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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27화


동천은 혓바닥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때 방문 한구석이 조심스레 열렸다. 소연이었다. 동천은 또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야..”

“예?”

눈살을 약간 찌푸린 동천은 다시 말했다.

“야…”

“왜..왜요?”

“엥? 진짜 소연이냐?”

알고 보니 진짜로 소연이었다.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그 대가를 충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으윽! 주..죽인다!”

동천이 괴로워하자 소연은 재빨리 달려와 동천을 부축했다.

“주인님. 괜찮아요? 예?”

동천은 소연을 밀치며 다시 누웠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니 눈깔엔 내가 괜찮게 보이냐?”

소연은 고개를 숙이며 동천의 눈치를 살폈다. 주인의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자 소연은 여기에 온 주된 목적을 실행했다.

“죄송합니다. 곧 식사를 준비할게요.”

먹을 것 얘기에 동천의 안면 근육이 놀라운 변신을 시도했다.

“오오! 그래? 얼른 가져와. 안 그래도 나 배고팠어.”

“예.”

곧이어 상이 들어오고 그 음식들이 식탁에 차려지자 동천은 아픔도 잊어버리고 다급히 먹기 시작했다. 동천은 잘 먹다가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쳐대며 다급한 신음을 터뜨렸다.

“켁켁..무..무울…”

소연은 동천의 놀라운 식욕에 놀라하다가 음식에 목이 매인 동천을 보고, 더욱 놀라하며 얼른 물을 따라주었다.

“여..여기요.”

“벌컥벌컥…크-어…..우적우적! 얌냠…”

소연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은근슬쩍 동천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녀의 주인은 어제 일을 모르는 듯했다.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도망친 덕분에 다른 하녀들이 동천을 씻겨 내느라고 고생을 좀 했지만……

“야, 밥 먹을 땐 밥이나 쳐 먹어. 왜 나를 봐?”

소연은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며 음식들을 주섬주섬 집어 먹었다. 옆에서는 화정이가 얼굴에 밥풀을 묻혀가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배가 차가자 동천이 반찬을 집어가는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 느긋해진 영향 탓인지 그에 따라 잡담도 늘어갔다.

“소연아. 누가 나를 여기로 데려왔지?”

소연은 어제 얘기가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네? 아…그러니까. 밖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던 사정화 아가씨의 마부 아저씨가 주인님을 모셔와서 직접 안고 주인님을 침대에 뉘여 줬어요.”

동천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얼굴 근육이 당기고 아프자 얼른 힘을 풀었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했다.

“뭐? 내 마부 자식은 뭐하고 그년의 마부 새끼가 나를 데려온 거지?”

소연은 한눈에도 주인님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비례해서 소연의 고개는 점점 수그러들었다.

“그..그게….주인님의 마차에 가보니까, 그 마부 아저씨가 기절해 있어서…..”

동천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아아…알겠어. 그건 넘어가고. 그래서?”

지가 때려서 기절시킨 것 때문에 동천은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소연은 의외로 하찮은 것에 집요한 구석이 있는 동천이 그 문제를 간단하게 흘려보내자 약간 놀란 듯했다. 소연은 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를 펴 보였다.

“저..이게 몇 개로 보여요?”

“너 죽을래?”

소연은 자신의 주인이 정상인 게 맞는 것 같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천은 소연의 머리를 때리려다가 어깨가 결리자 약간 인상을 쓰며 손을 내렸다.

“괜찮으세요?”

소연이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것이 좀 불편했는지 동천은 옆에서 계속 밥을 먹고 있는 화정이에게 소리쳤다.

“야! 그만 쳐 먹어! 그러니까 똥을 싸고 지랄이지!”

주인의 고함에 두 여자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하나는 화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연히 소연이었다. 화정이는 명령 때문에 움직임을 멈춘 거였지만, 소연은 화정이가 어떤 일을 벌려놓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동천은 지금 그것에 관해서 소연을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동천의 머리가 거기까지 굴러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지?”

소연은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예. 그다음엔 주인님께서 곤히 잠이 드시고 조금 후에 소진(素珍)님께서 오셔서 주인님을 치료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동천은 갑자기 모르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물어보았다.

“소진? 걔가 뭐 하는 자식인데?”

소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님의 그분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정말 모르세요?”

동천은 눈을 부라렸다.

“이씨..! 그럼, 내가 아는데도 모른다고 하겠냐?”

“그건, 그렇지만…그분은 약왕전 부전주님의 성함이잖아요.”

“…….”

소연의 대답에 동천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아울러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웃었다.

“킬킬킬!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냐? 그냥, 해본 소리야. 그래..그래서 그다음은?”

급히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창피한 모양이었다. 물론, 동천의 성격에 쪽팔림이 있을 리야 없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런 종류와 조금 달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연은 낮게 웃었다. 그 때문에 동천이 더욱 다그쳤다.

“야! 그다음은 어떻게 됐냐니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소연은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 주인의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다시 보러 오신다고 하시고는 돌아가셨어요.”

“그래?”

“예.”

소연의 얘기를 다 듣고 동천은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다. 소연은 자신의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일각 정도가 흐르자 마침내 동천의 말문이 트였다.

“그런데 말이야…왜 사부님이 안 오시고 부전주가 온 거지?”

동천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내심 초조해했던 소연은 밝게 대답했다.

“아~ 그거요? 전주님께서는 잠시 외부로 출타하셨어요.”

동천은 바로 물었다.

“뭐하시러?”

“그거야…호호. 저도 모르죠…아야야! 아파요!”

동천은 소연의 볼따구를 쥐어 잡고 마구 흔들다가 놓아주었다.

“야. 너, 내 하녀 맞냐?”

한쪽 볼이 빨갛게 부어오른 소연은 아픈 볼을 비비며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그럼, 아니어요?”

동천은 눈을 감고 피식! 웃었다. 딴에는 멋있어 보이려고 폼을 좀 잡은 것 같지만 영 아니었다.

“물론 맞지. 그러니까 내가 이 정도로 끝낸 거 아냐. 내 말인즉, 그런 일이 있으면 좀 자세히 알아서 내게 보고를 하란 말야. 알겠어?”

주인의 누그러진 목소리에 소연은 어색하게나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님.”

동천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아. 좋아..”

손가락으로 흥겹게 탁자를 두드리던 동천은 소연의 부어오른 볼을 바라보았다. 여린 살결이라서 약하게(?) 비틀었어도 소연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소연이 무안해할 정도로 그녀의 볼을 빤히 주시하던 동천은 좀 더 친근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팠지?”

소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하나도 안 아팠어요. 정말 이예요.”

동천은 손을 저으며 싱글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네 부어있는 볼을 보니까 아팠을 것 같아서 진짜로 물어보는 거야.”

자신을 위해주는 동천의 말에 감격한 소연은 기뻐했다. 비록 병 주고 약주기였지만, 아마 지금 그녀의 심정은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연은 어느새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내며 환하게 웃었다.

“사실 아프긴 했어요. 헤헤…”

소연은 앙증맞은 혀를 살짝 내밀며 애꿎은 자신의 뒷머리를 긁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소연의 볼을 흔들었다.

“짜식…”

“아야야야야!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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