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33화
“그게 아냐.”
사정화는 수련을 매섭게 쏘아보며 들고 있는 목검으로 수련의 팔목을 아래에서 슬며시 올려쳤다. 탁..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야…”
수련이 아파했지만 사정화는 봐주는 기색이 없었다.
“그 자세로 움직이지 마. 목검의 끝을 노려봐. 그리고 그곳으로 자신의 기를 보낸다고 생각해.”
수련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말이야 쉽죠..”
맞는 말이었다. 지금 사정화가 제시한 부분은 간단했지만 막상 해보려면 아주 어려운 사항이었다. 그러나 사정화는 모든 것을 자신의 주관으로 맞추려는 성향(性向)이 강했다. 지금도 그러했다. 자신이 해냈던 거니까 남들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말뿐이 아냐. 정말로 쉬워. 빨리 해.”
“히잉…”
팔이 저려 왔지만 쉽사리 내릴 수가 없었다. 조금만 팔이 내려와도 잊지 않고 아가씨의 목검이 자신의 팔목을 때렸기 때문이다.
‘아아~.. 괜히 그동안의 성과를 보여준다고 했다가… 내가 미쳤지. 맞아. 내가 잠깐 동안 미쳤었나 봐. 그저 가만히 나 있었으면 지금쯤 과자를 먹으며 놀고 있었을 텐데.. 으으. 팔 아프다.’
더 이상 못 참을 지경까지 도달하자 수련은 슬그머니 아가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의외로 사정화는 수련을 보고 있지 않았다. 수련은 이 기회를 노리고 살며시 팔을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정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련아.”
“예? 예! 알았어요. 든다구요. 들어요..”
수련이 찔끔하며 팔을 들었지만 사정화는 수련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제서야 의아함을 느낀 수련은 아가씨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어? 도연 오빠잖아?”
사정화가 곁눈질로 물었다.
“아는 애야?”
“예. 동천의 하인 오빠예요. 그런데 여기에는 왜 왔지? 아… 맞다. 그것 때문에 왔나보다.”
“그것?”
아가씨가 물어오자 수련은 좀 난감한 신색으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수련은 급히 팔을 저었다.
“호호. 아니에요. 며칠 전에 왔었던 소연 언니가 뭐 좀 놓고 갔는데 아마도 그걸 찾으러 왔나 봐요.”
사정화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수련은 도연이 온 계기로 목검을 놓게 되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어느새 거진 다가온 도연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오빠? 그거 받으러 왔어요?”
얼굴에 흠씬 땀을 흘려대며 뛰어온 도연은 굳어있던 안색을 약간 일그러뜨렸다.
“그거라니..”
수련은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되물었다.
“몰라요?”
“몰라.”
“이상하네… 분명히 언니가 그거 가지러 온다고 그랬는데……”
머리를 이리 기웃..저리 기웃. 하고 있는 수련을 계속 주시하던 도연은 자신이 어째서 이 소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사정화는 자신의 일이 아니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도연은 수련을 무시하고 얼른 그녀를 따라잡았다.
“주제넘게 여쭈어볼 말이 있습니다.”
사정화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은 삐딱하게 고개를 돌린 사정화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알긴 아는구나.”
잠시 마른침을 집어삼킨 도연은 전혀 꿀림 없이 사정화를 직시했다.
“어찌하여 제 주군이 맞았는지요.”
도연의 입에서 약간 이상한 어감이 튀어나오자 사정화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주군?”
“예. 주군입니다.”
다소 실소를 터뜨린 사정화는 곧이어 그 표정을 지웠다. 수련을 바라보자 수련은 모른다며 소리 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사정화는 도연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것을 왜 나에게 묻느냐. 그 녀석은 입이 없다고 하더냐?”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도연은 굽힘 없이 말을 내뱉었다.
“제가 불민하여 그 당시 다른 곳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야 돌아오는 길에 주군의 다친 모습을 보니, 제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이성이 흐려져 미처 그 물음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함부로 찾아온 것이 불경인 줄 아오나 직접 대답을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조리 있는 도연의 말에 사정화의 시선이 약간 변했다. 도연을 주시하며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던 사정화는 어느새 팔짱을 풀고 자못 다른 모습으로 도연을 대했다.
