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1)
빗나갔어! 다시 찔러! 내 심장은 여기 있다. 볼 수 없나! 이렇게 불타고 있는데!
-어느 아라짓 전사의 외침.
북부의 왕
냉혹의 도시에 냉혹한 햇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피부에 떨어지는 햇빛에 감미로워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날씨가 맑은 것은 수호자들이 비를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아스는 그들이 주는 것에는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치민 분노 때문에 몸 곳곳에서 비늘이 일어났지만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평온했다. 심장탑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다. 자신을 억제하려 애쓰며 비아스는 심장탑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비아스는 남자들의 표정에 만족했다.
비아스가 100미터 저편에 있을 때부터 죽 관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들 모두는 그제서야 비아스를 발견한 듯한 시늉을 해 보였다. 속아 넘어가는 것이 모욕이라 생각될 만큼 엉성한 모습이었고, 그래서 비아스는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이 남자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휘자인 듯한 남자는 자신의 악운이 단순한 전조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현실이 되었음에 슬퍼하며 겨우 닐렀다.
<좋은 날씨죠?>
비아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지휘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좀 더 경비자다운 니름을 꺼내었다.
<볼일이 있으시오?>
<나는 비아스 마케로우다.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 두세나 마케로우 님을 뵈러 왔다. 분명 면회가 허락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휘자는 변명하고 싶었다. 면회는 허락되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는 않았으며, 그래서 자신 또한 여자에게 고압적으로 말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을 아직 겪지 못했다고. 정정. 이제 처음 겪는 거라고. 지휘자는 간신히 자신이 들었던 지시를 떠올릴 수 있었고, 비아스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건 뭡니까?>
비아스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는 그 덮개를 벗겼다. 철망으로 된 상자가 드러나며 그 속에서 영리하게 생긴 수달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위문품이지.>
위엄 있는 경비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들은 모두 우리 옆으로 몰려와서는 순박하게 감탄했다. 부하들과 함께 수달을 손짓하며 수다를 떨던 지휘자는 문득 비아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비아스가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깨닫고는 부끄러움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지휘자는 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 놈들, 제자리로 돌아가!>
부하들이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간 다음 지휘자는 비아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나가들에겐 그 이상의 조사가 불필요하다. 품에 숨길 수 있는 단검 같은 것은 나가들에겐 별로 유용한 무기가 아니다. 그래서 지휘자는 비아스에게 대형 병기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 중 하나에게 손짓했다.
<너, 어, 그러니까.>
<맥포리.>
<아, 그래. 맥포리. 비아스 마케로우를 안으로 안내해라. 간수장에게 안내하고 돌아오면 된다.>
맥포리는 비아스를 안내하여 심장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심장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비아스는 맥포리에게 말했다.
<수호자 갈로텍은 어디에 있지?>
<예?>
<수호자 갈로텍에게 안내해.>
<당신은 가주를 만나러 왔다고…………….〉
<수호자를 만나고 난 다음에 만나겠어.>
맥포리는 별 생각 없이 비아스를 갈로텍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 때문에 맥포리는 갈로텍에게 무시무시한 꾸지람을 듣고서 목을 움츠린 채 물러나야 했다. 모른 체하며 벽장을 바라보던 비아스는 갈로텍이 다가왔을 때에야 닐렀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그 자를 너무 탓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그 자는 남자가 여자의 면담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할 겁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겠지요. 이제는 아닙니다.〉
<혁명가들은 사회적 관성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지요.>
갈로텍은 ‘당신이 혁명가에 대해 뭘 아느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 자신도 자신이 혁명가라는 것 이외엔 혁명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며, 갈로텍은 비아스가 바로 그것을 지적해서 그에게 망신을 줄 작정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사회적 관성에 의해 당신 멋대로 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저는 그것을 거절하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저를 만나고 싶다면 사전에 허가를 요청하도록 하십시오.>
허가라는 말에 비아스는 발끈했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앞으로 영원히.>
<니름도 안 되는……………, 남자들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 밖의 경비자들은 제가 다가오는 것을 겁내고 있더군요. 걸어오는 저를 멈춰 세우고 용건을 묻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100미터 밖에서부터 비늘을 곤두세운 채 제가 다가오는 걸 훔쳐보더군요. 똑바로 볼 용기도 없었던 거죠.〉
갈로텍은 비아스의 니름을 믿었다. 그래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아스는 득의양양하게 닐렀다.
<앞으로 영원히? 어림없는 니름입니다. 지금 당장 밖으로 달려나가서 당신이 경비자랍시고 세워 놓은 것들에게 한 번 당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볼까요? 그 자들이 누구의 명령을 따를지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까?>
갈로텍은 비아스가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불안을 표시하는 대신, 수호자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해 보시지요.>
<네?>
갈로텍은 의자에 앉았다. 두 손끝을 서로 붙인 갈로텍은 그것을 입에 붙인 채 차분하게 닐렀다.
