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7장 – 여신의 신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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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7장 – 여신의 신랑 (9)


비형은 결국 졸도하다시피 한 모습으로 잠들었다. 빈 동이가 다섯이었고 최소한 비형이 네 동이는 해치운 듯했다. 오레놀은 뒤치닥거리를 했고 륜은 비형의 잠자리를 보살폈다. 하지만 티나한은 불만에 찬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티나한은 자신이 만족할 만큼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늘치를 격노하게 한다? 그래서 땅 아래로 내려오게 한다’

티나한은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숙원에 대한 놀라운 해법이기도 했다. 올라가려 애쓰는 대신 하늘치를 내려오게 한다는 상식을 뒤집는 방법. 하지만 비형의 증언대로라면 내려오게 할 수는 있어도 근처에 접근할 수는 없는 듯했다.

“분노하게 하면 내려오게 할 수 있지만, 분노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이군. 거참 지랄 같군.”

티나한은 격노한 하늘치가 어느 정도의 폭력을 구사하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목격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비형은 중요한 시간 동안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대취하여 잠들어 있었다. 티나한은 그 계획을 생각해 내고 몸소 실현시킨 케이건에게 질문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케이건이 들어간 방에 대고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던 티나한은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본 티나한은 방 안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 시각 케이건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별빛이 묽었다. 낮에 파름 평원에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이제야 파름 산에 도달한 듯했다. 얼룩덜룩하게 번진 별빛들의 말없는 주시를 받으며 케이건은 산을 올랐다. 잠시 걸음을 멈춘 케이건은 고개를 들어 목표했던 바위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가까웠다. 케이건은 거의 호흡을 하지 않은 채 바위 위까지 달려 올라갔다. 허공을 향해 내뻗어진 바위 위에 올라선 케이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깊은 잠에 취한 파름 평원이 밤의 뿌리를 향해 넘실대고 있었다.

한참을 주의 깊게 살핀 후에야 케이건은 하늘치를 발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에서 별빛이 사라지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지평선 끄트머리에 걸쳐 있었다. 이미 먼 거리까지 날아간 듯했다.

하늘치를 바라보던 케이건은 잠시 후 몸을 돌렸다.

바위 뒤에는 조그마한 석굴이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석굴이었지만 안은 캄캄했다. 케이건은 석굴 입구에 정좌했다. 그리고 어둠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부싯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롱불 빛이 어둠을 걷어내자 쥬타기 대선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선사는 바람이 닿지 않도록 호롱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불빛이 충분히 살아나자 대선사는 그것을 바람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굴 밖에 있는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여기 있겠다.”

“천지가 울리더군요.”

“하늘치를 불러내렸다.”

“하늘치를 어떻게?”

“딱정벌레에 탄 다음 화살을 쐈다. 눈이 몇 개 깨졌지. 화를 내면서 쫓아오더군. 그대로 두억시니에게 보냈다.”

대선사는 신음했다.

“제 죄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군요. 그 하늘치가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아셨기에 할 수 있다고 하셨던 것이군요.”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에서부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를 지나오셨으면, 케이를 만나보셨습니까?”

“케이?”

“당신의 아들 말입니다. 도대체 몇 번째 아들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게 충격을 줄 작정이라면, 관둬라. 쥬타기. 그 애는 내 아들이지만 동시에 내 내손(孫)일 수도 있다.”

“네?”

“그 어머니 보늬가 내 현손녀(女)일 가능성이 꽤 높으니까.”

충격을 주려다가 거꾸로 충격을 받은 쥬타기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건이 담담하게 말했다.

“산사에서 수도하는 승려에겐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던가.”

“보늬 당주도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 혹 의심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처럼.”

“자신의 자손일지도 모르는 여인을 어떻게 안을 수 있었습니까?”

“변명을 해야 하나?”

“해주십시오.”

