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13)
군웅들과 지배자들, 남보다 우월하다고 믿어지는, 혹은 믿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승려들이 ‘좀 행차해 주십시오’라는 단순한 말을 하면서 지어 보인 놀랄 만큼 긴장된 표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중대 발표가 있을 것임은 분명했고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임을 각오했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무릇 지배자는 현실주의자다. 하지만 이레 전 파름 산을 습격한 폭우는 절대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실주의자라는 것은 어쨌든 현실로 드러난 것마저 무시한 채 자신의 현실 속에 안주하기를 고집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당 앞쪽의 마당은 넓었다. 승려들은 그곳에 돗자리들을 펴 놓고 곡차 동이와 간단한 주안상까지 차려 놓았다. 군웅들은 약간 당황했지만 승려들이 좀 밝은 분위기의 발표를 원하고 있음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지배자들도 그에 호응했다. 전통적인 우호 관계나 개인적 친분, 혹은 대사원에서 머무는 동안 배포가 맞은 사람들끼리 무리 지어 돗자리 위에 앉았다. 가볍게 곡차가 몇 순배 돌았고, 사람들은 긴장을 풀었다. 사람들은 세미쿼 추장과 무핀토 추장마저도 ‘우정을 나누는 일을 삼가고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
그러나 조금 늦게 도착한 일행이 따로 비워져 있는 돗자리에 앉았을 때 그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뜻밖의,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충격적인 손님들이었다. 무핀토 추장은 다른 사람도 아닌 세미쿼 추장에게 질문했다.
“용이 맞다고 생각해? 저기, 나가에게 안겨 있는 것.”
“그런 것 같아. 이런 빌어먹을. 아무래도 오늘이 예삿날은 아닌 것 같군.”
지코마 성주 또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서 대호와 두억시니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칼을 뽑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군요. 변경백.”
“승려들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낸 이유를 알겠소.”
괄하이드 변경백의 말에 성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도깨비, 레콘, 두 명의 나가, 대호와 용과 딱정벌레, 그리고 스무 명 정도의 두억시니들은 다른 자들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돗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정신이 번쩍 든 지배자들이 긴장하고 있을 때 대사원의 주지 라샤린 선사가 법당 앞쪽에 마련된 단 위에 올랐다.
라샤린 선사는 이 시대의 존경할 만한 인사들이 대사원을 찾아 주셨으니 조촐하나마 환영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한데도 근래 사원에 우환이 많아 그 준비가 너무 늦었음을 사과했다. 사람들은 ‘우환이 많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선사는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도 뭔가 중대한 이야기를 할 것임을 분명하게 시사한 셈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기다렸다.
라샤린 선사는 심호흡을 한 다음 말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들으셨겠지만 근래 저 남쪽의 형제들에게 특기할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선사의 설명은 군웅들을 창백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라샤린 선사는 거의 모든 것을 담백하게 고백했다. 륜의 하텐그라쥬 탈출, 구출대의 파견, 살신 계획, 여신의 소환, 그리고 하텐그라쥬에서 이루어진 여신의 감금. 선사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승려들까지도 당황했다. 라샤린 선사는 이레 전에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폭우의 경위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선사의 설명이 끝났을 때 군웅들은 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흑사자 모피는 사모에게 돌려주고 비형이 만들어 준 도깨비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륜은 불안 속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아스화리탈이 꼬리를 뻗어 올려 륜의 목을 가볍게 감았다. 앉아 있는 마루나래의 등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던 사모는 동생과 용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우 성주님께 조언을 부탁드렸습니다. 비형. 앞으로 나와서 설명해 주십시오.”
비형은 다른 일행들을 향해 씩 웃고는 일어났다. 티나한은 목소리를 낮춰 다짐했다.
“부탁이니 농담은 하지 마라. 알겠냐?”
비형은 그에게 한쪽 눈을 깜빡여 주고는 단 위에 올랐다. 자리에 모인 지배자들을 죽 둘러본 비형은 쾌활하게 말을 시작했다.
“좋은 꿈들 꾸셨습니까! 저는 비형 스라블이라고 합니다.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의 몸종이며, 조금 전 존경하는 라샤린 선사께서 말씀하신 구출대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먼저 선사님께서 들려주신 우리 구출대의 활약상에 대한 보고가 거의 완전히 사실에 부합하지만, 아쉽게도 약간씩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수백 년 만에 나가 이외의 선민 종족들이 모두 모여 한계선을 넘어갔던 일이 놀라운 모험과 경이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것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티나한은 으르릉거리며 속삭였다.
“저놈이 만약 단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아서 그 모든 일을 모조리 이야기하려 든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다행히도 비형은 그 몇 달 동안의 일을 모조리 들려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할 수 있을 겁니다.”
티나한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륜과 케이건은 비형이 단지 다른 사람들을 안달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했다.
