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17)

랜덤 이미지

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17)


하텐그라쥬에 이슬처럼 가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을 돌아본 주퀘도는 하텐그라쥬의 지붕들 위로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볼 수 있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주퀘도의 뺨을 스쳤다. 그가 깃든 나가의 몸은 창가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있었지만 주퀘도는 그것을 무시했다. 대신 창턱에 팔을 괴며 말했다.

“그 요새를 타고앉으면 시구리아트 산맥 남서부를 거의 장악할 수 있어. 그런 기막힌 곳에 그런 천혜의 요새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하는 일이라곤 고작 여행자들에게 통행료나 받는 일이라니, 얼빠진 것들.”

주퀘도의 말이 잠시 멈춘 틈을 타 갈로텍은 그 입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왜 은편 열 닢은 지불했지요?”

주퀘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다시 질문했다.

“그냥 물러나도 되었잖아요. 왜 통행료를 지불하고 그 관문을 통과했죠? 결국 오기 아니었던가요? 그 요새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통과하고 말겠다는 이유 없는 오기였을 겁니다. 그렇지요?”

“너희들이 오기라는 것이 뭔지 알기는 하냐?”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미 진 다음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도록 눈을 가려 버리는 감정이지요. 결국 그게 더 크게 지게 되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게 되죠. 지성인이라면 그런 감정 따위를 자신에게 허락할 필요가 없어요.”

“정말이지 피가 차가운 짐승들하곤 이야기를 못 하겠군.”

주퀘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갈로텍은 그 시점에서 전면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주퀘도는 그것을 거부했다. 저항에 부딪힌 갈로텍은 짜증을 내며 강제로 전면에 나서 볼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갈로텍은 그러지 않았다. 일반인도 그렇지만, 군령자 또한 자기 자신과 원만하게 지내야 하는 법이다.

비와 밀림이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한없이 아스라한 선을 바라보던 주퀘도가 말했다.

“그건 작동할 거다.”

“예?”

“노기가 그려 준 것. 작동할 거라고 생각된다. 믿어도 돼.”

“믿어도 된다고요? 노기도 확신하지 못했어요.”

“하나를 상대하려면 셋이 필요하지만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아보려면 둘만 있으면 되잖아. 노기와 내가 긍정했으니 그건 나늬일 거다.”

“어떤 사람들은 나늬가 네 명의 동명이인이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각자 나가, 레콘, 도깨비, 인간이었던 네 명의 나늬가 있었다는 거죠.”

갈로텍은 혀를 찼다.

“그런 형편없는 소릴! 역시 피가 차가운 것들이 할 만한 말이군.”

“글쎄요. 그게 형편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모든 종족들의 눈에 똑같이 아름답게 보였다는 한 명의 신비한 미녀를 상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가설이긴 한데요.”

“내가 듣기엔 네 명의 동명이인이 있었다는 말이 훨씬 황당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나늬는 레콘이었을 겁니다. 힘을 써서 강제로 상대방에게 아름답다는 평가를 얻어 낸 거죠.”

주퀘도는 갈로텍의 농담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럴듯한 가설이군.”

“정말 저게 보늬가 아니라 나늬일 거라고 확신해요? 작동할 거라고 믿는 겁니까?”

“내가 옛날에 비슷한 걸 구상해 봐서 확신하는 거야.”

“예? 어디에 쓰려고요?”

“정신을 좀먹는 음료 보관하려고 그랬다. 왜? 그건 그렇고 몸이 차가워지는군. 네 몸은 정말 골치 아파. 다음엔 레콘을 고려해 보라고 했던 것, 유념해 봐. 그만 내려가련다.”

주퀘도는 의식의 뒤로 사라졌다. 잠시도 영이 부재할 수는 없기에 뒤에서 기다리던 갈로텍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갈로텍은 황급히 창가에서 떨어지며 비늘을 약간 부딪쳤다.

