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3)

랜덤 이미지

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3)


방바닥을 미끄러지는 뱀들을 보던 오레놀 대덕이 환호를 올렸다.

“계획이 부활했군요!”

쥬타기 대선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계선을 넘어오기로 했던 신명을 가진 수련자가 하텐그라쥬를 떠나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대선사는 더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화리트의 유지를 받아들여 계획을 부활시킨 것이다. 오레놀은 거의 날뛸 듯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정말 놀랍군요. 완전한 자격을 가진 또 다른 자가 화리트의 친구였고 또 침묵의 도시를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케이건 님과 이미 만났다고 하는군요! 실로 어디에도 없는 신의 보살핌이십니다.”

“우리도 정신 억압이라는 걸 할 줄 안다면 물어볼 것이 많을 텐데. 아쉽구나. 난 이 륜 페이라는 청년이 몹시 궁금하구나. 하지만 저쪽에서 완전한 자격이 있다고 말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옳거니! 보름쯤 전에 한계선을 넘었을 거라고? 됐다!”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대화 상대자가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수호자 세리스마는 시시콜콜할 정도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한 다음 사이의 전달을 끝냈다. 덕분에 뱀들은 기진맥진했고 오레놀은 그것을 직접 주워 담아야 했다. 그동안 쥬타기 대선사는 생각에 잠겼다. 문득 오레놀을 바라본 대선사는 대덕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 오레놀?”

“대선사님. 물론 꺼져 가던 계획의 불씨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게다가 예상할 수 없는 바람을 타고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이 너무 많습니다. 그 비아스 마케로우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요? 미친 자일까요? 게다가 사모 페이라는 여자도 이해하기 어렵군요. 나가들은 그녀가 훌륭한 여자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만, 자기 남동생을 죽이는 것이 나가들에겐 그렇게 훌륭한 일입니까? 비아스 마케로우와 마찬가지잖습니까?”

“상황이 다르지 않느냐. 비아스는 무가치한 남동생이 화를 돋운다는 이유로 죽인 것이고, 사모는 사랑하는 동생이 죽음보다 못한 고통을 겪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죽이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남동생을 보는 관점은 완전히 정반대다.”

“하지만 두 여자 모두 상대방의 의사는 배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아스가 화리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죽인 것처럼 사모 또한 륜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그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정작 륜 페이는 고통 속에서라도 살길 바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래. 그리고 네가 지적한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다. 이번 계획만 놓고 보더라도 마찬가지니라. 만일 이 계획이 탄로 난다면, 속인들은 자기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일에 대해 자기네들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머리 깎은 몇몇 중놈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할지도 모르잖느냐?”

오레놀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왕병 환자가 아닌 바에야 누가 그러겠습니까. 오히려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대선사로 하여금 이마를 짚게 만들었다.

“네 녀석이 내 수제자라니, 이 땡초가 이고 갈 죄가 정말 무겁다.”

“네?”

대선사는 고함을 빽 질렀다.

“이 놈아, 그렇다면 륜 페이도 사모 페이에게 박수, 아니, 나가니까 물방울을 던질지도 모르잖느냐!”

오레놀은 입을 쩍 벌렸다. 곧 대덕은 코 막힌 소리로 변명을 시작했다.

“하, 하지만 경우가 다르잖습니까. 사모는 동생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생명들을 살리려 하고 있고요.”

“네가 모든 생명들에게 물어봤느냐? 살고 싶은지 물어봤느냐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오레놀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젊은 대덕은 그저 입만 뻐끔거리며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덕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 대선사는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선사는 염주를 헤아렸다.

“오레놀, 네 마음속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의심하고 가장 분명한 것을 포기하여라. 사모 페이는 동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동생을 죽이려 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계획을 진행 중이고. 그 차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을 거다.”

“크지 않다고요?”

“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말이다. 죽음을 강요하든 삶을 강요하든.”

암자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뎅그렁 울렸다. 대선사는 염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우리 화상들은 죄를 이고 간다 하느니라.”

오레놀은 깊은 이해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대선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땡초들이 아니면 누가 죄를 이고 가겠느냐. 계획이 부활했으니 다시 채비를 갖추도록 해라.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도착하겠지 싶구나. 조타 중대사에게 가서 철혈암(鐵血庵)을 비워 주십사 부탁해라.”

“철혈암이면 되겠습니까?”

“그곳이 적당하겠다. 다른 사람들을 숙식시키기도 좋고 사원의 다른 곳들과도 충분히 머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쥬타기 대선사는 몸을 돌려 죽편 하나를 꺼내었다. 오레놀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적혀 있다. 네가 책임지고 준비를 하도록 해라. 너 혼자서는 힘들 테니 기개가 높은 행자 몇 명과 함께 준비하도록 해라. 그 행자들에겐 반드시 모든 사실을 다 알려줘야 한다. 정성스러운 마음이 아니고선 차라리 데리고 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내 가끔 찾아가 보겠지만, 책임은 네게 있다. 중한 책임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오레놀은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끼며 죽편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경건하게 죽편을 읽던 오레놀은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피도 뿌려야 합니까?”

“너 도깨비냐? 피 좀 뿌리면 어때서. 산 뒤편의 밀렵꾼들 몇 명 잡아다 족치면 피를 뿌릴 만한 동물을 잡아다 줄 거다.”

오레놀은 승려의 몸으로 피를 뿌리는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또 무도한 밀렵꾼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거의 전설이 되다시피한 파름 산 승려들과 밀렵꾼들 사이의 오랜 반목을 현재에 계승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오레놀이 그에 해당한다. 철없고 기고만장했던 행자 시절, 동료 행자들을 이끌고 파름 산을 누비며 밀렵꾼들을 두드려 잡는 일로 나날을 보내곤 했던 오레놀의 무용담은 아직까지도 행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그리하여 밀렵꾼들이 크게 개심하여 마침내 승려가 되었다면 이야기가 참으로 아름다웠겠지만, 밀렵꾼들은 대개 대사원에서 다친 몸을 치료한 다음 오레놀에 대한 흉측한 평판만 가지고 돌아갔고, 그래서 밀렵꾼들은 대사원의 주지 이름은 몰라도 ‘미친 땡중’ 오레놀의 이름은 알고 있다. 그 밀렵꾼들에게 동물을 부탁한다면 밀렵꾼들이 오레놀을 얼마나 비웃겠는가. 오레놀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승려가 아니면 누가 죄를 이고 가겠습니까. 살신(殺神)을 막으려면 더한 일이라도 해야겠지요.”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