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30화
소진은 소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 가르쳐 주었냐는 의미인 것 같았다. 당연히 소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잠깐 동안 인상을 찌푸리던 소진은 얼굴을 펴며 동천에게 말해주었다.
“전주님께서는 지금 정신이 없으실 겁니다. 우리 측 아이들이 정도 놈들과 한판 붙었는데 크게 당했다는군요. 그래서 잠시 외단으로 치료 차 나가셨습니다. 제가 가겠다고 말씀을 드려 봤는데 막무가내시더군요.”
말을 다 듣고 난 동천은 슬픈 표정을 내비쳤다.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던 동천은 찢어진 입술이 아프자 은근슬쩍 힘을 뺐다. 그걸로는 좀 약했다고 느꼈는지 눈물을 흘리려고 애를 썼다. 억지로 눈물을 빼내던 동천은 눈물이 안 나오자 자연스럽게 손으로 얼굴 부분을 감쌌다.
“흑….! 사부님……”
엄청난 신분을 가진 약왕전의 소전주이기 전에 조그마한 어린아이인 동천이 울먹이며 그의 사부를 찾자 소진은 코끝이 찡~함을 느꼈다. 그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역시, 어린애는 애구나…쯧쯧. 듣기로는 정화 아가씨께 맞았다는데…’
계속 울어대는 동천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소진은 아가씨께 왜 맞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쉽지만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서둘러 동천을 위로했다.
“자자..소전주. 사부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제 그만 추스르지요. 남이 볼까 두렵소.”
동천은 콧물을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그래야겠지요. 훌쩍!”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소진은 자신의 가슴 섶에 손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침은 오늘 아침에 놔주었으니 내일 다시 와서 놓아 드리지요. 그리고 이건 상처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을 테니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달여 드십시오.”
소진의 품에서 나오는 물건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천은 얼른 손을 내밀었다.
“아? 뭘, 이런 걸 다…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소진이 건네주는 약포(藥包)를 받아든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좋아서 웃었다. 그 모습에 소진은 마음속으로 동천을 대견히 여겼다.
‘음..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억지로라도 밝게 웃다니…속이 깊은 편이군.’
동천의 배려하는(?) 마음을 칭찬하던 소진은 포기했던 의문점이 또다시 고개를 들자 난감해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저렇게 착한 아이가 아가씨께 왜 맞은 걸까? 왜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다. 그 의문 때문에 소진이 난감해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참지 못한 소진의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가 어색하게 닫혔다. 애써 웃고 있는 소전주를 보자, 방금 전 사부를 찾으며 울어대던 그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 소진은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동천이 바라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천은 이 부전주가 그 문제에 대해서 물어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에이..씨발놈. 물어보려면 빨리 물어볼 것이지 사내자식이 줏대없이 입을 열었다가 금세 다물고 지랄이야….’
동천의 입장에서는 아까웠던 것이었다. 뭐가? 바로 사정화에게 맞았던 이유를 그럴싸하게 바꿔서 퍼뜨리는 기회를 잃은 것이.. 할 수 없이 동천이 먼저 말을 꺼내야만 했다. 동천은 먼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휴우…사실은 제게 물어보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죠?”
부전주는 정곡을 찔리자 약간 뜨끔했다. 그러나 지금 소전주가 물어보는 것이 과연 자신이 궁금해했던 그 의문점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전주의 질문을 약간 우회(右回)해서 답했다.
“그렇기야 하지만….”
드디어 말할 기회가 잡히자 동천은 주저하지 않았다. 동천은 약간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아가씨께 맞은 것은 전적으로 제가 잘못해서 맞은 거예요. 아가씨께서 그냥 때린 게 절대로 아니예요. 아가씨는 아무 잘못도 없고요. 이게 모두 다….흑!”
소전주가 결국에는 또 울어버리자 소진은 난감한 침음성을 흘렸다. 소진은 울고 있는 소전주를 굳이 달래진 않았다. 이럴 때는 맺혀 있는 울분을 토해내게 해야 건강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울고 있는 소전주에게 자세한 내막(內幕)을 들을 수는 없었으나 대충 무슨 얘기인지는 알 수 있었다.
‘억울하게 맞은 게로군..’
암흑마교 내에서 사정화는 좀 음침하고 사이한 성격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표정의 변화가 없고 몇몇 외에는 아무도 자신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날 만도 했다. 괜히 이 자리가 거북해진 소진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동천의 울음이 뜸해지자 수건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우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빠진 동천은(억지로 우느라고 힘들었기 때문) 속으로 이를 바득! 갈면서 일부러 코를 힘차게 풀었다.
-패앵! 훌쩍!
그런 후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거 나중에 빨아서 드릴게요.”
소진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하하! 아니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다 사용했으면 그냥 돌려주시지요.”
동천은 약간 망설이는 내색을 보였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동천은 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전주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웃으면서 수건을 받아든 소진은 수건 사이로 엄청난 물량의 액체가 출렁거리자 깜짝 놀랐다. 그가 어찌할 새도 없이 그의 손바닥 안으로 그 액체가 흘러들었다.
‘허-억?’
경악을 한 소진은 하마터면 수건을 바닥에 내던질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린지라 그런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다. 소전주 앞에서 그것을 내던지면 상당한 무례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쓰라고 준 거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어쨌든 그는 부전주답게 허허롭게 웃으며 넘어갔다.