탁자로 돌아온 갈로텍은 다시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환상적인 난해함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갈로텍은 도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포기하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주퀘도의 말처럼,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아보려면 둘이면 충분하다. 두 사람이 긍정했으니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아스는 승리감을 만끽했다. 갈로텍은 약속을 지켰다. 마케로우 가문에 남자들이 찾아든 것이다. 카린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남자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비아스하고만 어울리려 드는 것을 알게 되자 차츰 포악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게 되었다. 덕분에 처신이 곤란해진 것은 스바치였다. 카린돌은 그에게 소메로를 임신시키라고 강요했다. 심지어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녀의 협박 수단은 전율스럽게도 심장 파괴에 대한 사실을 고발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신 거 아닙니까? 그걸 고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시잖습니까!>

<내 절실함을 이해해 준 것 같아서 고맙군. 스바치. 심장 파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첨부된 내 유언장이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닐러 주면 더욱 도움이 될 것 같군.>

스바치는 결국 카린돌을 안심시키기 위해 카루에게 구원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메로 마케로우는 저돌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두 명의 남자에게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최연장자인 데다 가주의 깊은 신임을 얻고 있는 그녀가 자손까지 가지게 된다면 비아스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의 입지를 굳히게 될 것이 자명했지만, 그러나 당황한 소메로는 스바치와 카루를 멀리했다.

기가 막힌 카린돌은 소메로가 두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암시하기 위해 애썼다. ‘언니의 아기를 보고 싶다.’는 식의 가벼운 것에서부터 시작된 암시는 결국 ‘가주 계승을 생각할 나이가 되기 전에 아이를 장성시켜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직설적인 것으로까지 발달했다. 하지만 소메로는 화리트를 잃은 카린돌에게 더욱 자녀가 필요할 거라 닐르며 그녀에게 남자를 양보하려 했다. 소메로는 아직까지도 남동생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던 ‘셋째 누나 카린돌’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카린돌의 상심이 크리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카린돌로서는 심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덕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멍청이! 저러다 비아스가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카린돌은 격노하여 닐렀다. 스바치는 얇게 웃었다.

<아마도 그 임신을 축하해 주며 조카들의 이름을 고민하지 않을까 추측되는군요.>

<듣자마자 동조하고 싶어지는 전망 같은 것 들려 주지 마. 그런 생각 안 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제기랄, 저 비아스 추종자들은 도대체 뭐지?>

<그렇게 답답하시다면 당신 자신이 임신하시는 편은 어떻겠습니까?>

<너 나한테 안기고 싶나?>

스바치의 비늘들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꼭 그런 니름을 하셔야겠습니까? 전 그냥 제안을 해 본 겁니다.>

<남자나 낼 법한 멍청한 제안이니까 고마워하고 싶지도 않잖아! 지금 시점에서 내가 임신을 하면 비아스와 나 사이엔 전면전이 벌어질 거야. 가주께서 나와 비아스 중 하나를 정찰대로 보내 버려야겠다고 판단할 만큼 거친 대립이 일어날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정찰대에 가게 되는 건 나야! 비아스는 자신이 잘나신 약술사라서 하텐그라쥬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해야 된다는, 나는 할 수 없는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이다!>

<그렇군요. 소견머리 없는 제안을 용서하세요.>

<소메로가 임신해야 돼. 젠장. 좀 더 잘 할 수 없겠어, 스바치?>

<어떻게 잘 하라는 건가요. 그 분께서 저를 침실에 들이지 않으시는데. 그리고 이건 제 문제가 아닙니다. 소메로 마케로우 님은 카루도 거절하고 계시잖아요.>

카린돌은 비늘을 곤두세운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케로우 저택의 정원에는 비에 씻긴 풀들이 솜씨 없는 직조공이 격심한 자기혐오에 빠진 채 짜낸 천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다. 좀 다듬는 편이 좋겠지만, 나가들은 자르지 않는 쪽을 더 선호한다. 혼란스러운 분노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풀을 쥐어뜯는 카린돌을 보며 스바치는 비늘을 조금 부딪쳤다. 스바치가 그만 뜯으라고 권하려 했을 때 카린돌은 갑자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갈라지고 찢어진 풀잎을 내려다보며 닐렀다.

<너 수련자였다고 했지, 스바치.>

<스승님의 우환거리였던 불민한 제자였지요.>

<어쨌든 너는 아직까지 수호자들에게 접촉할 방법은 가지고 있을 거야. 그렇지?>

<찾아가면 좋은 낮으로 맞이해 주시진 않겠지만, 예. 그렇습니다만?>

카린돌은 손에 쥐고 있던 풀잎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스바치는 왜 카린돌이 그런 니름을 꺼내는지 추측해 보았지만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그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측이 있긴 했지만. 그러나 카린돌은 스바치가 부정하고 싶었던 바로 그 추측을 닐렀다.

