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7장 – 여신의 신랑 (15)
마루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린 사모는 땅 위를 몇 바퀴 구른 다음 한쪽 무릎을 세웠다. 방 안에서 뛰쳐나온 용은 허공에 뜬 채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사모를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륜이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륜은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사모의 모습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스화리탈은 륜의 머리 위로 날아와 부드럽게 멈췄다.
<사모?>
사모는 쉬크톨을 눈높이로 들어 올린 채 닐렀다.
<륜. 사이커를 뽑아라.>
<저 두억시니들은 도대체· 케이건! 티나한!>
케이건은 스무 마리의 고양이를 상대로 움직이는 쥐처럼 날뛰고 있었다. 다행히 숫자가 너무 많고 생김새가 주위의 동료들에게도 피해가 되는 그 고양이들은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쩔쩔매고 있었고 그 덕분에 쥐는 가끔 날카로운 앞니로 고양이의 꼬리쯤은 물어뜯을 수 있었다. 그리고 티나한은 스무 마리의 고양이를 상대로 싸우는 덩치 큰 맹견과 같은 형국이었다. 두 사람은 잘 싸우고 있었지만, 그러나 고양이는 너무 많았다.
륜은 사이커를 뽑아든 채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사모가 바람처럼 달려와 륜의 앞을 막아섰다. 륜은 놀라 뒷걸음질 쳤고 아스화리탈은 그의 이마 앞쪽으로 날아들며 꼬리를 진동시켰다. 사모는 용의 모습에 비늘을 부딪쳤다. 그러자 마루나래 또한 고개를 돌렸다. 마루나래는 승려들을 향해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포효를 내뿜은 다음 휙 몸을 날렸다. 그러자 륜과 사모 사이를 가로막은 존재는 둘로 늘어났다. 신화적인 장벽들에 가로막힌 채 사모는 차분하게 닐렀다.
<그 용을 치워. 륜.>
<이용은 정신 억압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볼까.>
륜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모는 아스화리탈을 향해 정신 억압을 시도했다.
다음 순간 사모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모는 우수한 정신 억압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스화리탈의 정신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려 한 순간 사모는 자신이 손바닥으로 홍수를 막으려 드는 것과 같은 시도를 하고 있음을 당장 깨달았다. 사모가 비틀거리자 마루나래는 성난 기세로 아스화리탈을 향해 들리지 않는 포효를 내뿜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려 하던 승려들과 격렬하게 싸우던 두억시니들 중 몇몇도 흠칫하며 대호를 쳐다보았지만 아스화리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모는 겨우 균형과 위엄을 되찾으며 닐렀다.
<역시 안 되는군.〉
<저 두억시니들이 누님 말을 따른다면, 저들에게 물러나라고 말해 주십시오. 누님!〉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륜.〉
<누님!>
륜의 니름에 대답하는 대신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마루나래는 일순 몸을 낮추었다. 다음 순간 마루나래는 아스화리탈을 향해 도약했다. 륜은 기겁하며 얼굴을 가렸다. 아스화리탈이 그의 이마 앞쪽에 떠 있었기에 마루나래는 그의 머리를 향해 뛰어오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스화리탈은 하늘로 몸을 피했고 그러자 마루나래는 륜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어 그 등 뒤에 내려앉았다.
륜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쉬크톨이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륜은 간발의 차이로 쉬크톨을 튕겨내었다. 아스화리탈은 륜을 구하기 위해 날아들었지만 마루나래가 다시 뛰어오르며 용을 저지했다. 다시 몸을 피한 용은 사태가 꽤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륜과 사모가 이미 얽혀 싸우고 있었기에 화염을 뿜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륜과 사모 사이에 조금이라도 거리가 생기면 여지없이 대호가 뛰어올랐다.
라샤린 선사가 격분하여 달려왔다. 몸으로라도 싸움을 말릴 기세였다. 하지만 마루나래는 싸움판에 끼어드는 자는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마루나래가 선사의 두개골을 박살 내기 전,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뛰어든 승려들이 가까스로 선사의 팔다리를 끌어당겼다. 승려들에게 의해 끌려나가면서도 선사는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만두시오! 그만두라고!”