<아직도 자신이 남자의 머리 위에 있다는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군요. 얼마든지 해 보시죠. 아니, 제발 그렇게 해 주기를 진심으로 간청하고 싶군요. 그 자들을 구슬려서 저를 공격해 보시죠. 그러면 저는 눈보라를 불러와 당신들을 얼어붙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심장병을 가져와 모두 깨뜨리겠습니다. 그 다음, 당신들의 눈앞에서 그 심장을 밟아 터뜨리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반만 죽이고 나머지 반은 살려 둘 겁니다. 그러면 살아남은 반수는 하텐그라쥬에 진실을 전할 수 있게 되겠지요. 누가 질서를 정하며 질서 위에 있고, 누가 규칙을 수호하며 규칙 위에 있는지를 바닥에 흩어진 심장들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테니, 당신이 어느 쪽 반수에 속할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용감한 여자일 테니, 비아스 마케로우. 제발 조금 전에 했던 니름대로 해 줬으면 좋겠군요.>
비아스는 생기 없는 눈으로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공포도, 분노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비아스는 차분하게 닐렀다.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쉽군요. 이제 돌아가시죠.>
<그 전에 제가 가져온 선물을 보여 드릴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비아스는 갈로텍이 뭐라 니르기도 전에 들고 왔던 우리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덮개를 치웠다. 갈로텍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겐 있지만 나가들에겐 없는 직업들 중에는 요리사 또한 당연히 포함된다. 산 것을 그대로 먹는 나가들은 요리의 맛에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가들도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맛이 좋은 음식과 희소성이 높은 음식을 귀한 음식으로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가들도 향이 좋거나 성질이 온순하다는 식으로 ‘먹는 행위를 즐겁게 하는’ 음식과 구하기 힘들기에 먹었다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음식을 귀한 음식으로 분류한다. 수달은 그중 후자에 해당한다. 수중 생활을 하는 이 작고 민첩한 짐승은 나가들에게는 대단히 까다로운 사냥감이다. 청빈한 생활을 해 온 수호자 갈로텍은 당연히 구경도 해 본 적이 없는 짐승이었다. 갈로텍은 눈을 빛냈다.
<제게 가져온 선물이라고요?>
비아스는 ‘가주님께 갖다 드리라’고 닐렀던 소메로 마케로우의 초췌한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고마운 니름이시군요. 잘 받겠습니다.>
갈로텍이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비아스는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갈로텍의 침착한 태도는 그녀를 불만스럽게 했다. 덮개를 도로 씌워 놓은 비아스는 머뭇거리는 시선으로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웃었다.
<좋습니다. 앉아서 닐러 보시죠.>
비아스는 굴욕감을 삼키며 갈로텍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갈로텍은 그 이상 그녀에게 뭔가를 베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차분히 바라보는 갈로텍의 시선에 비아스는 오기를 느꼈다.
<저도 덧셈, 뺄셈은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갈로텍. 당신이 보내 준 그 다섯 명은 마케로우 가문을 떠난 다음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카린돌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 시점에서 저는 스바치와 카루를 붙잡기 위해 그 다섯 명을 파견했다는 당신의 니름을 계속 신뢰해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없더군요. 당신이 노렸던 것은 스바치와 카루가 아니지요. 카린돌이었을 겁니다.〉
<계속해 보시지요.〉
<그리고 카린돌을 손에 넣은 직후 당신들은 기적이라고 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며 하텐그라쥬를 장악했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 두 사건 사이에 인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의심을 느끼게 되는군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하지요?>
비아스는 다시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옷 속에서 몸을 움츠렸다.
<당신의 잠재적 동맹자에게 주는 선물로써.〉
<흐음. 마케로우. 당신이 내게 큰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한 모욕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비아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제가 당신이라면 하텐그라쥬의 여자들을 달래고 그녀들에게 당신들의 뜻을 대변해 줄 ‘여자’ 동맹자를 가장 먼저 찾아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주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가주가 될 가능성도 부족한 어떤 여자보다는 대변자로서 낫다고 생각되는데요.〉
비아스는 생각했다. 멋대로 희롱해라. 하지만 이 니름엔 놀랄 거다.
<물론 가주들 중에서 당신들의 뜻에 동조해 줄 사람들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녀들은 이미 공포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고 소드락을 복용한 다음 당신들을 일거에 제거하자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갈로텍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니름은 심리적 동요로 약간 느렸다.