<만약 어떤 나가가 심장 파괴 청부를 부탁한다면, 수호자들은 뭐라고 할까?>

스바치는 기가 막힌 눈으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수호자들은 암살자가 아닙니다!>

<최소한 한 번은 했을걸. 내가 목격자야. 그러니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식의 순진한 니름은 그만 둬.>

<세상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는, 눈물 젖은 손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쯤은 아시잖습니까. 당신이 우연히 목격하게 된 그 건도 틀림없이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남매들의 증오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심장 파괴를 사용한다는 것은 니름도 안 됩니다!>

카린돌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스바치는 그녀의 손 안에서 풀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네가 평균적인 지성만 가지고 있다면 이미 내 니름들에서 화리트와 수호자 유벡스의 살해자가 누군지 짐작해 냈을 것이다. 스바치. 그 죄에 대한 처벌이 아직껏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없나?>

대답하려던 스바치는 카린돌의 손이 입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카린돌은 짓이겨진 풀을 삼켰다. 스바치의 온몸에서 비늘이 곤두섰다. 카린돌은 풀을 씹으며 닐렀다.

<그렇잖아, 스바치?>

스바치는 정신적으로 몇 번 더듬거린 다음에야 닐렀다.

<당신이・・・・・・ 정의감에서 그런 니름을 하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아, 물론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야. 그저 수호자들이 발견해 낼 수 있는 정의를 알려 주는 것일 뿐. 그리고 그 정의가 내 부탁을 들어 주는 수호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를 바랄 뿐이야.>

<수호자들은 그런 부탁을 무시하실 겁니다.>

<그러는지 알아봐야겠어.>

<무슨 니름이십니까.>

<심장탑에 가서, 영향력 있는 수호자를 찾아. 수련자였으니 쉽겠지. 그리고 그에게 내 니름을 그대로 전해. 유언장에 그 전모를 상세히 기록해 둘 만큼 심장 파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어떤 여인이 모 여인에게 그 비밀스러운 의식이 시행되는 것을 참관하길 원한다고. 거기에 네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자유야. 하지만 내 니름은 그대로 전해져야 해. 알겠나?>

<수호자들은 절대로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수호자들은 내 유언장이 공개될 때 내 작문 능력이 외에 다른 것도 확인할 수 있을걸.>

스바치는 공포 속에서 닐렀다.

<그런 유언장 따위가 있을 리 없어요! 공증인이 없을 테니까! 당신이 설마 그런 내용을 다른 자들에게 보여 줬을 리가 없어요.>

카린돌은 웃었다.

<제법이군, 스바치. 아주 명쾌한 지적이야. 그런데 어떡하지? 품위 있는 나가의 방식대로 세 명의 공증인이 내 유언장에 인장을 찍었는데.>

<도대체 누가…….>

<두세나 마케로우, 소메로 마케로우, 비아스 마케로우.>

스바치는 경악한 얼굴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스바치는 사태를 깨달았다.

<인장을 훔쳤군요!>

<내 소박한 취미 중엔 열쇠 수집이라는, 수집가의 즐거움과 더불어 유용성까지 갖춘 취미가 있지. 스바치. 물론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인장이 도용되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상관없어. 그때는 이미 내 유언장이 공개된 후일 테니까. 그리고 내 유언장은 공개되기만 하면 충분할 뿐 집행될 필요는 없는 종류지.>

스바치는 더 이상 니를 수 없었다. 카린돌은 씹던 풀을 삼키며 닐렀다.

<가서, 내 니름을 전해. 스바치. 반드시 그런 수단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당장 사용할 수 있으면서 확실한 수단을 강구해 둬야 해. 그럴 때 수호자들은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때 나는 안전을 획득하고 수호자들은 정의의 실현을 얻게 될 테지.>

두려움 속에서 스바치는 생각했다. 카린돌이 심장 파괴에 대해 알면서도 침묵한 것은, 침묵하는 것이 나가들에게 이롭다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카린돌이 그것을 몸소 이용하려는 생각에서 침묵한 채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스바치를 비늘 서게 만들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