마루나래는 아스화리탈을 견제하기 위해 사모와 륜에게서 정도 이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라샤린 선사와 승려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인 듯했다. 유학생들이 승려들의 주위를 둘러쌌지만 그들은 그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선사는 그들의 가운데 붙잡힌 채 싸움을 그만두라고 고래고래 고함 질렀다. 오레놀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티나한은 수상한 소리를 듣자마자 힘껏 달려왔지만 걸음이 느린 오레놀은 그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오레놀은 승려들과 유학생들의 옆을 지나쳐 걸어가서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만두십시오, 암살자! 륜을 죽이면 안 됩니다! 륜을 죽이면…….”
“그걸 알아!”
케이건의 외침에 오레놀이 시선을 돌렸다. 두억시니의, 정확히 어떤 부위라고 딱히 지칭하기 힘든 부위를 피해 땅 위를 구르며 케이건은 타오르는 눈길로 사모를 쏘아보았다.
“다 말했어! 그리고 그 때문에 륜을 죽이려 하고 있는 거다!”
오레놀은 기겁하여 사모에게 외쳤다.
“아, 안 돼요! 세상이 더워진다는 것은 가설일 뿐입니다!”
몰려든 사람들은 오레놀의 기괴한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레놀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제발 그만두세요! 륜을 죽여서 그들을 도울 생각입니까? 그게 나가에게 이득이 될 거라고 믿는 겁니까? 하지만 그건 가설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요!”
두억시니들과 싸우던 티나한의 벼슬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두억시니의 이마를 호되게 쪼아준 다음 티나한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네년이 우리 레콘을 멸망시키는 짓거리를 도―우 —려—고―!”
티나한의 앞쪽에 있던 두억시니 세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티나한은 그들을 짓밟으며 뛰어올랐다. 그러나 철창을 휘둘러 사모의 머리를 깨버리려는 그 무서운 일격은 공중에서 저지당했다. 무서운 힘으로 밀쳐진 철창을 따라 티나한의 몸이 한 바퀴 돌았다. 티나한은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은 채 공격이 다가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티나한은 벼슬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너, 쌍대가리. 내 창을 쳐? 앞으로 베개 하나만 쓰게 해주마!”
티나한은 꽤 집중력이 높은 성격이었다. 사모에 대한 분노를 잠시 잊은 채 티나한은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매섭게 날아드는 쉬크톨을 가까스로 피하며, 그리고 간혹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대호에 움찔하며 륜은 닐렀다. 격렬한 움직임 중에도 호흡에 무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나가의 특권이었다. 물론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누님! 안 됩니다. 나가는 이미 세상의 반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나머지 반은 가지지 못했지.〉
〈그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저를 죽이려는 겁니까?>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륜. 너를 죽이면 나가가 세상의 나머지 반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뜻밖의 소득이고.>
륜은 이 니름을 믿을 수 없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자신만만하게 휘두르며 닐렀다.
〈네가 죽으면 이 자들은 수호자들의 살신을 저지할 수 없겠지. 그러면 기온이 올라가고, 끝내 차지하지 못했던 세계의 반이 나가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지. 바람직한 일이야.〉
<사모!>
〈이 북쪽 땅에서 내가 발견한 덕목은 하나도 없어. 여기엔 광기와 증오와 살육밖에 없어. 너는 이런 땅을 정말 좋아하나? 이런 땅에서 살기를 원하나? 내 눈엔 이미 네 몸이 식어가는 것이 보이는군.>
사모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더운 방 안에서 데워졌던 륜의 몸은 방 밖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점점 식어갔다. 케이건 또한 그 사실을 짐작했기에 두억시니의 공격을 막아내며 힘겹게 외쳤다.
“아스화리탈!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륜 근처에 대고 불을 뿜어!”
그러나 아스화리탈은 케이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스화리탈은 어떻게든 사모를 향해 불을 뿜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루나래는 그런 아스화리탈을 철저히 견제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몸을 빼낼 기회를 만들어 보려 애썼지만 그 자신의 몸이 절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오레놀 대덕이 외쳤다.
“두억시니들을 물리칩시다!”
오레놀은 옆의 승려가 쥐고 있던 부젓가락을 뺏어 들었다. 형편없는 무기지만, 어차피 천하 없는 명검이 주어진다 해도 소용없기는 마찬가지기에 오레놀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레놀은 라샤린 선사를 향해 외쳤다.
“주지 스님!”
“그렇다! 모두 저 분들을 구출하라!”
승려들이 함성을 지르며 두억시니를 향해 달려들었다면 참으로 가슴 벅찬 장면이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주저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라샤린 선사는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석장을 높이 들고 달려갔다. 그러곤 다른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두억시니의 어깨를 호되게 때렸다.
