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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84화


예전에 마차를 쓰려면 아무 때나 쓰라고 동천이 허락을 내렸었지만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마부 아저씨를 귀찮게 하는 게 미안했던 소연은 화정이를 이끌고 걸어서 가기로 했다. 약왕전에서 사정화 아가씨의 집은 대략 반 시진 정도가 걸렸다. 만약, 예전의 소연이었다면 걷는 데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내공이라는 든든한 지원자가 있어서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

“생각해보니 주인님께서 만검전에 가신 후로는 수련이를 못 봤네? 후후, 만약 지금 가면 굉장히 놀라하겠지?”

소연이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바로 자신의 미모(?)를 보고 음흉한 시선을 던지는 사내들 때문이다.

‘으으, 나를 보는 저 아저씨들의 눈빛 좀 봐. 무서워. 혹시, 나를 덮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렇겠지?’

누가 보아도 사내들의 시선은 화정이를 향해 있었지만 소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연은 두려운 나머지 화정이의 손을 꼭 잡았다. 입맛을 다시며 화정이의 전신을 훑어보던 사내들은 그녀의 어깨에 새겨진 약(藥)자를 발견하곤 기겁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비단 이 사내들만이 아니었다. 동생을 찾아가는 내내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이상하다? 어째서 모든 아저씨들이 처음에는 나를 음흉하게 바라보다가 조금 후에는 도망치듯 사라지는 거지?’

소연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왠지 찝찝함을 금치 못했다. 사실 사내들이 이상하게 행동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작년 가을에 어떤 하급 무사가 약왕전의 하녀를 희롱한 적이 있었다. 책임질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어서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울고 있는 하녀를 동천이 지나가다 보게 된 것이었다. 동천은 하녀의 억울함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 하녀와 친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심심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하녀를 희롱한 하급 무사를 개 패듯이 패버렸다. 후에 간신히 살아난 그 무사의 얘기로는 자신을 때리다 싫증이 난 소 악마가 무사들을 동원해 이차로 그를 두들겨 팼다고 한다. 참고로 그 무사는 지금 거지로 전락해 하루하루 빌어먹는다고 한다. 그때 소연의 의문은 끝을 맺었다. 이유는 목적지에 다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다 왔어. 화정아.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수련이를 보면 돼.”

방금 무공 수련을 마치고, 목욕을 마친 수련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갔다.

“누구세요?”

“언니야.”

“뭐? 언니라고요?”

문을 벌컥 열어 제낀 수련은 반가운 사람의 등장에 입이 째져라 좋아했다.

“와아! 진짜로 언니네요?”

소연은 새침한 눈으로 동생을 약간 흘겼다.

“어머? 그럼, 누구인 줄 알았어?”

“그냥 해본 소리예요. 들어와요. 응? 화정이도 왔네? 안녕?”

수련이 자신에게 손을 흔들자 화정이도 마주 흔들어주었다. 수련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머? 이제는 손까지 마주 흔들어줄 줄도 아네?”

화정이의 변화는 곧, 자신의 피눈물 나는 애정과 노력의 결과였다. 의기양양해진 소연은 두 손을 양쪽 허리에 척 걸어 맸다.

“그야 당연하지. 우리 화정이는 나의 끊임없는 관심과 가르침 덕분에 나날이 성장한다고. 아마도 내 생각에는 올해 내로 말도 트일걸?”

수련은 갑자기 언니의 자태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감명을 받은 수련은 존경의 눈으로 소연을 우러러보았다.

“대단해요! 제가 처음 언니를 보았을 때, 한눈에 그 대단함을 알았지만 무지했던 저 화정이를 이렇게까지 성장시킨 것을 보면 언니는 아무래도 예사 인물이 아닐 거예요. 혹시, 언니의 선대는 뼈대있는 가문이었을지도 몰라요. 아참? 족보는 가지고 있나요? 에이. 없다고요? 그런 건 필히 챙겨두었어야죠. 저요? 헤헤헤. 물론 저도 없죠. 그러나 적어도 언니만큼은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물어본 거니까 그 얘기는 이제 그만두고요. 뭐 좀 먹을래요? 호호. 그럴 줄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소연은 동생의 그 무시무시한 수다의 바다에서 겨우 빠져나온 뒤 한숨을 돌렸다.

‘휴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수련이는 다 좋은데 한번 말을 시작했다 하면 끝이 없어서 탈이라니까?’

소연이 화정이와 나란히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때 수련이 한 접시 가득, 꿀떡을 가져왔다.

“맛있을지 모르겠지만 드세요. 꿀이 달지 않을까 모르겠네?”

소연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분명히 네가 만든 거니까 맛이 있을 거야.”

