰여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결국 비아스는 여섯 번째로 서판을 들여다보았다.

‘라디올 센의 이번 작품은 다행히도 비평가들의 악담을 면할 듯합니다. 가장 끈질긴 비평가라도 수마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풍문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된다면 오늘 밤 센 저택을 방문하여 그녀의 작품을 감상해 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라디올 센의 감사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덧붙여 제 작은 호의도.’

서명은 없었다. 그 해괴한 내용에 덧붙여 서명까지 없다는 사실은 비아스를 꽤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처음 얼마 동안 비아스는 그것이 카린돌의 또 다른 장난일 거라 추측했다. 하지만 세 번째 보았을 때 비아스는 그것이 카린돌의 필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서판을 본 지금 비아스는 그것이 절대로 카린돌의 소행이 아니라는 확신을 느꼈다. 카린돌은 보다 직접적인 방식을 선호한다. 그리고 비아스는 자신을 희대의 극작가 겸 연출가 겸 명배우라고 믿는 얼간이의 작품 발표회에 참석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카린돌이 비아스를 반드시 센 저택에 보내고 싶었다면 라디올 센의 이름 대신 최연장자인 수이신 센의 이름을 거론했을 것이다.

결국 비아스는 부딪쳐 보기로 결심했다. 심호흡을 한 비아스는 호위하고 있던 남자들 중 하나에게 지시를 보냈다. 남자는 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라디올 센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정문으로 뛰쳐나왔다. 비아스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대가문의 일원으로서는 너무 체통이 없는 짓이었다.

<비아스! 맙소사, 비아스 마케로우! 제 작품을 보러 오셨다고요? 정말 기뻐요! 초청장도 보내 드리지 못했는데. 아, 오셔서 기분 나쁘다는 니름이 아니에요. 감히 당신처럼 저명하신 분께 보내 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 거예요!>

라디올이 니르기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비아스는 은편 두 닢짜리 서판에 굴복하고 만 것을 후회했다. 라디올은 비아스의 팔짱을 낀 채 센 저택 안을 종횡무진 걸어 다녔고 그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친근한 태도에 비아스는 비늘이 설 지경이었다. 그들은 서로 분야가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비아스가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전문가인데 반해 라디올은 다른 예술가들도 동류로 생각하기 싫어하는 엉터리였다. 예술에 별 관심이 없는 비아스조차도 라디올 센이 센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적대적인 평가를 모면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인 라디올 센은 자신의 대한 세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약술과 연극의 공통점 (어처구니 없는 주제였다!)이라든가 예술가의 고뇌(비아스는 라디올이 그런 것을 느낀다고 니르면 도깨비도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따위에 대해 닐러 대던 라디올은 30분 후에야 비아스를 놓아주었다. 발표회 준비를 하러 가야 한다는 라디올의 니름에 비아스는 속으로 환호를 올렸다. 그리고 라디올이 떠난 다음에야 비아스는 겨우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살펴볼 여유를 되찾았다.

비아스는 센 저택의 홀에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라디올 센의 연극을 보러 왔으리라 짐작되는 사람들은 몇 명씩 소모임을 이룬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무심히 그 광경을 보던 비아스는 문득 사람들이 반드시 기둥 주위에 모여 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나무 아래에 모여 있는 버섯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오가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그런 식으로 서는 것이 이상적이긴 했지만 비아스는 흥미를 느끼며 인간이나 레콘, 도깨비도 그런 식으로 모여 설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비아스는 곧 기둥 근처가 아닌 곳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의 경우 그것이 당연했다. 그는 양손에 춤채를 든 채 춤을 추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없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긴 비아스는 홀을 가로질러 남자 가까운 곳의 기둥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남자를 관찰했다. 곧 비아스는 왜 구경꾼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춤은 끔찍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멈춰 서서 구경한 다음 예의상 물방울을 던져주는 수고를 감수할 정도도 아니었다. 남자 또한 구경꾼을 바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자주 춤을 멈추고는 동작을 조금씩 바꿔 보거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곤 했다. 춤을 춘다기보다는 춤을 연습하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많은 손님들이 있는 곳에서 춤 연습이라는 건 어울리지도 않는 노릇이다. 비아스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대화 상대를 발견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기둥 옆에 서 있었다.