“저는 여러분들과 우리 모두에게 건네어진 바우 성주님의 조언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왔으니까요. 하인샤 대사원에서는 조금 전 여러분들이 들으셨던 바로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해 주셨습니다. 성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명상에 잠기셨습니다. 아, 진짜로 명상에 잠겼는지는 확언드릴 수 없습니다. 그 방에는 어르신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아직 어르신이 못 되었거든요. 옛날, 어르신이 아니면서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던 어떤 도깨비가 있었는데………….”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륜과 사모, 케이건은 티나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티나한은 깃털을 곤두세운 채 자신이 ‘씹어 버린’ 술잔을 내려놓았다. 비형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 저건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자꾸 빠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티나한식 신호입니다. 인상적이지요?”
티나한은 끙 하는 소리를 냈고 군웅들은 미소를 지었다. 비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신호를 주시니 본론을 이야기해야겠군요. 몇 시간 후 마지막 방에서 나오신 성주님은 제가 하인샤 대사원에 돌아가서 말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적어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비형은 품에서 도깨비지를 꺼내어 펼쳤다.
“나가들이 미증유의 힘을 얻은 지금, 우리들 또한 수백 년 동안 사라졌던 것을 되찾아 우리의 방비를 확고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 북부의 만민들은 이제 권능왕이 행방불명된 이후 사라졌던 북부의 왕을 되찾아야 한다.”
군웅들 사이에서 숨 막힌 비명이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비형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계속 읽었다.
“내가 판단하기로 우리의 왕은 하인샤 대사원에 있다. 그 사람은 왕의 상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와 모든 도깨비는 그 사람을 지지한다. 부디 현명한 판단으로 왕을 찾아 주기를 바란다.”
군웅들은 왕이 하인샤 대사원에 있다는 말에 경악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쥬타기 대선사는 케이건과 그의 등에 매달린 바라기를 재빨리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하이드 변경백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비형은 도깨비지를 접어 다시 갈무리했다.
“이상이 바우 성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보내는 조언입니다. 라샤린 선사님?”
“고맙소. 비형.”
비형은 아래로 내려갔고 라샤린 선사가 다시 단 위에 올라왔다. 선사는 잠깐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선사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목이 메어 기묘했다. 선사는 황급히 헛기침을 한 다음 다시 말했다.
“실로 놀라운 조언입니다만 어쩐지 익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왕이 사라진 이후 수백 년 동안 우리가 계속해서 들어왔던, 그리고 가끔 우리 입으로도 해 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돌아와야 한다.”
라샤린 선사는 한 번 더 말했다.
“왕이 돌아와야 한다.”
군웅들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륜과 사모는, 불신자들의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에 담긴 짙은 그리움과 무서운 상실감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나가 남매는 북부의 사람들에게 왕이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라샤린 선사는 다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모들과 그들의 부모들,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들이 수백 년 동안 계속해 온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왕을 필요로 합니다. 공전절후의 힘을 손에 넣은 나가들이 그 힘을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낙관적 전망이 주는 즐거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왕을 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왕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군웅들은 라샤린 선사의 눈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지배자들은 그 시선을 따라갔고 곧 케이건 드라카의 얼굴을 발견했다. 라샤린 선사는 케이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타게 원합니다. 숨이 끊어지도록 원합니다. 원하다가 죽어 버릴 정도로 원합니다.”
케이건은 조용히 곡차 동이만 바라보았다. 라샤린 선사는 두 손을 조금 펼치며 말했다.
“우리는 왕을 되찾아 우리를 바로 하고, 나가들이 부도덕한 야망을 꿈꾸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감금된 여신을 해방해야 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께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 분은 왕의 귀환에 대해 가장 큰 관련을 가진 분입니다. 케이건 드라카! 나와 주십시오.”
케이건은 조용히 일어났다. 티나한은 그의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날씨는 더웠고 케이건은 의식을 회복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케이건이 곁을 지나갈 때 티나한은 속삭였다.
“힘들면 곧 내려와.”
케이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 위로 올라갔다.
단 위에 선 케이건은 군웅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깐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하늘은 투명한 푸르름으로 녹아 흐르고 있었고 벌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묘한 일이었다. 대호나 용. 두억시니의 존재 때문에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기승을 부리던 매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숨소리마저 조심하고 있었기에 법당 앞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케이건은 고개를 내렸고 곧 말을 시작했다.
“저는 케이건 드라카라고 합니다. 조금 전 거론되었던 구출대의 길잡이였고, 그 전에는 카라보라에 살면서 나가들을 사냥하여 잡아먹고 살았습니다.”
군웅들은 턱이 쑥 빠진 얼굴이 되었다. 륜은 경악하여 비늘을 곤두세웠고 사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륜은 비형과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비형과 티나한은 륜의 시선을 회피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동작에서 륜은 케이건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륜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나가들은 저를 나가 살육자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식인 괴수라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 제 말이 끝난 다음에 그렇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제 의식을 회복했고 아직 길게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할 말을 빨리 끝내야 합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천지를 울릴 것 같았다. 케이건은 여전히 단조로운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저에게는 다른 정체도 있습니다. 저는 최후의 아라짓 전사이며 마지막 키탈저 사냥꾼입니다.”
