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01화
오문(五文).
당신은 꿈을 쫓고 있습니까, 아니면 꿈에 쫓기고 있습니까. 나는 쫓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나와 반대가 되길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꿈은…』
오장(五章).
나는.. 살아있는 것인가. 결국은 죽음도 나를 데려가지 못했단 말인가.. 나의 육신(肉身)은 아직도 무사한 것인가.. 나는 또다시 잠들어야 하는가….
하늘은 맑았다. 너무나도 맑았다. 그 하늘은 지금 한 여자아이의 눈에 비쳐 투영(投影)되고 있었다. 곧이어 그 하늘은 여아의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시선을 옮겼기 때문이다.
“휴우…”
여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옷이 남루하고 꾀죄죄한 몰골의 아이는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개미의 행렬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행렬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행렬을 따라가 보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가 자신을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는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애는 그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옆집 친구였다.
“춘미(春美)야…”
춘미라 불리우는 아이는 지금 친구의 행동에 훈계(訓戒)하듯이 말했다.
“소홍(小紅)아. 너 지금 이럴 시간이 어딨니? 네가 빨리 약초를 캐러가지 않으면 네 아버지가 또 경을 칠 게 뻔하잖어. 그러지 말고 어서 나랑 같이 산에 가자.”
소홍은 가기 싫은 듯 미적거렸지만 곧 순응하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누가 있는 듯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무시하고 부엌에 들어가 망태 자루를 들고 나오던 소홍은 안방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겁먹은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방 안에는 삼십 대의 여인이 털복숭이 남자의 품에 안겨 한껏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털복숭이 장한은 그 교태를 받아들이면서 소홍에게 소리쳤다.
“이년아! 아직도 안가고 뭐해?”
소홍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떨려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죄송해요.. 빨리 다녀올게요.”
사내는 영 못마땅한 듯했다.
“에잇..! 자식 새끼 하나 있는 게 저 모양이니….”
“아이~ 서방니~임..”
사내의 품에 안긴 여인이 그의 가슴털을 매만지며 눈짓을 주자 사내는 이내 소홍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는 문을 쳐 닫으며 한소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이년, 오늘 성과가 시원찮으면 알아서 해!”
소홍은 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두려움을 걷어냈다. 집 밖으로 나오니 친구인 춘미가 망태를 어깨에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춘미는 조마조마해하며 물었다.
“맞았니?”
소홍은 고개를 저었다. 춘미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다. 어서 가자. 오늘은 예감이 좋다구.”
“그래..”
둘은 서둘러 인근 산기슭에 올라갔다. 그러나 예감이 좋다던 춘미의 말과 달리 별다른 약초는 눈에 띄지 않았다. 춘미는 소홍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게 인생이잖니… 조금만 더 가면 분명히 좋고 비싼 약초가 있을 거야.”
소홍은 앞서 걸어나가며 입을 열었다.
“누가 뭐라고 했니?”
“그.. 그래? 호호호!”
웃으며 소홍의 뒤를 따라가던 춘미는 소로(小路)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산딸기 군락지를 보았다. 춘미는 소리쳤다.
“소홍아! 산딸기야!”
산딸기라는 말에 소홍은 눈을 번뜩이며 춘미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푸른색과 검붉은색이 알록달록 수놓아져 있었다. 지금은 산딸기 철이 아니기 때문에 저잣거리에 내다 팔면 비싼값에 팔 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춘미가 기뻐했던 것이었다. 춘미는 소홍을 붙잡고 깡충 뛰며 즐거워했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분명히 좋은 예감이 든다고 그랬지? 그치?”
친구의 기뻐하는 모습에 소홍도 오랜만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아무래도 네 말이 맞나 봐.”
춘미는 소홍이 웃자 신이 났는지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걸어 나갔다. 산딸기 군락지에 도착한 그녀들은 잘 익은 산딸기들을 재빨리 따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망태가 탱탱해질 정도로 가득 담을 수 있었다. 들어보니 절로 끙… 소리가 날 정도로 무거웠지만 둘은 마냥 즐거워했다. 더 이상 산딸기가 들어찰 공간이 없자 둘은 그때부터 산딸기 시식(試食)에 들어갔다.
“아아.. 너무 맛있다.”
춘미의 말에 소홍은 긍정을 표하며 열심히 따먹었다. 자신이 약초를 캐가면 아버지란 작자가 들고가서 팔고 그 돈으로 노름질이며 계집질을 했기에 소홍은 제대로 먹을 일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심도 많아서 소홍이 직접 가서 팔면 그 돈 중 일부를 빼돌릴까 봐 자신이 직접 내다 팔았다. 그나마 그녀가 여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친구인 춘미가 간간이 먹을 것을 갖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산딸기를 따먹던 소홍은 갑자기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소홍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아…”
그녀의 뒤에는 삿갓을 쓴 검은 경장의 사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 주위가 피칠한 것처럼 묻어 있는 것도 상관 않고 게걸스레 먹고 있던 춘미는 뒤늦게야 그 사내를 보고 경계를 갖추었다.
“누.. 누구세요?”
사내는 말했다.