….. 당신에게 그런 제안이 들어왔습니까?>
<제가 순도 높은 소드락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약술사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갈로텍은 팔짱을 끼며 얼굴을 조금 숙였다.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병기의 생산과 보관을 확실히 파악해 두라는 지시를 내렸던 주퀘도 사르마크도 나가의 진정한 무기인 소드락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갈로텍은 그 때문에 주퀘도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나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그 자신이 그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당신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아스. 소드락의 생산을 통제할 방법에 대해 알려 줄 수 있습니까?>
비아스는 갈로텍이 ‘마케로우’라고 하는 대신 ‘비아스’라고 닐렀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겉으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척했다.
<제 요구가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만. 카린돌과 당신들이 획득한 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갈로텍은 두 손을 조금 펼쳐 보였다.
<만약 그것이 당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비밀이라도 듣고 싶습니까?>
<어차피 제 생명은 당신들의 손에 있잖습니까. 제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갈로텍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설명하지요.>
갈로텍의 설명이 끝나자 비아스는 혼란스러운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갈로텍은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비아스는 닐렀다.
<카린돌의 몸에 여신을 가뒀단 말이군요. 그런데 갇혀 있는 여신의 힘을 당신들이 어떻게 쓸 수 있는 겁니까?>
<갇힌 것은 여신이지 여신의 힘이 아닙니다. 그 힘은 지금도 다른 세 신의 힘과 함께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니르면 어떨까요. 마케로우 가문의 주인은 두세나 마케로우 가주입니다. 그리고 마케로우 가문은 다른 가문과 함께 하텐그라쥬를 구성하고 있지요. 하지만 두세나 가주를 감금한다고 해서 마케로우 가문이나 그 가문의 재산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무슨 니름인지 알겠군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여신의 힘은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 있고, 그 정당한 주인인 여신을 가두고 있는 당신들은 주인 없는 그 힘을 무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군요.>
<피상적으로, 그렇습니다.>
<여신의 신랑들만이 그 힘을 쓸 수 있는 겁니까?>
<신명을 가진 자들만이. 그러니 당신은 불가능합니다.>
<여자는 수호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보세요. 수호자는 여신의 신랑입니다. 여자는 안 됩니다.>
비아스는 경멸감을 담아 닐렀다.
<저는 그 신랑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신부를 가둬 두고 그 지참금을 탕진하는 것이 신랑이 하는 일이라면 꼭 남자가 아니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갈로텍은 화가 났고, 그래서 화를 냈다.
<비아스 당신에게서 그런 비난을 듣고 싶지는 않군요. 우리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 우리의 신부를 다시 풀어 드릴 겁니다.>
<다시 풀어 드린다고요? 그럼 여신께서 당신들을……………>
<벌은 우리가 받습니다.>
비아스는 잠시 정신을 닫았다가 다시 닐렀다.
<그 모든 일이란 무엇을 말하지요?>
<지상에서 모든 불신자를 말살하고 저 라호친까지 나가의 숲을 만들고 전 세계에 심장탑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비아스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미 세상의 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충분하리만큼 큽니다. 왜 위험을 무릅쓰며 나머지를 모두 차지해야 하는 겁니까?>
<여자들은…… 모두 똑같군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더 가질 필요가 없다. 전부 다 지금밖에 볼 줄 모르는군요! 저 불신자들이 언제까지 우리를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그래서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군요. 그들이 위험한 존재가 될 거라는 징조는 어디에도 없고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없다고요? 당신은 정신을 닫은 채 살아왔습니까? 나가 살육자라는 니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니름입니까?>
비아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저는 어린애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혹은 철없는 남자들이 수다의 즐거움을 즐기기 위해 만들어 낸 미신과 이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미신이라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그걸 불신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 낸 우화라고 니르실 생각입니까?>
<그건 어린애들을 겁주는 미신도, 불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우화도 아닙니다. 그건 사실을 가리키는 니름입니다. 나가 살육자는 실존합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갈로텍은 온몸의 비늘을 부딪치며 환멸스럽다는 듯이 닐렀다.