“이 놈! 감히 사원에서 이런 행패더냐!”
두억시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선사를 바라보다가 성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오레놀이 재치 있게 두억시니의 다리를 걸었고 덕분에 두억시니는 땅에 호되게 얼굴을 부딪히며 쓰러졌다. 오레놀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 두억시니의 등을 부젓가락으로 때렸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두억시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공격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특히 유학생들은 사원에서 지내느라 어쩔 수 없이 그들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했던 폭력성이 다시 눈뜨는 것을 느꼈다. 이 위대한 대가람에서 학문과 정신을 수양하기를 바랐던 그들의 부모나 후견인들이 보았다면 개탄을 금할 수 없었겠지만 유학생들은 용맹하게 두억시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덕분에 케이건은 가까스로 몸을 빼낼 기회를 얻었다. 그는 주저 없이 티나한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고 그러자 그의 앞이 탁 트였다. 케이건은 사모를 향해 쇄도했다. 륜과 사모의 격투를 수호하고 있던 마루나래는 호승심 가득한 포효를 내지르며 케이건을 응시했다. 그러나 마루나래는 깜짝 놀랄 만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케이건은 달려들며 왼손으로 바라기의 검신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쥔 바라기를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마루나래가 케이건의 의도를 깨달은 순간, 케이건은 대호를 향해 있는 힘껏 바라기를 집어던졌다.
“으르릉!”
마루나래는 낮게 날아오는 바라기를 고개를 조금 틀며 확 물었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공격이라 생각하며 마루나래는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케이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마루나래가 고개를 돌릴 때 갑자기 무엇인가가 그의 머리통을 꽝 소리 나도록 짓밟았다. 마루나래가 머리를 짓밟힌 것에 대해 격분했을 때 두 번째 충격이 등을 강타했다.
“맙소사!”
오레놀은 케이건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던지자마자 높이 뛰어올라 대호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것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바라기를 낮게 던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케이건은 대호의 등 위를 달렸다. 대호의 엉덩이에서 마지막으로 높이 뛰어오른 케이건은 온몸으로 사모에게 떨어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모는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케이건은 사모의 옆을 지나쳐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관성을 제어하지 못한 케이건은 그대로 몇 바퀴를 굴러간 다음 간신히 한쪽 무릎을 세우며 멈춰 섰다. 그리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케이건의 오른손에는 흑사자 모피가 출렁이고 있었다. 사모는 엄습하는 냉기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대호는 격분하여 바라기를 내뱉었다. “우루루룽!” 대호는 그대로 케이건에게 달려들었다. 케이건은 흑사자 모피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쫙 벌렸다. “덤벼!” 케이건의 팔이 부풀어 소매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마루나래와 충돌하려는 순간 케이건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케이건은 대호의 머리에 매달리게 되었다. 발로 마루나래의 아랫턱을 밟으며 케이건은 흑사자 모피로 대호의 눈을 가렸다.
케이건과 마루나래는 거창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혔다. 벽이 진동하고 서까래가 춤을 췄다. 티나한마저 굉음에 놀라 잠깐 돌아보았다. 마루나래와 벽 사이에 끼이게 된 케이건은 충격 때문에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마루나래 또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벽에 부딪혔기에 정신이 없었다. 대호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케이건은 안간힘을 다해 마루나래의 이빨이 닿지 않는 곳, 그러니까 그 윗턱에 몸을 얹었다. 하지만 마루나래는 보다 왜소한 사촌과 마찬가지로 그 이빨보다 앞발이 더 끔찍한 무기다. 마루나래는 자신의 코 위에 올라타 눈을 가리고 있는 괘씸한 인간의 등을 엄지발톱으로 사정없이 할퀴었다.
케이건의 등이 찢어지며 선혈이 튀어 올랐다. 비명을 지를 법도 하건만 대신 케이건은 괴성을 지르며 마루나래의 귀를 물어뜯었다. 이번엔 마루나래가 기겁할 차례였다.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마루나래 또한 귀를 건드리는 것을 싫어한다. 하물며 사정없이 물렸으니 마루나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마루나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케이건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악착같이 매달린 채 마루나래의 눈을 가렸다. 마루나래가 다시 앞발로 케이건을 후려치려 했을 때였다.