어디선가 잔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도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믿으실 수 없으실 거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800년 전, 그리고 700년 전 사라졌던 자들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말이 사실처럼 들릴 리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이곳에 계신 고승대덕께 제 정체의 진위를 여쭙는다면 그들은 제 말을 확인해 주실 겁니다.”
“어디에도 없는 신에게 걸고 맹세하오! 그 말은 사실이오!”
라샤린 선사의 외침이었다. 군웅들은 넋 나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주먹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움켜쥐었고 지코마 성주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오레놀은 감동에 젖은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아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제 이름인 케이건 드라카는 키탈저 사냥어로 흑사자와 용을 상징합니다. 모두 나가들에게 멸종당한 것들입니다. 그중 용은 다행히 멸종하지 않았음이 밝혀졌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그 두 이름으로 제 두 가지 복수의 의무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예. 제 어깨에는 두 가지 복수의 의무가 지워져 있습니다. 한쪽 어깨에는 아라짓 전사들의 원한이, 그리고 다른 쪽 어깨에는 키탈저 사냥꾼들의 복수심이 얹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라짓 전사의 의지를 이끄는 검으로 나가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키탈저 사냥꾼처럼 원수의 살을 뜯어 먹었습니다. 재생을 막는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만.”
괄하이드 변경백은 아라짓 전사의 의지를 이끄는 검이라는 말에 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손을 등으로 돌려 그 쌍신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것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것은 영웅왕의 검 바라기입니다.”
기어코 억제하지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핀토 추장은 목소리 높여 그것을 증명하라고 외쳤지만 세미쿼 추장은 그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케이건은 소란이 가라앉고 긴장감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말했다.
“영웅왕께서는 두 자루의 검을 쓰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한쪽 팔을 잃었고, 그래서 두 개의 검 중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그 둘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그것이 이 바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제 내력과 마찬가지로 이 바라기의 내력 또한 대사원의 승려들로부터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 검의 내력을 증명하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의 귀환입니다. 여러분들은 왕을 되찾아야 합니다.”
오레놀은 가슴 벅찬 표정으로 쥬타기 대선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선사 또한 눈물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다시 등 뒤에 걸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떨군 채 침묵했다.
사람들이 불안을 느낄 무렵 케이건은 다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뭐가 흥미로운지 간절히 묻고 싶었다.
“많은 분들이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을 겁니다. 왕이 사과하기 전에는 왕은 돌아오지 않는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다른 저주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모순입니다. 저 자신이 키탈저 사냥꾼의 말예이긴 합니다만 저도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국 아라짓의 의지와 키탈저 사냥꾼의 의지가 한 몸에 있다면? 이제 저 이외에 누구도 왕국 아라짓의 후예라 자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 이외에는 키탈저 사냥꾼도 없습니다. 아라짓의 후계자가 단 한 명이라면 그는 아라짓의 왕이 해야 할 사과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바로 접니다. 제가 저 자신에게 사과한다면 왕이 키탈저 사냥꾼에게 사과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저는 저 자신에게 사과했습니다.”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잖았다면 라샤린 선사는 함성을 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모여든 무리는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선언했다.
“이제 왕은 돌아왔습니다.”
괄하이드가 참지 못하고 일어나려 했다. 그는 북부의 왕을 위해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케이건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
“변경백. 앉으시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그것을 왕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침묵하며 기다렸다. 케이건은 호흡이 약간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조금 어지러운 것을 참기 위해 케이건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제가 제 자신에게 사과하자 여러분들의 왕은 여러분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예. 무수한 사람들이 원했던 것처럼 돌아왔습니다. 왜 돌아와야 할까요.”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생각한 비형은 답을 말하지 말라고 외칠 뻔했다. 비형은 입을 열기 직전 그것이 정말 우스꽝스러운 꼴임을 깨닫고는 가까스로 말을 삼킬 수 있었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바우 머리돌 성주는 그 사람이 왕의 상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왕의 상징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케이건은 그들에겐 정말 엉뚱하게 들리는 말을 꺼냈다.
“왜 저 대호는 자신을 정신 억압할 수도 없는 사람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마루나래에 기대어 있던 사모는 깜짝 놀라 똑바로 앉았다. 그녀는 케이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는 사모를 향해 걸어 가며 말했다.
“돌아와야 한다면, 그 사람은 북쪽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쪽에 있었습니다. 왕의 상징은 이 바라기가 아닙니다. 바라기는 영웅왕의 검일 뿐, 아라짓의 왕을 상징하는 것은 흑사자입니다. 그리고 대호는, 왕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케이건과 사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두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사모 페이 또한 경악하여 일어났다. 그녀 앞에 도달한 케이건은 힘겹게 무릎을 꿇었다.
“이제 왕은 없다. 그리고 왕이 이 모욕에 사과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왕이 없으리라. 예. 당연히 사과의 왕과 귀환의 왕은 서로 다른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를 정리할 왕과 미래로 나아갈 왕이 다르다고 해도 되겠군요.”
케이건은 바라기를 뽑아 그것을 사모 페이 앞에 내려놓았다.
“최후의 아라짓 전사 케이건 드라카는 돌아오신 북부의 왕께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