“하하…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빨리요? 더 있다 가지 않고서…”
동천은 서운하다는 듯 그를 붙잡았다. 물론 진심일 리가 없었다. 소전주가 자신을 붙잡았지만, 주머니에 손과 함께 수건을 같이 집어넣은 소진은 되도록이면 빨리 나가서 손을 씻고 싶었다. 끈적끈적한 게 기분이 엄청 잡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빨리 가봐야지요. 그럼…”
그는 소전주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고 밖으로 나갔다. 동천은 부전주가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한쪽 입술을 조용히 말아올렸다. 그리고 부전주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것에 대비해서 한 손으로 입술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부전주가 나가자 동천은 낮게 웃었다.
“히히히…히히!”
그 웃음소리가 잠시나마 동천의 연기에 동화(同化)되었던 소연을 일깨워 주었다. 정신이 든 소연은 어느새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헉? 내..내가 울다니…..’
소연은 갑자기 주인님이 무서워졌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한 곳만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사내는 저자거리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사내였다. 그는 오늘도 자신이 물건을 파는 곳에 자리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며칠을 못 먹은 티가 그의 얼굴에 그대로 배어 나왔다. 주위의 상인들이 그와 대화를 접해본지도 꽤 되었을 정도로 그는 근 한 달 새에 변해 있었다. 그가 풍기는 인상 때문에 손님이 찾아들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 그렇지 않은 손님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작은 도기(陶器)를 집어 들며 물었다.
“아저씨. 이거 얼마유?”
“…….”
도기 주인을 빤히 바라보던 청년은 그가 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목소리가 약간 거칠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듯했다. 여전히 그는 흐린 눈으로 상대를 마주할 뿐이었다. 청년은 별놈의 인간을 다 보겠다는 시선을 보내주며 도기를 내려놓았다. 그 청년이 뒤돌아서는 그때 주인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리며 열렸다.
“큭큭큭…! 필요해? 그래? 그럼 내가 줄까? 응?”
깜짝 놀라 뒤돌아선 청년은 심상치 않은 주인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주인은 떨리는 손을 들어서 물러나는 청년에게 손짓을 했다.
“어디가? 이리 와..내가 줄게…킬킬! 난 그가 어디에 있는 줄 안다고…넌 모르지? 그치?”
“뭐, 뭐야?”
청년은 무서운 나머지 얼른 도망갔다. 그가 도망가자 갑자기 주인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도자기를 파는 주인은 고함을 내지르며 청년을 뒤쫓아갔다.
“이리 와! 난 네게 줄 것이 있다고! 거기 안 서? 으으…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 으아아아!”
미친 듯이 팔을 휘저어가며 달려가자 저자거리 한 귀퉁이가 두 갈래로 벌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정신이 나가 있는 그에게는 오직 도망가는 청년만이 보이는 듯 다른 것에는 전혀 눈길조차 주는 일이 없었다. 미친 사내가 자꾸만 자신을 뒤따라오자 공포감을 느낀 청년은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살려줘요! 어떤 미친 새끼가 쫓아와요!”
그러나 쉽사리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청년을 도와준 것은 평소에 그가 하찮게 여기다 못해 단 한 번이라도 그것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던 자그마한 돌멩이였다. 오직 청년의 등만 보고 쫓아오던 사내가 조그맣게 솟아오른 돌 뿌리에 걸려서 넘어진 것이다.
-쾅!
못 먹어서 가벼워진 체구에 걸맞지 않게 넘어질 때 들리는 소리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 삼 장여(9m) 위에서 떨어져야만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한동안 그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어느 순간 광기에 물든 그의 눈이 뜨여지자 사람들은 급히 물러섰다. 지렁이처럼 약간씩 몸을 꿈틀거리던 사내는 입에 흙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킬킬…준다니까? 내가 가지고 있어. 너 줄까? 응? 응?”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사내의 중얼거림은 모두가 정확히 들을 수가 있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름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아마도 그들은 오늘 밤 잠을 다 잤다는 것을 짐작할지도 몰랐다. 미친 사내는 주위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건 알 바가 아니었다. 오직 “그것”을 건네줄 사람을 구하지 않고서는 밤마다 겪는 고통을 해소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뇌가 후벼 파여지는 고통… 그리고 그 후 들려오는 미지(未知)의 음성…..
-네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건네줘라……그것만이……………..
그 뒷말은 들리지 않았으나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줘야 해..아무나 상관없어. 줄게…준다니까? 킬킬킬!”
그는 힘겹게 일어섰다. 이리 비틀..저리 비틀…쓰러질 듯하면서도 묘하게 중심을 바로 잡았다. 그가 지나가자 잘 짖던 개 새끼도 꼬리를 감추며 숨어들었다. 그가 다 지나간 후에야 그 개의 주인이 나와서 애꿎은 강아지를 걷어찼다.
-깽! 깨갱…!
“이 시키! 내가 그렇게 키웠더냐? 너, 복날에 알아서 해!”
“으르르릉…!”
신기하게도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기도 안 찰 노릇이었다. 그는 주위에 굴러다니는 나무 막대를 집어들어서 강아지에게 휘둘렀다. 곧이어 결과가 드러났다.
“크아악! 개새끼가 주인 문다!”
그의 소란으로 사람들은 어느새 미친 사내의 일을 지워 나갔다. 그렇게 잊혀져 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사건이 몇 년 후 무림(武林)계에 거대한 태풍이 되어 돌아오게 될 것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 미친 사내의 이름은 “민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