마루나래는 꼬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루나래가 허공으로 펄쩍 뛰어오른 것은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마루나래의 꼬리가 있던 곳에 쏟아지던 차가운 기체는 곧 맹렬하게 점화되며 불꽃의 노도로 바뀌었다. 아스화리탈이 마침내 대호를 향해 불을 뿜어낸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채로 뛰어오른 마루나래는 자신이 어디에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두 다리로 마루나래의 턱을 꽉 끌어안았다. 그들은 한 덩이가 된 채 볼품없이 지붕에 떨어졌다. 기왓장과 서까래가 사정없이 튕겨져 올랐다.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났고 그것은 아스화리탈이 지른 불에 쏟아져 휘말려 매캐한 연기를 발생시켰다.
륜은 불을 등진 채 사모를 바라보았다.
입장이 바뀌어 있었다. 등 뒤에 불을 두고 있었기에 륜은 몸이 다시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흑사자 모피를 잃은 사모는 그 몸이 식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모는 그 사실에 크게 당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모는 박살 난 건물을 보며 감탄했다.
<저 인간은 정말 지독하군.>
<정말 그런 이유로 저를 죽일 생각이십니까?>
<뭐라고 닐렀지?>
<나가에게 세계의 반을 주기 위해……………, 저를 죽일 겁니까?>
<그렇다면 다른 죽음의 방식을 준비해 두었느냐?>
<뭐라고요?>
<한계선 이남으로 다시는 내려올 수 없는 너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냐? 지금처럼 네 용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불태우게 하며 살아갈 생각이냐?>
<저는 그런 생각・・・・・・・ >
<그렇잖으면 나무를 태워 만든 온기 속의 수인(人)으로 평생을 보낼 생각이냐?>
륜은 무릎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모는 준엄하게 닐렀다.
<죽을 때까지 네 체취로 얼룩진 더러운 공기로 가득 찬 방 안에 갇힌 채 살아갈 테냐?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키보렌의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그래도 허물을 벗으면서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고 자위하며 살 테냐? 어디에도 갈 수 없고 네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누구와도 니름을 나눌 수 없다. 나가가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뺏는 대가로 네가 받아야 할 것은 그런 삶이다. 그렇잖다면 저 승려들이 너에게 나가를 배신할 것을 요구하며 뭔가를 약속했느냐?>
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거의 열려 있다시피 했고 사모는 륜이 아무것도 약속받지 못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륜은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 속에서 닐렀다.
<저는 나가를 배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죽인다 해서 세상이 더워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너는 저 승려들을 믿는 거냐? 수호자들이 아니라?>
수호자라는 말에 륜은 혼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탑과 요스비, 그리고 화리트의 모습이 차례로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륜은 사이커를 내두르며 닐렀다.
<수호자들은 제 아버님을 죽였어요!>
<나는 그 니름을 믿을 수 없지만, 혹 그랬다고 치자. 그들이 왜 그랬겠느냐?>
<네?>
<이유! 너는 이유를 말한 적이 없어. 수호자들이 여흥거리 삼아 요스비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왜 죽였을까?>
륜은 넋이 나간 얼굴로 사모를 응시했다. 그는 한 번도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요스비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그를 엄습한 것은 공포였고 동시에 공포뿐이었다. 사모는 냉정하게 닐렀다.
<너는 도대체 요스비에 대해 무엇을 알지? 응? 그가 죽임당해야 할 만큼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면 왜 수호자들이 그를 죽였겠나? 그들 수호자들은 나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여신이라도 죽일 작정이야. 그런 자들이 다른 자도 아닌 나가를 죽였다면,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참혹한 진실은 륜의 사지를 얼어붙게 했다. 륜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사모는 다시 다그쳤다.
〈너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네 자신의 적출 공포증 때문에 너는 수호자들을 증오하는 것을 선택한 거다. 수호자를 증오한다면 그들에게 죽임당한 요스비는 선량한 자가 되어야 하지. 그래서 너는 네 속의 모순을 무시하며 요스비가 죽은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요스비는 더 이상 선량한 자로 남을 수 없게 되니까.>
<아니에요! 저는 적출 공포증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왜 적출식에서 도망쳤지?>
륜은 요스비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니르고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니를 수가 없었다. 혼란은 다시 그의 의식에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륜은 어떤 니름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너는 여신의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더 많은 것을 주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단 말이냐?>
<사랑하는 신부에게…………….>
〈그래. 그들의 하나뿐인 신부에게.〉
<하나뿐인…….>
아스화리탈은 륜의 머리 위를 날며 륜이 사모에게서 떨어지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를 낼 수 있는 입이 있었다면 울부짖음이라도 토했겠지만 아스화리탈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닐렀다.
