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23화
사부는 말을 마치고 품에서 두 권의 책자를 꺼내들었다.
“그것이 바로 이 책들이다.”
일혼은 사부가 자신의 앞에 내려놓은 책들의 겉 표지를 보았다.
‘사혼진경(四魂眞經)…사혼진경(四魂眞經)……이름이 같군.’
일혼은 사부에게 물었다.
“상권과 하권입니까?”
“틀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일혼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사본(寫本)입니까?”
사부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틀렸다. 이 두 권은 같은 원리를 추구하는 무공이되 서로 약간씩 성질이 다른 무공이다.”
일혼은 머리가 아파왔다. 무공 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갔던 그에게 이런 류의 생각은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그는 답답함에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물었다.
“제자의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됩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제자를 불렀으니 설명을 안 해줄 리가 없었다.
“이 두 권의 사혼진경 중 낡은 것은 19대의 사혼대님들께서 남기신 무공이고, 다소 두껍고 깨끗한 것은 20대와 21대 사혼대님들께서 남기신 미완의 무공기서이다…”
사부의 말이 끝나자 일혼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대로다. 20대 사혼대님들은 사부들의 염원을 잇고자 하셨다. 하나, 19대조 일혼님께서 그분들께 평생의 심득을 남겨놓지 않고 그 무공기서를 무덤으로 가지고 가셔서, 20대조 사혼대님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분들이 전대의 사혼대님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경지까지 무공을 하나로 모을 때쯤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재미있는 사건?’
사부는 일혼의 궁금함을 알고 있는 듯 지체 없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대려산에 운석이 하나 떨어진 사건을 알고 있을 게다.”
“물론입니다. 그 운석이 조금만 비켜 떨어졌어도 암흑마교의 반 이상이 폐허가 됐을 뻔했었지요.”
사부는 빙긋! 웃었다.
“바로 그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그 운석이 떨어진 부근에 19대조 님들의 유해가 잠들어 계셨지. 20대조 님들은 다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거기에서 일혼님께서 무덤까지 가져가신 미완의 사혼진경을 얻을 수 있었다.”
일혼의 시선이 그도 모르게 낡은 무공기서로 옮겨졌다. 그러나 곧이어 고개를 들었다. 사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사부의 표정은 처음과 달리 많이 풀어져 있었다. 그동안 숨겨왔던 비사를 제자와 이렇게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처음에 그분들은 많이 망설이셨다. 사부께서 남겨 놓으신 무공을 굳이 손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진본은 다시 유해 속에 안착시켜놓기로 하고 대신 사본을 떠서 자신들이 막혔던 부분을 보충해 보자고 결론을 지으셨다.”
일혼이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대대로 무공을 합일시키는 작업이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입니까?”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다.”
“죄송합니다.”
“내가 어디까지..그래. 그래서 20대조 님들은 서둘러 사본 작업에 들어 가셨지. 허허! 한데,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분들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서도.”
재미있는 게 어지간히도 많은 사부였다. 하지만 그 또한 궁금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혼은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사부가 다 알아서 뜸을 들인 후 이야기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사부는 일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똑같은 목표의 무공을 추구했으되 도출된 양상은 달랐다.”
“예???”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제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그의 사부는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어떠냐. 재미있지 않으냐? 똑같은 네 권의 무공을 각기 함축시켜 또 그것들을 하나로 엮었는데, 19대와 20대의 도출된 무공이 서로 약간씩 다른 성질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19대조 님들의 무공은 태(太)를 근본으로 무공을 합치셨고 20대조 사혼대님들께서는 강(剛)을 근본으로 무공을 합치셨던 것이다.”
일혼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큰 것과 강한 것이라…..’
그는 한참 동안 그 두 가지의 성질에 관해 깊은 고찰을 했다. 그의 사부는 굳이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일각여가 지나자 드디어 일혼이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럼, 21대조 님들은 어떠하셨습니까?”
“하하! 어떠했을 것 같으냐?”
사부의 웃음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설마…”
일혼은 정말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사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설마가 아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20대조 님들은 그분들도 똑같이 21대조 사혼대님들께 자신들의 심득을 봉인해 버리셨다. 대신 21대조 님들께서 한계에 도달하고 십 년 후 모든 유품을 개방하라 이르셨지. 그리고 마침내 21대조 님들은 19대와 20대조 님들의 무공기서를 보시게 된다. 흐흐.. 어떠했겠느냐?”
“제자에게 어떤 대답이 나올지 이미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그래. 그분들의 심득 또한 서로 다른 성질이었지. 21대조 님들의 근본은 즉(則)이었다.”
“즉(則)?”
“그렇다. 이리하면 이리되리라.. 뭐 이런 뜻이었지. 그리고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내 대(代)에 와서 이 사부가 마흔세 살이 되었을 때 나의 사부께서 이 비사를 일러주셨다. 물론, 나도 그때는 지금의 너와 똑같은 심정이었다. 이를 가르쳐주는 시기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무공을 십성 이상 성취했을 때다. 너도 알다시피 자신의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다가는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혼대의 모든 생사 여부 전권은 가주 외엔 언제나 일혼이다. 너도 알겠지만 이제부터 네 책임이 막중하다. 그리고….”
사부는 말끝을 흐리며 품속에서 또 다른 책자를 꺼냈다. 역시, 제목은 사혼진경이었다. 일혼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것은…?”
사부의 표정은 어느새 진지해 있었다.
“내 대에 와서 이뤄놓은 미완의 무공이다. 그것 또한 다른 세 권과 성질이 다르다. 우리들이 남긴 심득은 절(折)이다. 비록 미완이나 이 무공의 앞에서는 그 무엇도 꺾이지 않을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