“놀랐다면 미안하구나.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 겁내지 말아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음산(陰散)한 목소리와 다소 창백한 얼굴에 굳은 표정의 사내를 보니 그 말이 신빙성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춘미는 힘겹게 망태를 어깨에 걸치고는 소홍의 손을 잡고 가려고 했다.
그 모습에 사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잠깐.”
그 말에 불안에 떨며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들은 화들짝 놀라 멈추었다. 소홍은 춘미가 겁에 질려 눈만 떼구르르.. 굴리고 있는 실정이자 무섭긴 하지만 할 수 없이 자신이 나섰다.
“왜 그러세요..?”
소홍이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짓자 사내는 삿갓 사이로 드러난 한쪽 눈을 빛냈다. 그것도 잠시… 사내는 그 눈빛을 거두고는 손을 들어 망태를 가리켰다.
“그거, 팔 거냐?”
소홍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사내의 손에 고정돼 있었다. 사내의 손이 특이(特異)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먹물을 들인 양 손 전체가 시커맸다. 흑수(黑手)가 햇살에 부딪히며 묘한 반사광을 퍼트렸다.
사내가 손을 내리자 소홍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얼마면 되겠느냐.”
돈 얘기가 나오자 여태껏 무서움에 떨고 있던 춘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망태 두 개 합쳐서 은자 한 냥이예요!”
아무리 철이 이른 과일이라 하지만 좀 비싼감이 있었는데 사내는 별말 없이 주머니를 뒤졌다. 그 모습에 춘미는 더 못 부른 게 못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셨다. 사내가 은자를 꺼내자 소홍이 받으러 그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두 손을 다소곳이 내밀고 은자를 받으려는 소홍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자를 소홍에게 건네준 사내는 소홍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먹지 못하고 살고 있구나. 이 상태로 나가다간 아주 위험하겠어.”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는 사내의 모습에 소홍은 기이한 두려움을 느꼈다. 소홍이 말이 없자 사내가 다시 말했다.
“내가 의술을 좀 아는데 진찰을 해봐도 되겠니?”
소홍이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춘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 부탁이에요. 얘가 요즘 잘 못 먹고 있거든요? 아니, 요즘이 아니라 원래는 평소에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요 근래에는 얘 아버지가 더 괴롭혀서 삐쩍 말랐어요. 옆에서 보기에 불쌍할 지경이에요.”
춘미의 말이 끝나자 사내는 소홍에게 말을 건넸다.
“누워보겠니?”
소홍은 의술을 안다는 말에 공짜로 진찰받기는 쉬운 게 아니므로 자리에 다소곳이 누웠다. 사내는 소홍이 눕자, 얼굴부터 시작해서 팔, 가슴, 몸통, 다리를 지압하듯이 누르며 내려갔다. 소홍은 아저씨의 손가락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손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사내의 얼굴은 경악(驚愕)으로 물들었다. 소홍은 눈을 감고 있어서 그 사실을 몰랐고 춘미는 서서 삿갓 윗부분만 보고 있었으므로 사내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어느새 맺혀있는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춘미는 사내의 팔 소매가 약간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얘, 괜찮은 거예요?”
춘미의 질문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감고 누워있는 소홍에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아직은 별 이상이 없구나.”
소홍은 천천히 일어나서 사내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소홍이 일어서자 춘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홍이 누워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드러누웠다. 그녀는 기대에 찬 어조로 말하며 눈을 감았다.
“자.. 이제 저 해주세요.”
사내는 일어서며 말했다.
“너는 건강하다.”
“예? 그런 게 어딨어요!”
춘미가 억울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지만 사내는 그녀를 무시하고 소홍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소홍은 대답했다.
“강소홍(姜小紅)이요.”
사내는 음미하듯이 중얼거렸다.
“강소홍이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사내가 다시 물었다.
“몇 살이냐.”
소홍은 자꾸만 자신에 대해 물어보는 사내를 다소 경계하며 대답했다.
“열 살이요.”
사내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가거라.”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망태 자루들을 양손에 하나씩 나눠가지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 산중에 뭐하러 산딸기를 샀을까… 하는 생각에 멀찌감치 사이를 벌리며 뒤따라간 그녀들은 소로 변에 서있는 마차를 볼 수 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게 생긴 마차였다. 마부인 듯한 사내가 삿갓을 쓴 사내를 보고 깍듯이 인사했다. 뭐라고 마부에게 중얼거리던 사내는 망태를 들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홍은 마부가 자신들을 은근슬쩍 보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칫!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참? 은자 잘 갖고 있어?”
자기만 진찰을 안 해줬다고 삐져있던 춘미가 그제서야 은자를 떠올렸는지 황급히 물어보았다. 소홍은 한 손에 꼭 쥐어진 은자를 펴 보여 주었다. 춘미는 거의 빼앗듯이 잡아채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녀는 은근슬쩍 웃음을 머금었다.
“호호! 땡잡았다. 얘, 어서 가자.”
“그래.”
소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하는 춘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서 방금 헤어진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소홍은 눈을 크게 뜨며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공허한 수풀만이 그녀를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춘미가 소홍의 행동이 이상했는지 물어보았다.
“왜 그래? 무슨 소리가 들렸어?”
그녀는 멍하니 숲을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아니야..”
그녀는 환청(幻聽)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