<륜. 너는 수호자들을 악인으로 만든 다음 그들을 배신하고 그 대가로 죽음 같은 삶을 살 필요는 없어. 그것은 너 스스로에게 짓는 죄이며 수호자들에게 짓는 죄이며 여신에게 짓는 죄야. 그런 죄인의 고통스러운 삶 따위를 바라서는 안 돼.〉
륜은 멍하니 쉬크톨의 칼날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 사모는 단번에 륜의 목을 벨 작정인 듯했다. 쉬크톨이 예리한 까닭은 그것이다. 그리고 륜은 그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비형이 떠나자마자 그가 겪어야 했던 하루는 륜을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했다. 지금 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그것은 거의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왜 그런 하루를 수만 개로 확장시켜야 하는가? 그것도 수호자와 여신을 배신해 가며?”
륜은 그런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쇼자인테쉬크톨을 받아들인다면 가문에 부과된 핏값은 청산되고, 의무를 다한 사모는 하텐그라쥬로 돌아가고, 그리고 나가들은 아마도 세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합당한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치욕밖에 담보되지 않은 긴 생애 대신 나의 여신 라르간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여신을………….’
<안 돼!>
륜은 사이커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쉬크톨은 이미 가장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떨어질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륜은 정신없이 닐렀다.
<안 돼요! 나의 여신을 모든 이의 원수로 만들 수는 없어요! 모든 이들이 증오를 담아 나의 여신을 저주하게 할 수는 없어요!>
륜은 니름과 육성으로 외치며 사이커를 내뻗었다.
“그렇게 할 수 없어!>”
무너진 건물 더미가 움직였다. 박살 난 문짝과 무너진 벽, 그리고 파괴된 가구들 사이에서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마루나래는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대호의 몸은 흙먼지와 피로 뒤덮여 있었다. 눈을 가린 채 추락한 여파다. 하지만 찢어진 왼쪽 귀만은 추락 때문이 아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얼굴을 적신 채 마루나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케이건은 땅에 쓰러진 채 마루나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그 눈은 부릅뜬 채 마루나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 밉살스럽고 지독한 인간을 내려다보며 마루나래는 약간의 경의를 느낀 이유는 그 눈 때문이었다. 거기엔 공포가 없었다.
문득 마루나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얼어붙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케이건 또한 마당 한가운데의 광경을 보고는 거친 호흡을 잠시 중단했다.
륜과 사모는 서로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사모의 두 손은 쉬크톨을 쥔 채 위로 꼿꼿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륜의 손은 앞으로 내뻗어져 있었다.
그 손에 쥐어진 사이커는 사모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마당 반대편에 있던 두억시니들도 싸움을 멈춘 채 사모와 륜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공격을 멈춰버린 두억시니에 당황하던 티나한은 그제야 그 광경을 보았고, 깜짝 놀라 몸을 부풀렸다. 다른 사람들 또한 이 기괴한 침묵에 질린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침묵은 대호의 포효에 의해 깨졌다.
“카아앗!”
마루나래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 굳어 있던 사모의 얼굴이 마루나래 쪽을 향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마루나래의 꼬리에 매달려 보기라도 할 작정이었던 케이건은 마루나래가 갑자기 멈춰서자 당황했다. 마루나래는 앞발을 하나 든 채, 금방이라도 걸어갈 듯한 모습으로 멈춰 서서 사모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마루나래의 앞발이 다시 땅을 디뎠다.
케이건은 사모가 마루나래를 진정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잔해를 무너뜨리며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대호는 케이건을 돌아보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 한가운데 앉아, 케이건은 말없이 사모와 륜을 바라보았다.
사모의 손에서 쉬크톨이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륜은 그것을 보기는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륜은 망아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소스라치며 제정신을 차린 륜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온몸에서 비늘이 곤두섰다.
륜은 사이커에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쉬크톨을 놓은 사모의 손이 륜의 손등을 덮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손이었지만 륜은 그것을 뿌리칠 수 없었다. 륜은 사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모……!>
“륜 페이.”
사모의 입을 본 륜은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사모는 륜의 손에 매달리듯, 혹은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사이커에 의지하듯 선 채 말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소리를 듣기에 육성으로 말한다.”