<증거요? 제 누이의 잘린 목이 증거입니다!>
비아스는 입을 조금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무슨 니름이십니까?>
<더 이상 니르고 싶지 않습니다.〉
비아스는 갈로텍의 얼굴과 정신 양쪽을 탐사했다. 수호자의 얼굴은 비늘이 거칠게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얼굴보다 더 거칠었다. 비아스는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나가 살육자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나가에 대한 불신자들의 공세의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에겐 심장 적출법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어떻게 우리를 공격하겠습니까?>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700년 전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했던 대확장 전쟁의 재개입니다. 선조들께서는 멈춰서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기온의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계속 전진했습니다. 이제 기온의 한계를 뛰어넘을 방도가 생겼는데 왜 멈춰 있어야 한단 니름입니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비아스는 갈로텍의 니름에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갈로텍이 이 음모에 참여하고 있는, 혹은 지휘하고 있는―비아스는 갈로텍의 정확한 위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갈로텍과 논쟁을 벌이거나 그의 개인적 욕망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그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것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비아스 마케로우가 돌아간 다음 갈로텍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비아스가 원하는 것을 니른 적은 없었지만 갈로텍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으로 보듯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갈로텍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그녀에게 많은 것이 돌아가는―을 원하고 있었다. 그 목적을 위해 비아스는 갈로텍이 그녀를 이용했음을 시사하는 니름을 몇 마디 거론했다. 갈로텍은 그녀를 이용하여 다섯 명의 수호자를 마케로우 가문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비아스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카린돌의 이름 또한 비아스를 통해 알아내었다. 그리고 갈로텍은 그런 이용에 대해 조금도 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비아스, 이 천치 같으니! 너를 가장 증오하는 두 사람이 곧 나라는 것을 모르고!〉
하지만 갈로텍은 비아스가 언급한 다른 니름에 대해서는 깊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아스는 ‘왜’라는 질문을 제시했다. ‘왜 세상의 나머지 반을 얻어야 하는가. 지금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갈로텍은 그것이 다른 여자들 모두의 생각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자기들이 노력해서 세상의 반을 손에 넣은 것처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그녀들이 한 일이라고는 태어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들은 단지 존재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들여서 뭔가를 얻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아스처럼 야심찬 여자마저도. 그런 것은 존재가 아니다. 주위로 흐르는 시간을 무시하며 꾸는 백일몽일 뿐. 갈로텍은 왜 이다지도 가주들을 설득하는 일이 어려운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분노 속에서 갈로텍은 최근에 터득한 기술을 사용해 보았다. 잠시 후 그로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이봐, 갈로텍. 아무래도 자네가 나를 불렀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랬어.>
<그러니까, 자네가 내 방 벽에 글씨 모양의 젖은 얼룩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군?>
<내가 만들었어.〉
그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하군. 나는 그런 걸 상상도 못 했어. 자네는 우리들보다 그 힘의 운용에 훨씬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아마도 군령자이기 때문인 것 같군.〉
갈로텍은 노닥거리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로스의 니름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군령자이기 때문에? 무슨 뜻이지?>
<자네는 원래 자네 것이 아닌 기억이나 경험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느냐고 한 니름이야.>
갈로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로스의 지적은 그럴듯했다.
〈그렇군. 확실히 나는 이질감을 느끼지 않아. 사실 자네가 니르러 줘서 떠오른 건데, 나는 어떻게 해서 자네 방의 벽을 젖게 만들었는지 모르겠군. 내 팔을 움직이거나 다리를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렇게 되었어.>
〈그런가? 그러면 그 재주를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그럴 수가 없겠군?>
<맞아.>
〈안 됐군. 스스로 터득해야 하나. 어쨌든, 왜 부른 거지?>
<지금 가주들에 대한 설득 작업이 원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스의 얼굴에 경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갈로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를 문책하려는 것이 아니야. 나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아서 결국 가주들에 대한 면회를 허락한다는 포고를 내리는 데 동의했잖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 가주들의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른다는 바람으로.>
그로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닐렀다.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
<이제는 알게 되었어.>
<응?>
<조금 전 비아스 마케로우가 찾아왔어. 그녀와 회담하던 중 다른 여자들이 왜 찾아오지 않는 건지 대충 깨닫게 되었어. 아무래도 우린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첫째, 그녀들은 이곳에 와서 남자들에게 굽실거리고 싶지 않은 거야. 비아스는 경비자들이 쩔쩔 매는 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더군. 굴욕을 각오하고 왔다가 겁먹은 상대를 발견하곤 즐거워진 거지.>
<웃기는군. 그렇다면 둘째는 뭐지?>
<우리의 허락을 받는 대신 자기들의 무력으로 우리를 물리치고 가주를 되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어. 그게 여자다운 일이라는 거지.>
그로스는 정신적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녀들이 만약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웃기는 계획을 실행하는 결단력까지 보여 줄 작정이라면, 나는 그 여자다움이라는 것이 10분도 못 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망발이 될 거라 예언할 수밖에 없겠군.>
갈로텍은 빙긋 웃었다. 그로스만큼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소드락을 잔뜩 복용하고 달려들 생각을 하고 있어.〉
<상관없어! 아무리 소드락이라도 눈보라 속에서라면 어쩔 수 없을걸. 그리고 필요하다면 심장병을 몇 개 부숴 주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방법도 있지.〉
<좋은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질 것 같군. 우리는 지금 대통합을 이루어야 해. 한계선 이남을 모두 아우르는 대통합 말이야. 지금 상황에서 우리끼리 싸우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 낭비야.〉
<그렇다면 대안은?>
<역시 가주들을 설득해야 하지. 나는 조금 전 비아스와 노닥거리다가 괜찮은 생각 하나를 떠올렸어. 그것에 대해 자네, 그리고 주퀘도와 의논하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