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7장 – 여신의 신랑 (12)
비형이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륜은 자신이 방 안에 갇힌 꼴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파름 산의 기온은 도깨비불이 없이는 방 밖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오레놀은 그런 륜을 동정하여 책들을 가져왔지만 그가 가져온 책은 모두 나가의 눈으로 읽기 힘들 글씨로 이루어져 있었다. 케이건은 말없이 웃옷을 벗은 다음 방바닥에 바라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책을 읽었다. 륜은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댄 채 케이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스화리탈은 륜의 무릎에 앉은 채 책 읽는 소리를 이해하는 척했다.
독서에 별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깃털로 뒤덮여 있다는 특징 때문에 티나한은 도저히 군불을 때고 있는 방 안에 앉아 있지 못했다. 오레놀이 열성적으로 불을 지폈기에 방안의 온도는 키보렌에 돌아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케이건이 책을 읽는 것을 끝내면 하늘치를 끌어내리는 일에 대해 물어볼 작정을 하고 있던 티나한은 결국 부리를 내두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오레놀에게 간 티나한은 도대체 며칠이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다. 오레놀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쪽에서도 당신들의 도착 여부를 알 수 없으니 충분히 여유를 두고 연락해 올 겁니다. 언제 연락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티나한은 오레놀이 부러뜨리려 애쓰는 땔감을 뺏아들고는 그걸 분질러 아궁이에 밀어넣었다.
“꼭 저쪽에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냥 우리끼리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불러도 될 것 같은데. 불러야 할 장소도 여기고 부를 사람도 여기 있잖아. 그리고 여신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라 대처 방안을 강구할 사람도 우리들인 것 같고.”
오레놀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아궁이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여신은 저들의 여신입니다.”
“음. 그래서?”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 잠시 이곳에 임하게 되시면 잠시 동안이지만 여신은 다른 나가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겠지요.”
“신경을 쓸 수 없다?”
“예. 비록 그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신랑인 륜이 여기에 있지만, 이 곳은 그녀의 집이 아닙니다. 이 사원은 어디에도 없는 신의 집이지요. 여신께서는 신랑의 부름을 받고 이 사원에 손님으로서 찾아오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잠깐 동안이지만 나가들은 여신의 관심권 밖에 놓이게 됩니다.”
“어어? 그럼 나가들이 신을 잃는 거야?”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륜 또한 나가니까, 여신이 륜과 대화하고 있다면 그건 나가와 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그런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수호자들이 자신의 신부가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점이죠.”
“오-호?”
“우리는 잘 알 수 없고 실감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수호자들과 발자국 없는 여신의 관계는 밀접합니다. 부부 관계로 표현될 정도니까요. 발자국 없는 여신이 잠시 이곳에 찾아드시면 수호자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자칫하면 저쪽에 있는 우리 동지들에게 위험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군. 그래서 저쪽에서 동태를 살펴 신호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신랑 신부야?”
“예?”
“왜 신랑 신부냐고. 남편과 아내가 아니고.”
“아, 나가들의 수호자들은 신명을 받았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를, 그러니까 평생을 기나긴 결혼식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결혼식이 끝났을 때, 여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편과 아내가 되는 거죠.”
“그럴듯하군. 함께 살아야 부부란 말이지.”
티나한의 담백한 해석에 오레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티나한은 부엌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데 너희 대선사는 어디에 있는 거지?”
오레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대선사님께서는 석굴에서 참선하시는 중입니다. 그 분은 두억시니를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 때문에 몹시 상심하셨지요.”
“신을 잃어버린 것들이야. 그렇게까지 우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오레놀은 큰 용기를 끌어내어 말했다.
“티나한. 만약 나가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당신들도 신을 잃게 될 겁니다. 그때 누군가가 신을 잃어버린 자들이니 상관없다 말하며 당신들을 학살한다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티나한은 부리를 꽉 닫았다. 티나한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오레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티나한. 바쁘지 않으시면 저와 함께 좀 가주시겠습니까?”
“어딜 가는데?”
“산 뒤편에 밀렵꾼들을 만나러 갑니다. 륜 페이가 먹을 산 동물이 필요해서요. 아무래도 흉악한 자들인지라 당신이 함께 가준다면 든든할 것 같군요.”
티나한은 오레놀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케이건에게 다녀오겠노라 말한 다음 산 뒤편으로 떠났다.
오후 내내 케이건은 가끔 불을 살피는 시간을 제외하면 한결같은 목소리로 책을 읽었다. 온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과 문을 모두 닫아둔 방안은 무덥고 답답했다. 케이건의 옷은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고 그 머릿결은 덩이져 얼굴에 달라붙었다. 보다 못한 륜은 책 읽는 것은 그만해도 된다고 권했지만 케이건은 거절했다.
