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7장 – 여신의 신랑 (14)
하늘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으로 나타난 티나한 은 내려서자마자 철창을 한 바퀴 돌렸다. 사모는 얼굴을 덮치는 바람에 질리는 기분을 느꼈다. 철창을 똑바로 쥔 티나한은 케이 건에게 짧게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많이 기다렸지?”
케이건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두억시니들은 레콘의 등장에 불편한 심기를 느꼈고 마루나래 또한 낮게 으르릉거렸다.
하지만 사모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이 아니라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목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도 모 르게 침착함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레콘에게 사과하 며 사모는 말했다.
“그렇다면 수호자들이 레콘들을 두억시니처럼 만들려 한다는
말이군.”
티나한이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그렇다! 감히 그런 흉계를 꾸미다니,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 야!”
되찾은 침착 때문에 사모는 그 이야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하군. 레콘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왜 수 호자들이 레콘들을 그런 비참한 지경에 빠트린다는 거지?” 케이건이 차분하게 말했다.
“레콘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히 가학적 취미의 만족 외엔 이득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콘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건가?”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게 된 케이건은 요점만을 빠르게 말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대로라면 세 명의 신은 한 명의 신을 상대한다. 현재 발자국 없는 여신을 다른 세 신이 상대하기에 이 지상에는 한계선이 설정되어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한계선은 나가가 활동하기 어려울 만큼 기온이 낮아지는 지점일 뿐이야.”
“기온은 신의 섭리가 아닐 거라 믿나. 페이?”
“그렇다면?”
“너희 수호자들은 발자국 없는 여신을 상대하던 세신 중 하나 가 없어지면 발자국 없는 여신의 세력이 강화되어 세상이 더 더 워질 거라 믿고 있다.”
사모는 크게 놀라 케이건과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더 워진다고? 사모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당장 깨달을 수 있었 다. 한계선의 북진, 키보렌의 확장, 대확장 전쟁의 재개.
“발자국 없는 여신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과 기온의 상승 사이
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케이건?”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너희 수호자들은 연관성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군.”
사모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긍정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겠어. 어떤 수호자들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제거함으 로써 세상의 기온을 바꾸려 하고 있는 것이군. 하지만 그것은 확 실한 일이 아니야. 레콘들만 괜히 멸망해 버리는 것일 수도 있 어. 그래서 또 다른 나가들이 그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급히 여 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수련자를 이곳에 보내어 여신과 대화하게 하려는 것이었군.”
사모는 카루를 떠올렸다.
“그것이 계획이었군.”
케이건은 바라기를 옆으로 약간 치우며 말했다.
“그렇다. 사모. 그렇다면 네 동생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았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도 네 동생을 죽일 텐가?”
사모 대신 티나한이 열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지! 아무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사모는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사모는 고개를 숙인 채 말
했다.
“륜은 어디에 있지?”
“저 방 안에.”
사모는 고개를 들어 케이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그 눈빛을 읽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케이건을 가만 히 바라보던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보내었다.
마루나래가 엎드렸다. 사모는 그 등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두억시니들은 당황하여 사모를 바라보았고 그중 몇몇은 말이 되
지 않는 소리들을 꽥꽥거렸다. 하지만 사모는 침착하게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케이건..”
철혈암으로 올라오는 길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승려들이 몰려오고 있는 듯했다. 케이건은 횃불이 움직이 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사모가 쉬크톨을 옆으로 뿌렸다.
“두억시니.”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의 머리 하나가 사모를 향했다. 사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 인간과 레콘을 붙잡아!”
케이건의 눈 주위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헐레벌떡 달려 올라오던 승려들은 철혈암에서 터져나온 괴성 에 질겁했다. 울먹거리며 도무지 발을 떼지 못하는 어린 행자들 을 다그치며 수좌들은 모범을 보이듯 손에 든 무기를 꼬나쥐었 다. 하지만 수좌들의 손에 들린 것은 지게작대기나 홍두깨, 절구 공이 등 무기라는 이름이 퍽 부담스러운 것들뿐이다. 그중에는 죽비를 들고 나선 수좌도 있었으니, 아마도 두억시니 퇴치와 참 선수행 지도를 좀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다른 수좌들도 그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무기값을 못하는 무기들만이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군 데군데 날이 새파란 장검이나 긴 창, 육중한 철퇴와 기세가 장중 한 철편 같은 중한 병기들도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몰려와 대사 원에서 기숙하며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자신의 무기를 움켜쥐고 뛰쳐나온 탓이다. 하지만 속세에서는 꽤나 난폭하게 살았고 거친 경험담을 이용해 순진한 승려들의 넋을 빼는 것으로 산중 생활의
낙을 찾던 이들 유학생들도 밤하늘을 찢는 괴성에 겁을 집어먹는 것은 승려들과 다름없었다.