“쥬타기. 나는 200년쯤 전에 한 여인을 만나 사랑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건 아흐레 동안의 만남이었다. 열흘째 우리는 헤어졌고 그 이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 그리고 120년쯤 지났을 때, 시구리아트 산맥에서 나는 또 다른 여인을 만났다. 200년 전에 만났던 여인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가 내 현손녀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유 때문에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쥬타기 대선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변명을 더 해야 하나?”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쥬타기 대선사는 생각했다. 거대한 시간의 단위에서 본다면 지상의 모든 인간 중에 혈육이 아닌 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케이건은 바로 그런 거대한 시간의 단위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서로 사용하는 잣대의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 어느 한쪽의 잣대를 다른 쪽에 가져다 대는 것은 무의미하다.

케이건은 말했다.

“조금 전 눈을 떴을 때 나는 사원을 떠나려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네가 내게 요구할 것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 내 느낌이 맞나?”

“그렇습니다.”

“살신을 저지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륜 페이를 통해 살신의 수단을 알아내면 그것을 저지해야 합니다.”

“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을 상대하던 세신 중 하나가 사라지면 세상이 더욱 더워질 거라고 말했지. 그건 확실한 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케이건은 매서운 눈으로 석굴 안쪽을 쏘아보았다. 대선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케이건. 저는 어떤 양심적인 수호자가 이 일의 전모를 알려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그 양심적인 수호자가 상당한 고뇌를 느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군. 레콘이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나가가 온세상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수호자는 아무런 고뇌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확실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수호자는 동료 수호자들이 뭘 제대로 알고 행동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케이건은 생각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오히려 세상이 추워질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수호자는 두억시니가 신을 잃고 그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호자는 두억시니에 세상을 대입해 보았습니다.”

케이건은 짧게 신음했다.

“한 분의 신을 잃으면 이 세상이 두억시니 꼴이 된다는 말이군.”

“두억시니에게는 아무런 법칙이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다른 수호자들은 무조건 세상이 더워질 거라 확신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 수호자는 황급히 대사원의 승려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군. 위험한 장난을 치며 날뛰는 동료 수호자들을 저지해 달라고.”

“그리고 우리는 돕기로 결정했지요.”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등불의 빛이 그의 눈을 약간 피로하게 했다. 현재가 아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에 케이건은 눈을 감았다.

“쥬타기.”

“예.”

“나는 숲에서 사지가 잘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나가를 만나면, 그 나가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신 그 나가가 배가 고파서 자기 팔다리를 잘라 먹고는 포만감에 잠들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테지. 맹세코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까.”

대선사는 웃지 않았다. 그것은 우스운 말이 아니었다. 케이건은 나직이 말했다.

“나는 나가를 믿지 않아. 그것들이 약한 척, 아픈 척, 죽은 척 한다고 해서 칼을 칼집에 꽂아넣는 것은 미련한 짓이야. 나는 그런 속임수에 너무 많이 당했어.”

“하나도 믿지 않으십니까?”

“내가 삶아먹은 나가는 믿는다. 그 외에는, 설령 목이 잘린 나가라도 믿지 않아. 실제로 목을 재생시켜서 돌아온 것을 목격했으니까.”

대선사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슬픔에 찬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예전에 한 명의 나가를 신뢰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어떤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과 15년 전이었습니다. 그를 신뢰했기에…………….’

“그만해.”

“당신은 마침내 나가에 대한 증오를 잊고…….”

“그만하라고 말했어.”

대선사는 말을 멈췄다. 석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케이건은 호랑이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선사는 그 얼굴이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케이건이 입을 열었다.

“이 사원에서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불러낼 수 있는 건가?”

“당신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철혈암에 필요한 조처를 취해 두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륜 페이의 누나라는 그 암살자를 회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먼저 연락을 보낼 수도 있겠지요.”

케이건은 바위에서 일어났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기 때문이다. 대선사는 사라지는 케이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등불에 얼굴을 가져가 입김을 불었다. 등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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