사모의 배에서 흘러나온 피가 사이커의 칼날을 서서히 물들여 갔다. 심장이 없었기에 그 피는 눈물처럼 고요히 흘러나왔다. 사모는 호흡을 안정시키려 애쓰며 힘겹게 말했다.
“쇼자인테쉬크톨은 완료되었다.”
“안 돼요, 안 돼요. 누님! 이 손 놓으세요. 치료를, 치료를 받으면, 아니, 그냥 쉬시면서…………….”
사모의 손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다. 륜은 그 손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 손이 자신의 입을 덮을 때도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사모는 륜의 입을 살짝 두드렸고 그러자 륜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모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 륜.”
고맙다니, 뭐가? 륜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기만을 계속해서 소망했다.
사모의 입에서 서서히 피거품이 배어 나왔다. 륜의 입을 두드렸던 손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을 닦은 다음 사모는 다시 말했다.
“저들의 말을 따라라. 륜. 살신을 막아. 레콘을 구해. 저 두억시니들처럼 불행한 자들이 또 생기는 것을 좌시하지 마. 네 여신을, 너의 신부를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게 놔두지 마. 륜. 지금 뻗은 이 사이커처럼, 언제나 요스비의 이 사이커처럼 단호하게…….”
가쁜 호흡에 사모는 다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눈에서 은빛 섬광이 번득였다. 사모는 은루를 흘리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마치고, 키보렌으로 돌아가.”
륜은 충격을 받았다.
“키보렌으로?”
“그래. 내 목을 가지고.”
륜은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가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려 할 때 사모의 손이 그의 뺨을 스쳤다. 륜은 다시 굳어버렸다. 사모는 륜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들의 부탁을 들어준다 해도 네겐 살아 있는 죽음과도 같은 삶밖에 남지 않을 거야. 저들의 배은망덕함을 탓할 필요는 없겠지. 그들은 네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줄 능력이 없는 거야. 감사의 말은………… 들을 수 있겠지…………. 하지만, 륜. 내 목을 가지고 돌아가면, 너는 키보렌으로, 그 아름다운 우리의 숲으로…………… 돌아갈 수 있어.”
“어떻게?”
“쇼자인테쉬크톨에서는 반드시 한 명이………… 죽어야 해. 거꾸로 말하면, 한 명은…… 반드시 살아야 하지.”
케이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던 티나한은 부리를 멍하니 벌렸다. 한 명은 침착하게, 한 명은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사모가 왜 암살자 지명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나가의 손에, 혹은 북부의 혹한에 죽어갈 륜에게 자신의 생명을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그럼으로써 륜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사모는 그 때문에 쉬크톨을 받아들였고 한계선을 넘어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추격해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쇼자인테쉬크톨의 요건을 만족시키는 죽음을 이끌어 낸 것이다.
“내 머리가 있는 한 너를 죽일 자는……… 없을 거야. 우리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려. 내년, 아니…. …… 그 다음 해라도 적출을 받아.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어. 륜.”
“저는, 저는 그럴 수, 그럴 수가…….”
“추위와 상처 때문에……………, 나는 곧 죽은 것처럼 변할 거야. 그때 쉬크톨로 내 목을 베거라. 이제………… 작별이구나.”
륜의 뺨을 쓰다듬던 사모의 손이 내려갔다. 륜은 사모가 정신을 잃은 줄 알고 경악했지만 사모의 손은 사이커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사모!”
사모는 땅에 쓰러졌다. 륜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사모의 눈에 케이건이 들어왔다. 사모는 케이건을 향해 말했다.
“케이건. 고마워. 내 동생을 여기까지……… 보살펴준 것. 그리고 내 모피를 뺏어간 것. 안 찢어졌으면 좋겠군. 그 모피는 륜에게……… 줘. 하지만, 하지만 나는………… 하늘치를 불러내려 두억시니를 짓밟은 네 처사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케이건은 끔찍한 고통을 무시하며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그때까지도 흑사자 모피가 쥐어져 있었다. 사모는 그것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모는 다시 륜을 올려다보았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기절할 때가 되었나 봐.”
“사모!”
“안녕…… 내 동생.”
사모는 눈을 감았다.
륜은 다시 사모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로, 그리고 니름으로. 하지만 륜의 계속된 외침에도 사모는 눈을 뜨지 않았다. 륜은 오열하며 사모의 몸 위에 엎드렸다.
마루나래가 비통하게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