그렇듯 철혈암에 이르는 오솔길 중간에서 무리가 머뭇거리고 있자 그들 가운데서 노승이 뛰쳐나왔다.
대사원의 주지 라샤린 선사였다. 겁을 집어먹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뛰쳐나온 다른 승려들에 비해 라샤린 선사는 손에 익 은 석장(錫杖)을 들고 나올 정도의 침착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 러나 살이 붙지 못하는 체질로 태어난 데다 검박한 산중의 식생 활을 오랜 세월 계속해 온 탓에 선사의 몸은 보기 안쓰러울 만큼 깡말라 있었다. 키가 좀 작았다면 좋으련만 대나무인 양 길기만 하니 그 모습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죽비를 휘두를 때만 큼은 그 눈빛을 본 승려들이 선사의 흉중에 살심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망측한 의심을 품을 정도로 용맹했다. 라샤린 선사 는 바로 그런 용맹무쌍한 눈빛으로 석장을 높이 들어올리며 크게 갈(喝)했다.
승려들과 유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라샤린 선 사는 석장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흰수염을 휘날리며 급경사의 길을 뛰어올랐다. 큰스님이 그토록 달리는 모습을 보자 다른 무 리도 황망히 그 뒤를 쫓았다.
철혈암 앞에 도달한 라샤린 선사는 눈앞의 광경에 신음을 토했 다. 그곳에는 형언키 어려운 무서운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의 괴수들 두억시니들이 케이건과 티 나한을 몰아붙이려 험악하게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 런 형태의 적수에게 익숙하다는 듯이 교묘한 움직임으로 포위를 계속 벗어나고 있었다. 팔이 달려 있는 위치, 숫자, 혹은 팔이나 다리가 아닌 다른 공격 수단의 존재 등 두억시니의 공격은 인간 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들과 함 께 자라왔다는 듯이 정확하고 절제된 움직임으로 두억시니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게다가 민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로 산 같은 기개마저 뿜어내고 있었다. 팔도, 어깨도, 허리도 아닌 온몸으로 뿌리는 쌍신검의 기세는 살을 뜯어내고 뼈를 부술 것 같았다. 비록 회피에 바빠서 자주 공격을 시도하진 못했지만.
반면 티나한의 모습은 공격하느라 너무 바빠서 회피에는 신경 을 별로 못쓰고 있는 것 같았다. 바위를 깰 듯한 기세로 내뻗은 철창이 팔 넷 달린 두억시니에게 붙잡히자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 세웠다. 결코 당황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 놈, 더러운 손을 어디!”
다음 순간 티나한은 두억시니를 매단 채 철창을 위로 치켜올렸 다. 투석기와 다름이 없었다. 적어도 반 톤 가까이 될 것 같은 두억시니는 끌려올라가는 기세에 그만 철창을 놓치고 가공할 기 세로 날아가버렸다. 철창을 치켜올리느라 티나한의 가슴이 비게 되자 악어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가 싶은 턱을 가진 두억시니가 달려들어 그 가슴을 물어뜯으려 했다. 티나한은 지체 없이 창을 놓고는 두억시니의 머리를 팔꿈치로 내려찍었다. 강제로 입을 다 물게 된 두억시니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티나한은 우아하게 위에서 떨어지는 철창을 붙잡으며 발로는 두억시니를 걷어찼다. 케이건과 티나한이 그럭저럭 잘 싸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라 샤린 선사는 대선사의 안위를 걱정하며 건물쪽을 바라보았다. 그 리고 선사는 다시 경악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대호와 나가 여인이 마루를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대호는 몰려온 무리를 보며 으 르릉거리며 경계했다. 나가는 대호의 움직임에 사람들이 몰려온 것을 깨닫고는 라샤린 선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샤린 선사는 크게 외쳤다.
“모두들 하던 짓들을 멈추시오!”
나가는 아무 말 없이 선사를 응시했다. 문득 나가의 손이 대호 의 머리에 얹혀졌다. 그러자 대호는 훌쩍 뛰어 무리 앞으로 다가 왔다. 승려와 유학생들은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라샤린 선사는 석 장을 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대호는 달려들지 않았다. 어깨의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채 사람들을 쏘아볼 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라샤린 선사는 대호가 자신들을 억류시킬 작정임을 깨달았다. 선사는 다시 마루 쪽을 보았고 나가가 방문을 여는 것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문을 열자마자 나가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방 안에서 화염이 솟구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