“호호! 고마워요. 언니.”

소연이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달콤한 떡을 씹으면서 행복한 표정이었다. 화정이는 소연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 집어먹었다. 그걸 본 소연은 입안의 꿀떡을 재빨리 삼킨 후 주의를 주었다.

“화정아. 조금만 먹어. 알겠지? 너 살찌면 주인님께 내가 혼난단 말야.”

화정이는 혼난다는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 안 되었던 소연은 젓가락으로 화정이 것을 따로 덜어주었다. 자신 앞으로 들이밀어진 음식과 작은 주인이 먹는 음식을 번갈아 본 화정이는 자기 것은 제쳐두고 소연이의 꿀떡을 집어먹었다.

“아앗? 뭐 하는 거야. 네 건 이거라니까? 너 정말로 이러면 그것마저도 못 먹게 할 거야. 알았지? 알았으면 그거나 먹어.”

찔끔한 화정이는 손가락에 묻은 꿀을 핥아먹은 후 더 이상 소연의 그릇을 노리지 않았다. 방금 전의 상황이 묘했는지 수련은 소연에게 냉큼 물어보았다.

“언니, 왜 그래요?”

“뭘?”

“그러니까, 왜 화정이에게 꿀떡을 나눠주냐고요. 전에는 그냥 먹게 해주었잖아요.”

소연은 갑자기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사실은 두 달 전에 주인님이 만검전에 가셨거든? 그런데 그 후로부터 화정이가 음식을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먹어대더라고, 그래서 내가 알아보았더니 주인님과 떨어져서 불안한 나머지 그러는 거래. 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살이 찐다는 거야. 만약, 내가 제재를 안 해주었으면 지금쯤 살이 잔뜩 쪘을걸? 생각해봐. 나중에 살이 찐 화정이를 보면 주인님이 어떻게 돌변하실지. 아아, 그 생각만 하면 무서워 죽겠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수련조차 언니의 말에 동조를 했다.

“듣고 보니, 큰일이라면 큰일이겠네요. 그 성깔 더러운 동천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죠. 안 되겠다. 화정아. 그만 먹어.”

수련은 화정이가 맛있게 먹고 있는 꿀떡을 자신이 가로챘다. 잠시,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몰라 하던 화정은 곧 사태 파악을 하고 수련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았다.

“앗? 빼, 빼앗아?”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수련은 당황했다. 그 정도로 화정이의 행동은 의외였던 것이다. 화정이는 만일을 대비해 수련을 경계하며 남아있는 꿀떡 다섯 개를 한꺼번에 입 속에 넣고 씹었다.

“오물. 오물. 컥! 오물… 컥컥!”

소연은 파랗게 변해 가는 화정이의 안색을 보고, 저도 따라 파란 얼굴을 했다.

“화, 화정아! 목에 걸렸어? 그런 거야?”

“컥컥컥!”

“꺄악! 죽으려나 봐요!”

소연은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동생을 제쳐두고 급히 물을 찾았다. 다행히 물은 바로 옆에 있었다.

“자, 화정아. 입을 벌리고 이것 좀 먹어!”

다소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받아든 화정이는 쭉 들이켰다. 처음에는 목이 막혀서 물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맹꽁이 배처럼 부풀었던 화정이의 볼은 차츰 줄어들어 갔다. 목구멍이 뚫린 것이다. 화정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소연은 한순간 긴장이 풀림을 느꼈다.

“수련아. 나 가슴 뛰는 것 좀 봐.”

정말로 소연의 가슴은 기복이 심했다.

“정말이네요? 어휴. 전 쟤가 죽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소연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소리 마. 죽는다니. 아까 얼마나 무서웠다고… 흑흑!”

수련도 울 듯한 얼굴을 하면서 소연을 달랬다.

“언니, 울지 마요.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잖아요.”

그렇긴 했지만 울음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아예 대놓고 울었다.

“엉엉엉!”

“울지 마요, 언니. 나까지 눈물이 나오잖아요.”

“엉엉엉!”

“으앙! 언니!”

화정이는 계속 울어대는 작은 주인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수련이는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손을 가져가 소연의 눈물을 살짝 만져보았다. 따듯했다. 뭔지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웃었다. 소연은 다소 원망스러운 눈으로 화정이를 보았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 알겠어? 또 그랬다가는 다시 안 볼 줄 알아.”

화정이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연은 얼른 눈물자국을 지웠다.

“수련아. 나 갈게.”

“벌써요?”

수련은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지금 언니의 기분을 알기에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언니를 바래다주러 같이 따라 나갔다. 소연은 동생과 헤어지기에 앞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또 올게. 아가씨께 안부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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