“사모 페이는 결국 네게 올 거다. 륜.”
오후 내내 케이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던 륜은 그 감정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케이건이 책을 읽으며 앉아 있는 것은 륜이 지루해할까봐가 아니라 사모 페이를 기다리기 위해서임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륜은 곧 그런 마음을 먹은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모 페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목을 잃게 되는 것은 륜이다. 륜은 무릎에 앉아 있는 아스화리탈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책 대신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당신 땀이 그 책을 더럽히는 것 같은데요.”
케이건은 책을 내려놓았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나.”
“요스비에 대한 이야기라면?”
“거절이다.”
륜은 상심하지 않았다. 거절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수호자들이 벌이고 있다는 그 살신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그건 네가 여신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이지 않느냐. 여신이 대답해 줄 거다.”
“저는 확실히 신명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여신을 부른다느니 하는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그 분은 너의 신부다.”
륜은 신부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나가의 문화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문득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겐 아내가 없나요?”
“아내?”
“예. 당신이 유일하게 헌신하고 당신에게만 유일하게 헌신하는 여인이요. 그런 거 맞죠?”
케이건은 묵묵히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그 어린 용은 마치 사람이나 된 것처럼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륜의 무릎 위에 드러누워 있었고 그 꼬리는 치렁하게 늘어져 있었다. 용이 조금 커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케이건은 무심히 말했다.
“있었다.”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군요. 헤어지셨나요?”
“죽었어.”
륜은 놀라서 케이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써?’ 라고 물으려 했던 륜은 인간의 경우 사고나 질병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아, 이런. 죄송해요. 무슨 사고였나 보군요?”
“나가가 죽였어.”
륜은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경련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여전히 그의 무릎만 볼 뿐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부인께서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오셨던가요?”
“응.”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케이건.”
케이건은 눈을 들어 륜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열었을 때 케이건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았다.
“몰라도 화내지 않겠어.”
“예?”
“사과할 방법을 몰라도 화내지 않겠다고 말했어.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 부인을 뜯어먹은 것에 대해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륜의 비늘이 다시 세차게 일어나며 벽과 바닥을 때렸다. 아스화리탈이 깜짝 놀라 깨어나서는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륜은 떨리는 손을 서로 맞잡았다. 그의 뇌리에 화리트의 니름이 떠올랐다.
‘추적하고, 죽이지. 그리고 먹힐 수도 있어.’
나가들이 비에나가를 그렇게 처리한다면 인간 여인을 못 잡아먹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륜은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그렇게 했습니까?”
“서른 명이었어. 서른 명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뜯어먹었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더군. 가까스로 그녀들을 물리치고 나서 아내의 유해를 돌려받았지.”
공포에 떨면서도 륜은 케이건의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가가 먹어버린 아내를 어떻게 돌려받았다는 것일까? 그러나은 곧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륜은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른 명의 배를 모조리 갈라 아내를 꺼낸 다음 그걸 짜맞추었다.”
륜은 신음을 흘리며 기절했다.
아스화리탈은 걱정스러운 듯 쓰러진 륜의 얼굴 앞을 오락가락했다. 날개를 퍼득거리기도 하고 조그마한 머리로 륜의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하던 아스화리탈은 등 뒤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는 몸을 돌렸다. 케이건이 일어나 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손에는 바라기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아스화리탈은 날개를 접으며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용의 배가 부풀어오르며 그 꼬리는 세차게 진동했다. 여차하면 불을 뿜을 기세였다. 케이건은 그런 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드라카. 바지로이 범그루말 어이리. 님자를 베퍼나게 한 이언 …….”
아스화리탈은 케이건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진동하던 용의 꼬리가 위로 치솟아 둥글게 말렸다. 당장이라도 얼굴 앞으로 내려올 기세였다.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위크놋다. 드라카.”
케이건은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서쪽 하늘이 선혈과도 같은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황금의 땅 위로 사물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케이건은 바람이 몸을 식히도록 내버려둔 채 눈을 감았다.
케이건은 모든 것을 기억했다. 나무에 묶인 채 울부짖던 그녀, 제발 오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외치던 목소리, 격노처럼 나부끼는 잎사귀들, 미친 듯이 달려들던 나가 여인들. 갑자기 끊어진 비명, 초록의 대지 위로 흘러내리던 빨간 피, 그리고, 끔찍했던 격투. 쓰러진 나가 여인들의 가슴을 가르고 갈빗대를 들어내고 그 위장을 찢을 때의 소름끼치는 느낌들. 케이건은 모조리 기억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케이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케이건은 그녀가 좋아하던 꽃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케이건에게 무시무시한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한 시간 후, 사모와 두억시니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