남자의 춤채가 식었다. 남자는 한쪽에 놓여 있던 화로에 그것을 꽂아두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비아스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웃으며 비아스에게 걸어왔다. 남자답지 못한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아스에게 남자는 부드러운 니름을 보내었다.

<비아스 마케로우 님이시지요?>

<어떻게 나를 알지?>

<몇 번 먼발치에서 뵌 일이 있습니다. 심장탑에 오시곤 하셨을 때.>

<심장탑?>

<예. 저는 갈로텍이라고 합니다. 심장탑의 수호자입니다.>

비아스는 웃으려 했다. 하지만 곧 비아스는 의심에 찬 눈으로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그런 비아스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비아스는 자신 없는 투로 닐렀다.

<정말 수호자이십니까?>

<거짓니름을 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잖습니까?>

<수호자께서 왜 이런 곳에……………, 게다가 그 모습으로 춤이라니요?>

갈로텍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자의 옷은 활동적인 일에는 어울리지 않지요. 춤을 춘다거나 하는 일처럼. 물론 도움이 될 때도 있죠. 예를 들어,>

<아니요. 제 니름은 그게 아니라………….>

“누군가를 죽일 때 같은 경우가 그렇죠.”

비아스의 비늘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갈로텍은 얼굴 가득한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차분하게 비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 비아스는 육성을 듣지 못한 척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충격을 너무 많이 드러내었다. 비아스는 딱딱한 니름을 보내었다.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수호자의 옷에 그런 장점이 있다니. 어떤 점에서 그런지 닐러주시겠습니까?>

갈로텍은 니르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보통 나가들은 수호자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수호자라고 생각하지요. 상대방이 사이커로 자기 등을 벨 때까지는 말입니다.”

비아스는 정신적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갈로텍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날 나를 본 걸까? 비아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수호자들은 모두 적출식 준비로 바빴다. 이를 악문 채 갈로텍을 바라보던 비아스는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있음직한 이야기군요.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경우를 아시는 것 같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수호자의 옷이 범죄 도구로 사용된 것에 애석해하시겠군요?”

“아니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만족감과 고취감을 느꼈습니다.”

비아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언어를 고르며 비아스는 혹이 홀 안에 소리에 신경을 쓰는 괴벽을 가진 나가가 없는지 살폈다. 갈로텍은 그런 비아스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자들은 지금 모욕이 되지 않으면서도 라디올 센의 불타는 예술혼을 단번에 꺼뜨릴 수 있는 적절한 니름을 궁리해 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물론 그중 또 어떤 자들은 그 니름을 써먹을 다른 사람은 없을까 고민하고 있겠지요. 어쨌든 소리에 신경 쓰는 자는 없습니다.”

“누가 서판을 보냈는지 알 만하군요. 만족감과 고취감을 느끼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비아스는 갈로텍의 미소가 갑자기 차가워졌다고 생각했다. 갈로텍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갈로텍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눈으로 홀 한쪽을 가리켰다. 비아스는 뒤를 돌아보고는 이를 갈았다. 갈로텍이 닐렀다.

<라디올 센의 연극이 시작되는 모양이군요. 가 보실까요? 그녀가 비평가들을 몇 분 만에 재울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군요. 아, 못 다한 니름을 마저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군요. 내일 시간을 내어 심장탑을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마케로우?>

예술에 큰 관심이 없는 비아스 마케로우는 다른 비평가들만큼 라디올 센을 혐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하텐그라쥬에서 비아스 마케로우만큼이나 라디올 센을 증오하는 자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자꾸만 곤두서려는 비늘을 힘겹게 내리누르며 비아스는 갈로텍에게 닐렀다.

<꼭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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