“좋아. 말해주지. 네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동천은 그동안 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많이 해왔다. 그리고 맞던 날 바로 전날에 내가 이곳으로 잠깐 쉬러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례하기 짝이 없게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왔고, 그러고도 진실된 용서를 빌 생각은 안 하고 어떻게 하면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머리를 굴리고만 있었어. 흥! 이제 왜 그 녀석이 맞았는지 알겠느냐?”
도연은 할 말이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주군이 잘한 짓은 티끌만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깊숙이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정말이냐?”
“예. 어느 분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사정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를 꽉 물어라.”
사정화의 명령에 이를 악다문 도연은 매서운 따귀를 얻어맞아야만 했다. 짝! 소리와 함께 도연의 상체가 한껏 휘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플 만도 하건만 도연의 얼굴에서는 변화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한 대 더 치려고 손을 들었던 사정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만두었다.
“이것으로 너의 잘못을 용서해주마.”
“감사합니다..”
사정화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험악해진 분위기에 아가씨를 쫓아가려던 수련은 생각나는 게 있는지 도연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저 좀 잠깐 따라오실래요?”
아까 그것 어찌구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도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침을 뱉어내자 타액 속에 약간의 핏물이 섞여 나왔다. 수련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마? 피잖아? 괜찮아요? 아파요? 혹시, 이빨이 깨졌나요?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그래요? 휴… 다행이다.”
자기 혼자 물어보고 자기 혼자 결론을 내리는 수련의 행동에 도연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안쪽이 약간 터진 상태였지만 그녀 스스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굳이 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안 가?”
“예? 아아..호호! 내 정신 좀 봐. 가야죠. 따라오세요.”
수련이 도연을 데려간 곳은 물품 보관 창고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자그마한 동굴이었다. 왜소한 어른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그 동굴에서는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곳까지 도연을 안내한 수련은 엄청 꺼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예요. 저기에 언니가 며칠 전에 그 커다란 쥐새끼를 썩지 않게 넣었다고 했거든요? 근데 다음날 찾아온다고 그랬으면서 안 오더라구요. 어휴.. 저기에서 빼낼 것도 많은데 무서워서 며칠째 못 들어가고 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동천 그 녀석이 그 커다란 쥐를 가져오라고 했대 나 봐요. 그래서 제가 오늘 오빠를 보고 오빠가 언니의 부탁을 받아서 온 건 줄 알았던 거예요. 꺼내 줄 거죠? 그쵸?”
도연이 그런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도연은 쾌히 승낙을 했다.
“좋아. 어디에 있지?”
도연의 대답에 수련은 좋아서 펄쩍 뛰었다.
“와아! 고마워요. 오빠. 따라오세…요가 아니고 한번 들어가 보세요. 오른쪽 구석에 보관해 놨다고 그러니까 조금만 찾아 보시될 거예요. 헤헤.. 저는 보시다시피 무서워서요.”
“알았어.”
도연은 굳이 쥐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달라고 억지를 쓰지 않았다. 그럴 거라면 수련이 자신을 데려왔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보아하니 그녀 또한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찬 공기가 도연의 폐를 내리 씻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좁다란 길목은 일 장 정도였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 밝은 빛과 함께 엄청난 고기류와 야채류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도연은 잠깐 동안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막상 안을 대하고 보니 그 수량이 장난이 아니게 많았던 것이었다. 이 정도면 네 가족 한 식구가 일년 정도는 너끈히 먹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도연은 수련의 말을 나직이 되씹어 보았다.
“오른쪽 구석이라….”
도연은 오른쪽 벽면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머리 위에는 반 장 간격으로 횃불이 켜져 있어서 시력이 적응되면 쥐의 시체를 찾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무심코 걸어가던 도연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도연의 시선 끝은 횃불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기한데? 어떻게 이 냉기류에 불이 타들어가고 있는 거지?”
도연은 무심히 빛을 뿜어내는 횃불을 계속 주시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 횃불이 답을 가르쳐줄 리가 없었다. 여기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한 도연은 서둘러 바닥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도연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한참을 찾았지만 쥐의 시체는커녕 쥐꼬리도 보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난감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